- 029회 -
1층부터 4층까지의 문에는 친절하게도 누군가 빨간 글씨로 ‘좀비 있음’이라고 적어두었다. 그걸 보고도 문을 열어볼 강심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게 있었나?’
준성은 여태껏 꿈에서 이 비상계단을 이용했을 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빨간 글씨를 보고 의아해했다. 판에 박힌 듯 똑같이 반복되던 꿈과 달리 이렇게 아주 자그마한 변수가 보일 때마다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 글씨만 보고서 앞뒤 상황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장은 무시하고 올라가기로 했다.
5층부터는 문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좀비들이 가득한 건 4층까지뿐이고, 5층부터는 그 어떠한 좀비도 없었다.
올라가다 쉬고, 올라가다 쉬는 걸 반복한 끝에 겨우 7층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때쯤엔 준성과 태주 둘 다 다리의 후들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숨이 약간 흐트러진 정도 외에는 누가 봐도 멀쩡한 한서가 준성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하아, 하아…. 어…. 일단은…….”
운동 부족이라는 걸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천천히 숨을 고른 준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꺄아아악!”
“조, 좀비! 좀비!”
예비전력 덕분에 환한 불이 켜져 있는 7층 복도에 때마침 지나가던 남녀가 있었나 보다.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준성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뭐?! 좀비?!”
“으아아! 살려줘!”
좀비라는 단어 하나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들려왔다. 일일이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밖에서 좀비에게 죽을 뻔하다가 겨우 이곳으로 대피한 사람들인 듯했다.
“저흰 좀비 아니에요.”
숨을 고르며 말하자, 비명만 질러대던 사람들이 그제야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아, 뭐야. 옷에 피 묻은 거네.”
“크흠, 거, 누가 좀비라고 소리치고 그래요?”
저들끼리 괜히 민망해하며 속닥거렸다. 어느새 복도에는 여섯 명이나 모여버렸다.
“대피 오신 분들이세요?”
20대 후반의 한 남자간호사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왔다. 병원 밖에 흉폭한 좀비들이 판치고 있다는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근심 걱정 없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간호사가 ‘어?’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여기로 오는 비상계단은 다 잠겼을 텐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지하 3층의 4번이라고 쓰여 있는 비상계단은 문이 열리던데요.”
준성의 대답을 들은 파마 머리의 40대 여자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니! 4번 계단 다 잠그기로 한 사람 누구예요?! 일 똑바로 안 하네!”
한 여자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병원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한 사람씩 각각 여덟 개의 비상계단을 잠그고 다니기로 한 모양이었다. 좀비 때문이건, 사람들이 더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서건, 여덟 명 중 한 명이 게으르게 일해준 덕분에 준성 일행이 들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간호사가 복도에 모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힘들게 올라오신 분들이니까 신체검사 해서 문제없으면 이분들도 호실 배정해드릴게요. 어차피 침대도 남으니까 괜찮죠, 다들?”
“뭐, 알아서 해요. 검사만 좀 신경 써주고.”
누가 봐도 환자가 아닌 복장을 한 여섯 사람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간호사에게 모든 걸 맡긴 채 각자의 병실이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준성과 한서, 태주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한 입원실 앞에 섰다. 지금은 쓰지 않는 개인 병실 같았는데, 그 안에서 옷을 벗고 물린 자국을 확인할 예정인 듯했다.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세 사람을 다독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간호사 박현제라고 합니다. 지금은 생존자분들과 7층 환자분들의 간단한 케어를 맡고 있어요.”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현제가 새삼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설마 저 많은 좀비를 뚫고 오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대단하십니다.”
장난스럽게 엄지까지 치켜든 현제가 누구부터 옷을 벗어주시겠냐고 물었다.
“먼저 검사받고 쉬세요.”
“그래도 될까요?”
준성의 말대로 얼른 쉬고 싶었던 태주는 현제와 함께 냉큼 병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병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준성이 한서의 팔을 꽉 붙잡았다.
“저 사람, 믿지 마.”
굳은 얼굴을 한 준성이 한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아는 박현제 간호사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준성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주 다음으로는 한서가 검사를 받았다. 둘 다 아무 이상도 없고 생채기마저 없었기에 빠른 OK 사인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준성이 병실 안에 들어갔다.
“코트는 제가 받아드릴게요.”
준성에게서 따뜻한 코트를 받아든 현제가 그 표면에 묻은 핏자국들을 열심히 눈으로 훑어보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사투를 벌이다 오신 느낌이네요. 세 분 중에 피가 제일 많이 묻어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대충 대꾸해주며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현제가 코트를 한쪽 팔에 걸치고는 준성이 옷을 벗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팔에 있는 멍은 어떻게 된 거예요?”
셔츠를 벗은 준성의 왼팔에는 여전히 휘감긴 듯한 네 줄의 멍이 남아있었다. 거의 균일하게 네 개의 멍이 나 있는 경우는 드무니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자세히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래야 할 필요도 느낄 수가 없어서 말을 아꼈다. 몸 곳곳을 보면서 일일이 반응하고 관심을 가지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지금은 벨트에서 풀어낸 마체테를 보면서 ‘이걸로 좀비들을 뚫고 오신 거군요!’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상체를 완전히 탈의하고 현제를 바라보니, 그가 당연한 듯 ‘아래쪽도 벗어주세요’라고 말했다. 준성은 순순히 바지 버클에 손을 대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현제가 은밀히 속삭였다.
“아까 그분도 몸이 참 좋으시던데, 그쪽은 또 다른 의미로 몸이 좋으시네요.”
“그런가요.”
준성은 현제가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얘기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빨리 검사를 끝내고 이 답답한 입원실에서 나가고 싶었다. 전혀 다른 타인을 본인인 척하고 다니는 사람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게 이렇게 꺼림칙한 것일 줄은 몰랐다.
준성이 바지를 내리던 그때.
현제의 손가락이 엉덩이골 바로 위에서부터 시작해 척추를 따라 등허리를 훑으며 지나갔다. 그 느낌이 너무 소름 끼쳐서 뒤를 홱 돌아보니, 아까의 해맑던 모습과 달리 저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등허리랑 척추 라인이 너무 예쁘셔서 저도 모르게 손을 댔네요. 죄송합니다.”
“예….”
등허리를 만져서 깜짝 놀라게 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예쁘다는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속옷만 남기고 옷을 다 벗은 준성은 자신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면서 몸을 위아래로 훑는 현제의 시선이 너무나 불쾌했다. 이런 신체검사가 처음도 아닌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마치 눈으로 품평 당하고 있는 것 같달까.
‘하긴, 저 남자 자체가 수상한 사람이라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 수도 있지.’
혼자 그렇게 납득하던 준성은 현제가 그의 오른손을 받쳐 드는 걸 느끼며 아차 했다.
“다치셨네요?”
셔츠 소매가 긴 편이라서 붕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옷을 다 벗은 상태에서는 당연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네.’
오른손의 상처는 대피소에서 좀비화가 진행 중이던 남자에게 심하게 물렸던 상처다. 누가 봐도 사람의 치아에 물린 상처였기에 붕대를 풀면 당연히 난리가 날 거다.
오른손의 상처를 예상치 못했던 준성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현제가 물었다.
“괜찮으니까 잠깐 풀어봐도 되겠어요?”
준성은 어차피 안 보여주려고 해도 문제가 되니, 그냥 깔끔하게 보여주기로 했다.
붕대를 풀고 거즈를 걷어내자, 피가 뭉친 선명한 잇자국이 보였다.
분명 사색이 되어 거리를 둘 줄 알았더니, 현제는 의외로 차분했다.
“사람한테 물린 거죠? 물린지 몇 시간 된 것 같은데, 맞나요?”
“예, 맞아요.”
현제의 말대로 이 상처는 전날 저녁에 물린 것이었다.
지금은 오전 11시 무렵.
대충 시간만 가늠해 보자면 물린지 약 17시간쯤 지났다.
좀비에게 물리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좀비가 되는지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다. 물린 범위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제의 남자처럼 한 곳만 물린 것 기준으로는 약 15분 내외로, 보통 그 안에 심장이 멈춰서 사망함과 동시에 좀비가 된다.
즉, 준성의 상처가 아문 정도만 봐도 그가 사람에게 물렸는지 좀비에게 물렸는지 알 수 있었다.
현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 정도면 역시 감염되지 않으신 거네요. 그나저나 여길 문 사람은 좀비 흉내라도 내고 싶었나 봐요. 아팠겠다….”
현제는 직접 붕대를 다시 감아주었다. 그의 손길을 본 준성은 현제의 손놀림이 실제로 의료 일을 하는 것처럼 능숙하다는 걸 알았다.
‘진짜 간호사, 혹은 의사인가? 그럼 왜 굳이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거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