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8회 -
“우아아악!”
“뒷문 열어, 한서야!”
준성의 말에 한서가 반사적으로 뒷문의 잠금쇠를 해제했다. 곧바로 뒷좌석에 탄 남자가 가운데 자리에서 주문을 외웠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한서는 시끄러운 남자를 한차례 노려보다가 침착하게 뒤로 후진했다. 부드럽게 굴러간 차는 후진을 통해 좀비 떼와 거리를 벌렸다. 정차된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차량의 머리를 반대로 돌려 달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셈이지만, 차로 밀어붙여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 저 많은 수의 좀비들과 직접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길이 막히지 않은 길을 새로 찾기보다는 이미 지나온 길이긴 해도 명백하게 뚫려 있는 길로 도망치는 게 나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좀비들을 끌어낸 뒤에 남자의 차가 왔던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만, 그의 차가 유일하게 뚫린 라인을 정면으로 막은 채 멈춰 서서 어차피 그쪽 길은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 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좀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지나온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그제야 한숨 돌린 남자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준성은 백팩에서 500ml 생수 한 병과 칼로리 바 하나를 건네주었다.
“숨 좀 돌리세요.”
준성이 준 생수와 칼로리 바를 본 남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감격스럽게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쫄쫄 굶은 걸 어떻게 아시고.”
푸석한 얼굴만 봐도 대충 예상은 가지만 준성은 꿈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준성이 ‘지하철 터널 대피소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결정을 내렸던 회차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는 2일 차, 즉 오늘 날짜에 지하철 대피소로 이동해 그곳에서 15일 차가 될 때까지 머무르게 된다.
당시 준성은 만반의 준비를 하여 15일 차까지 대피소에서 머물렀지만, 그날 꽤 멀리 떨어진 지하철역에서 출발한 좀비들이 터널을 완전히 점령하는 바람에 그 회차를 포기해야만 했다.
준성은 남자와 친했었다고 할 만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피소의 사람 중에서 남자를 기억할 수 있었던 건, 그가 15일 차에 채이를 구하고 대신 좀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빚을 갚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준성은 왼손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남자는 오전 10시쯤에 대피소에 도착했던 것 같다. 그가 그때 대피소에 다다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철호 덕분이었다. 철호는 생존자가 있을지 몰라서 수시로 인한역을 정찰하고 있었고, 때마침 플랫폼으로 도망쳐온 남자가 그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찰도 불가능했고, 인한역의 스크린도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지하철 터널도 이젠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준성은 남자가 죽길 바라진 않았다.
“어디 가시는 길이셨어요?”
“푸하! 아, 예. 대피소 찾아 삼만리였어요. 비상대피소라고 붙은 곳 중에서 제가 찾은 곳은 다 꽝이지 뭐예요. 두 분은 어디 가세요?”
“저흰 인한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그곳에 구조헬기가 온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예?! 정말요?!”
남자가 눈에 띄게 좋아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저도,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요!”
순간, 뒷좌석의 남자를 돌아본 한서의 눈빛이 살기를 담았다. 그걸 본 남자가 숨을 들이켜며 눈을 굴렸다. 그렇다고 놔두고 가라고 하기엔 당장 앞날이 불투명하니 어떻게든 같이 가고 싶을 거다.
준성은 한서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며 그의 팔을 잡았다. 한서는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준성이 남자에게 ‘같이 가죠’라고 말하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 * *
병원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좀비들이 속속 차 앞을 가로막았고, 개중에는 트렁크에 매달려서 집요하게 따라오던 자도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건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의 앞뒤로 다수의 좀비를 만났을 때였다. 한서의 과감한 돌격이 있었기에 뚫을 수 있었으나, 대신 앞 유리창과 범퍼가 꽤 크게 훼손되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좀비도 거의 만나지 않고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전의 길은 병원의 중간지점까지 터널로만 이동했던 준성에겐 전혀 모르는 길이었지만, 터널을 나온 후부터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좀비가 없거나 가장 적은 길을 골라 갈 수 있었고, 막히는 일 없이 지름길까지 활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인한병원 부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 무, 문에 좀비들이 한가득……!”
뒷좌석의 남자가 인한병원 입구와 유리창을 온몸으로 가득 메워버린 좀비 떼를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래서는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다.
캬학!
칵! 카악!
움직이는 새로운 차를 발견한 몇몇 좀비들이 준성이 탄 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서는 그들의 앞을 막는 좀비를 액셀까지 밟아 쳐내고서는 태평히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
“지하주차장으로 돌진해.”
좀비들을 볼링핀 쳐내듯이 받아버리며 준성의 말대로 지하주차장을 향해 달렸다. 진입을 막는 얇은 바가 있긴 했으나, 준성이 멈추라고 하지 않았기에 좀 더 속력을 높여 들이받았다.
쾅!
부러진 바가 반으로 쪼개져 날아갔다. 안으로 진입하니 바가 부러지면서 난 큰 소리에 주변의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캬아악-!
으어어어!
차를 향해 사방에서 달려든 좀비들이 사이드미러나 트렁크, 차 천장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들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일행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으악!”
차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좀비들을 보며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이제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한서는 주차장을 가르며 일부러 차체를 크게 흔들리게끔 주행했다.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좀비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3층까지 내려가야 해.”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입구란 입구는 온통 막혀버린 상태였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조심성으로 인해 비상계단 역시 대부분 잠겨 있는 상황이었다.
워낙 큰 병원이다 보니 층마다 총 여덟 개의 비상계단 입구가 있었다. 준성은 그중에서 3층의 네 번째 비상계단으로 향하려 했다. 모두 잠긴 것처럼 보여도 유일하게 잠겨 있지 않은 게 그 계단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3층에 다다랐지만 엉망진창으로 배치된 차와 뒤쫓아오는 좀비들 때문에 차를 그대로 입구까지 몰고 갈 수가 없었다.
“내려서 뛰어가죠.”
“뛴다고요?!”
뒷좌석의 남자가 기겁하는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준성과 한서가 주저 없이 내려버리니 그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서는 여차하면 준성을 끌어안아 그를 보호할 생각으로 바로 옆에서 뛰었다. 그런 한서에게 준성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위험해져도 끌어안으면 안 돼. 들키게 될 거야.”
한서가 ‘백신’이라는 건 확실히 중요하지만, 일찍부터 사람들에게 그의 능력을 들켜서 좋을 게 없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준성은 한서가 구조헬기에 오르기 전까지라도 절대 그의 능력을 들키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계단으로 뛰어간 준성은 이 문이 자신의 꿈속에서 봤던 대로 시원하게 열리길 바랐다. 지척에 다다른 좀비들의 발소리와 괴성을 들으며 비상계단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역시나 열려 있었다.
세 사람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곧바로 문에 좀비들이 달려와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그들이 괴성을 지르며 문을 마구 두드리는 타격음이 이어졌다.
“으아….”
남자가 벽을 짚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준성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근데, 헉, 여기 너무 어둡네요….”
그들이 선 비상계단은 아예 불이 안 들어오는지 아주 깜깜했다. 심지어 비상구 표시등까지 꺼져 있다.
“병원의 전기가 다 나갔을 거예요.”
좀비들이 배선을 갉아먹어서 병원 전체의 전기가 끊겼을 거다. 준성이 알기로, 예비전력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7층에만 활용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7층이 최고층이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이미 좀비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했고, 5층부터는 시설 모두가 건재하다. 사람들은 예비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아끼고자, 모두 7층에 집결해 있었다.
“일단 올라가죠. 7층까지만 가면 돼요.”
“7층요?!”
“제가 알기로 4층까지는 좀비 천국이고 5층과 6층은 아예 사용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7층이죠.”
“으…, 엘리베이터는……. 아, 전기가 나갔다고 했죠….”
남자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암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만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준성 역시 이 근육통 가득한 다리로 올라가야 했기에 암담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하로 3층, 지상으로 7층, 총 10층이나 되는 계단이다. 그걸 계산하고도 태연할 수 있는 건 세 사람 중에서 체력 좋은 도한서 뿐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준성은 한서가 대신 메주고 있는 백팩에서 손전등을 꺼내어 앞을 비추었다. 그들은 곧 계단을 차례차례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