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26)화 (26/240)

- 026회 -


-2일째

깊이 잠들었다가 눈을 뜬 준성은 온몸이 내지르는 비명에 숨을 삼켜야 했다.

“으으….”

어깨, 팔, 손, 다리, 발바닥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현실에서도 운동 좀 해둘걸.’

준성은 전신을 지배하는 근육통을 원망하기보다는 그간 자신이 꿈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걸 핑계로 운동을 게을리 한 본인을 욕했다.

‘근데 정말 꿈을 안 꾸네.’

혹시나 했다.

현실에서 이런 일을 겪는 동안에도 또 그 재시작하는 꿈을 꾸진 않을까 생각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의도적으로 시간을 조절해서 도한서와 만나는 걸 노려볼 생각이었다. 그와 어느 루트를 가야 그를 안전히 백신 연구하는 곳에 보낼 수 있는지 테스트해볼 기회였는데 아깝게 되었다.

그래도 꿈을 안 꾼 덕분인지 오랜만에 잠을 푹 잔 기분이었다. 삭신이 아픈 건 그렇다 쳐도 머릿속이 맑고 상쾌했다.

준성은 간단히 샤워부터 하고 오늘 해야 할 일정을 머릿속으로라도 정리해보기로 했다.

대피소에 동생과 그녀의 친구들을 놔두고 나온 데다가 터널에 좀비 떼까지 퍼져버렸다. 그들 대부분이 개안역의 차량기지 터널에 모여서 머물고 있을 테지만, 행동반경을 넓혀서 배회할 수도 있고 다른 변수가 생겨서 좀비가 곳곳에서 날뛸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좀비들을 대피소에서 한참 떨어뜨려 놨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동생과 그 친구들이 있는 대피소는 쭉 안전할 것이다.

‘그 아저씨가 애들을 잘 데려와 줘야 할 텐데.’

자신이 지나온 길들은 분명 꿈과 어긋난 부분들이 있었지만, 외부의 상황은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을 거다. 그러니 6일 뒤에 외부에서부터 출발해 터널의 대피소에 도착할 대머리 아저씨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꿈에서와 똑같이 병원으로 가줄 것이다.

그래도 솔직히 아쉬운 건 사실이다.

‘오늘 예정대로 도착했으면 채이와 애들 정도는 바로 구조헬기에 탈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인한 적십자병원에 첫 번째 구조헬기가 도착하는 날이었다. 준성은 원래 그 헬기에 세 사람을 태워 보낼 생각이었다. 마침 자리도 딱 세 개가 비게 될 거였고.

‘어쩔 수 없지. 차라리 오늘 작정하고 도한서를 헬기에…….’

“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작은 신음이 들렸다. 준성은 깜짝 놀란 눈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 침대에 올라온 건지, 바로 옆자리에 도한서가 누워 있었다. 그것도 알몸으로.

‘이 자식, 뭐지…?’

분명 덩치에 맞게 침대를 쓰자고 하고서 큰 방을 내줬는데 왜 거기서 안 자고 제 옆에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

그 탓에 준성은 한쪽에는 벽, 다른 한쪽에는 도한서를 두고 끼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침대가 원래 1인용인 탓도 있었다.

“도한서.”

나직이 이름을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건 으음, 하는 신음뿐이었다. 편안한 얼굴로 잘 자고 있어서 더 깨워보기도 미안했기에 그냥 자신이 침대를 내려가기로 했다.

이불을 걷어내며 상체를 일으켜 앉으려 했다. 갑자기 한서의 팔이 훅 날아와서는 준성의 가슴팍을 휘감아 눕혀버렸다.

“윽!”

매트가 출렁이는 충격에 어깨와 팔이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리자, 반쯤 풀린 한서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가지 마….”

평소보다 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잠기면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하지만 그건 그거고, 침대는 침대였다.

“뭐 하는 거야?”

“음…, 자고 있는데……?”

“좁으니까 내 침대에서 나가.”

준성을 보며 작게 미소 지은 한서가 그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준성은 옆으로 누운 채 의도치 않게 백허그를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쪼잔하기는.”

옷을 입은 채로 안고 있어도 이상한데 한 명은 샤워 가운 차림에 한 명은 알몸이니, 준성으로서는 기겁할 정도로 민망한 상황이었다.

“쪼잔 운운하기 전에 네 침대 멀쩡히 있잖아. 거기서 자라고. 옷도 좀 입고.”

“흐음….”

귓가에 한서의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숨결까지 같이 귀를 간질이니 어깨가 멋대로 흠칫했다.

“알몸으로 자려니까 춥더라고.”

“옷을 입어.”

“더러운 건 입고 자기 싫은걸.”

“어린애야?”

준성의 귓가에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한 낮고 다정한 속삭임이 들렸다.

“내가 네 백신이잖아. 그러니까 좀 예뻐해 주면 안 돼? 혼내지만 말고.”

그 말과 함께 이젠 아예 두 팔로 꽉 묶듯이 끌어안았다.

준성이 뒤늦게 한서를 밀어내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완전히 결박되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음을 깨달은 준성이 한숨과 함께 몸에서 힘을 쭉 뺐다.

“그래, 그래. 예쁘다.”

“영혼 어디 갔는데.”

“와아, 예쁘네. 우리 한서 예뻐.”

준성의 무미건조한 칭찬에 잠이 깬 건지, 한서가 그의 귓가에서 목으로 웃었다. 준성 역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래 사귄 친구 같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사이라서 그런가.

준성은 처음에 만났을 때와 달리 완전히 부드러워진 자신의 벽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과 같은 편안함이 참 좋다고 느꼈다.

“…근데 다리 사이에 생수통 끼워놨어?”

“건강해서 그래. 그리고 그거보다는 클걸.”

“네가 사람이냐?”

* * *

병원으로 향할 채비를 마친 준성과 한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모텔의 로비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준성은 혹시나 모텔 어딘가에서 좀비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한서는 아침에 새로 갈아준 준성의 붕대를 눈으로 확인하며 그가 긴장을 풀만 한 말을 했다.

“모텔의 좀비들이라면 어제 내가 다 정리했어.”

“정리?”

“너 자는 동안 층마다 다 돌면서 잡아 죽였지. 아침에 알몸으로 자고 있던 것도 좀비들 처리하느라 샤워 가운에 피가 잔뜩 묻어서 그랬어.”

상큼하게 말하고 있는데 어째 느낌이 섬뜩했다.

스위트룸 어딘가에서 진한 피 냄새가 나기에 자신들의 옷에서 나는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범인은 도한서였던 모양이다.

“사람은 없었어? 이런 모텔이라면 방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있을 법도 한데.”

안 그래도 어제 카운터에서 카드키가 여럿 있는 걸 보았는데, 분명 없는 키도 좀 있었다. 아마도 그 키를 갖고 있는 건 모텔의 투숙객들이지 않을까.

한서의 대답을 기다리며 엘리베이터 옆부분의 거울을 힐끗 보았다. 거울에 비친 한서의 얼굴엔 분명 미소가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냉기에 베일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없었어, 아무도.”

“아, 응.”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는 찰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준성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돌변해서 한서를 마주 보았다.

“도한서. 너 앞으로 어디 갈 때 나한테 말하고 가던가 아니면 같이 가. 절대 혼자서 다닐 생각도 말고.”

“갑자기 뭐야?”

엄마라도 된 듯한 신신당부에 한서가 피식 웃더니 ‘아하’하고 운을 떼며 말했다.

“내가 백신이라서 그러는구나? 내가 멀쩡히 살아있어야 이 좀비들을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맞지?”

자조하듯 웃는 한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준성이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툭 때렸다.

“물론 그런 의미로도 네가 잘 살아남아야겠지만, 난 순수히 내 친구를 걱정하는 거야.”

한서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준성을 마주 보았다.

“네가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좀비들 앞에서는 네가 가장 안전하겠지만…….”

준성이 머릿속에 떠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서울 때도 있거든.”

꿈속에서 만난 사람 중에는 좋은 사람도 분명 많았지만, 그 수만큼 악독하고 이기적인 자들도 많았다. 준성은 그들이 좀비보다 더 무서운 자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모텔 밖으로 향하는 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서는 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일부러 웃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텔 밖으로 나온 준성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근처 어딘가에서 좀비의 괴성이 들리곤 있었지만, 이 모텔은 은밀함을 보장해주기 위해서인지 담벼락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주차장 커튼 역시 다리쯤만 노출될 정도로 커튼이 길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좀비가 있다 해도 이쪽이 시야에 담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나랑 안고 다니면 되잖아.”

뒤에 다가온 한서가 민망한 소리를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곳에서 병원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걸어서 갈 걸 생각하면 어제처럼 서로 딱 붙은 불편한 자세로 계속 이동할 순 없다.

“그럼 차를 타는 건 어때?”

“차?”

어제 보니 확실히 거리가 뻥 뚫려 있긴 했다. 병원 앞까지 가는 건 어려워도 중간까지는 어떻게든 타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차 소리를 들은 좀비들이 앞다투어 달려들겠지만.

“나 운전 못해.”

“내가 할 줄 알아.”

“타고 싶어도 차가 없잖아.”

“있어.”

한서가 주차장에 세워진 검은 차를 가리켰다. 준비가 철저한 그는 어디서 챙긴 건지 모를 차 키 하나를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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