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3회 -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한서는 준성의 꿈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그를 비웃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말해주는 족족 다 믿어주며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덕분에 전부 털어놓은 준성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준성은 붕대에 감긴 오른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폈다 하면서 대답해주었다.
“아까 그 일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긴 했지만, 앞일을 모른다는 것뿐이지 해야 할 건 똑같아.”
“인한병원으로 가는 거지?”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한서가 그의 멀쩡한 왼손을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준성 대신 손전등을 들어 앞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잠부터 자자.”
갈 길도 멀고 어느덧 저녁을 넘어 밤이 되었기에 그의 말이 타당하긴 하나, 문제는 그들이 서 있는 이곳이 지하철 터널이라는 것이다. 준성이 기억하기로, 철호가 있던 대피소 외에는 전부 문이 잠겼거나 잠깐도 쉬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냥 선로 위에서 잘까?”
진지한 얼굴로 바닥의 레일을 바라보던 준성을 한서가 잡아끌었다.
“경보음 끊긴 지 좀 됐잖아. 배회하다가 여기까지 올지도 몰라. 거리도 멀지 않고.”
한서의 말대로 좀비들을 몰아넣은 차량기지는 분명 다른 터널이긴 하지만 거기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이쪽과 연결된 길을 갈 수 있다. 역시나 무방비하게 터널에서 밤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
“그리고 잘 거면 침대에서 자야지.”
“침대?”
한서가 저 멀리, 좀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스크린도어를 가리켰다. 그곳은 개안역의 다음 역 플랫폼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제정신이야?”
준성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많은 좀비가 안 보여? 문 열자마자 뜯어먹혀 죽을걸.”
스크린도어를 여는 시도 따윈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준성에게 한서가 눈가를 휘며 웃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그럼 안 죽어.”
“넌 좀비가 물지도 않는 면역자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도 수많은 좀비가 괴성을 지르며 유리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정확히는 준성을 향해서.
한서는 준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을 꽉 잡고서 스크린도어까지 걸었다.
“야…. 이건 아니야….”
준성이 고개를 내저으며 자꾸만 몸을 뒤로 물렸다. 이젠 한서가 설마 자신을 죽게 할 생각인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걱정 말라니까.”
한서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도망치려 하는 준성의 양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었다. 발버둥 친 게 무색할 정도로 가뿐히 올려진 준성은 어느새 스크린도어 앞 발판에 두 발을 딛고 있었다.
캬악! 카학!
크하악-!
쾅쾅쾅쾅쾅!
피범벅이 된 좀비들이 눈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깨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리를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준성의 뇌를 직접 붙잡고 흔들어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어있지 않아도 돼.”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발판에 올라서서 준성의 옆에 바짝 붙은 한서는 안 되겠다며 뒤돌아서서 내려가려는 그를 확 잡아당겼다. 준성을 품에 끌어안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한서가 비상문의 미는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
한서를 급히 멈추려던 준성은 순간 이상함을 깨달았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유리를 마구 두드리고 괴성을 질러대던 좀비들이 하나같이 조용해졌다. 차량기지 쪽 통로에서 만난 좀비가 그랬던 것처럼 저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옅은 신음 정도만 흘릴 뿐, 여태껏 보였던 과격한 반응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봐.”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한서는 준성이 넋을 놓은 틈을 타서 문을 열었다.
스크린도어의 비상문이 밀리고, 그쪽 유리에 붙어 있던 좀비들이 와이퍼에 떠밀린 빗물처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들은 먹잇감인 준성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스크린도어 안쪽에서 완전히 나와 문을 닫았다. 탁, 하고 닫히는 소리에 일제히 이쪽을 보긴 했지만 달려드는 좀비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제자리에서 비틀거리거나 느릿하게 배회하는 중이다.
한서와 끌어안은 상태를 유지 중인 준성이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너랑 안고 있으면 그 사람도 안전해지는 건가?”
“내가 무슨 투명망토쯤 되나 봐.”
신기한 것도 잠시.
준성은 자칫 좀비들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자리에 거의 멈춰버린 좀비들 사이사이를 신중히 이동하고 있었다. 한서를 마주 안은 채 옆걸음으로 말이다.
우스꽝스러운 게걸음 같기도 하고 왈츠 초보자의 신중한 스탭 같기도 했다.
상당히 느린 이동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서는 갑자기 몸을 훅 숙였다. 그러더니 준성의 무릎 뒤에 팔을 넣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당황한 준성이 한서의 어깨를 짚으며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보는 사람이라고는 넋 나간 좀비들뿐인데.
“뭐야?”
“빨리 자고 싶어서 속도 좀 내려고.”
민망함에 당장 내려놓으라고 말한 준성은 그를 두 팔로 밀어내며 몸을 멀리 떼려 했다.
캭!
지척에서 들린 짧은 괴성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있던 키 작은 좀비 하나가 준성을 보며 연신 머리를 흔들며 캭캭거렸다. 당장 달려들 것처럼 무섭게 굴지는 않았지만, 그를 포함한 주변의 좀비들이 하나둘 준성을 바라보았다.
준성이 슬그머니 팔을 풀고 얌전히 안겨 있자,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처럼 보이던 키 작은 좀비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선 비틀거리며 다른 쪽으로 이동해갔다. 주변의 좀비들 역시 다른 먹잇감을 찾는 것처럼 준성에게서 시선을 뗐다.
준성은 민망한 자세로 한서에게 안아 들렸다는 것도 잊고서 좀비들의 반응을 눈에 새겼다.
‘완전히 밀착해야만 효과가 있구나.’
반응으로 봐선 하체보다도 상체를 밀착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심장 혹은 머리를 중심으로 구분하는 걸지도.
준성이 생각에 빠진 사이, 한서는 그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잘도 걸어나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하철을 나서는 계단에는 좀비가 보이지 않았다. 준성은 이때다 싶어서 얼른 그에게서 내려섰다.
준성은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오르며 주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당장 이 계단에서 좀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더 밖으로 나가면 분명 좀비들이 바글바글할 테니 조심해야 했다.
깜깜해진 바깥으로 거의 다 나왔을 때쯤.
캬아아악-!
지하철 입구 옆길에서 준성을 발견한 좀비가 괴성과 함께 미친 듯 뛰어왔다. 그 소리를 들은 주변의 다른 좀비들도 피 칠갑한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달려왔다.
준성은 침착하게 한서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끌어 안아보았다.
그러자 좀비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주춤하던 그들은 준성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점차 시선을 돌렸고, 지하철 플랫폼의 좀비들이 그랬듯 정처 없이 배회했다.
준성은 그런 좀비들의 반응을 두 눈에 새겼다.
‘도한서의 뭐가 영향을 미치는 걸까? 숨? 체온? 체취?’
꿈속에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별의별 걸 다 분석해왔던 탓인지 지금도 그 기질이 나와버렸다.
준성은 좀비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서에게서 떨어졌다. 귀신같이 알아챈 좀비들이 준성을 노려보았다.
준성은 좀비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어깨동무를 하며 밀착할 생각이었는데, 한서의 키가 커서 어깨도 상대적으로 높은지라 밀착할 자세가 잘 나오질 않았다.
달려오기 시작하는 좀비들을 보며 자세를 고쳐 잡아보려는데, 허리에 한서의 팔이 감기고 약간 떨어져 있던 옆구리가 완전히 맞닿았다. 그러자 달려오던 좀비들이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뭐 해?”
한서의 웃음기 담긴 목소리에 무심하게 대답했다.
“분석. 어떻게 하면 그나마 덜 민망하게 이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하.”
작게 소리 내어 웃은 한서가 준성의 허리를 팔로 단단히 감은 채 걸어나갔다.
‘이 정도 밀착만 되어도 좀비들이 알아서 외면해주는구나.’
정말 편리하고 완벽한 백신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라면 도한서를 가운데 두고 네 사람이 앞뒤 좌우로 밀착해서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면 좀비 무리 한복판에 있더라도 모두 무사할 수 있지 않을까.
채이가 준성의 생각을 들었다면 좋은 머리를 이상한 데에 쓰지 말라며 핀잔을 퍼부었을 거다.
지하철을 나온 준성은 역시나 황폐화된 길가와 도로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쪽 도로는 추돌사고가 나거나 차를 버리고 가는 바람에 도로가 막히진 않았는지 먼 곳까지 뻥 뚫려 있었다. 문제는 차가 없는 대신 도로 여기저기를 좀비들이 배회하는 중이다.
준성이 주변 거리와 도로의 상태를 눈으로 훑는 동안, 한서는 다른 걸 찾고 있었다.
“저기 있네.”
한서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준성은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러브미 MOTEL]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들어간 고층 모텔 간판이 눈을 어지럽혔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니 빨간색과 파란색이 번갈아 들어간 주차장 커튼이 보였다. 간판만큼이나 눈을 어지럽히는 쓸데없는 만국기 장식도 있다.
좀비가 가득한 거리와는 정말 안 어울리는 모텔이었다.
“들어가자.”
민망함 따윈 전혀 모르는 얼굴의 한서가 준성의 허리를 잡아끌며 모텔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