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22)화 (22/240)

- 022회 -

“좀비들이 물려고 하질 않으니까 면역자인지는 모르겠어.”

한서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백신’에 가깝지 않을까?”

건조하게 대꾸하는 한서를 보며 준성은 순간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꿈속에서 좀비 사태의 해결로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역시나 면역자의 존재였다. 좀비 드라마나 영화에선 거의 필수로 등장하기 때문에 좀비물 좀 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든 생각했을 거다.

좀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준성 역시 몇 회차에 걸쳐 면역자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인한시에서 면역자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전역을 뒤져서 찾으려 해도 바이러스를 완전히 분석하고 그 자료를 토대로 사람들을 검사할 긴 시간이 필요했다. 심지어 전 세계를 뒤졌는데도 면역자가 없을 수도 있다.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귀한 면역자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는 바이러스를 없애거나 억누르는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랬는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면역자를 만났다.

아니, 한서의 말대로 그는 면역자라기보다는 이미 완성된 백신이다.

좀비들에게 심어진 바이러스가 그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니까.

단순한 면역자라면 좀비들에게 물려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좀비에게 먹이로 인식되어 공격당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즉, 면역자의 항체를 기반으로 백신을 만들면 좀비에게 물려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얘기일 뿐, 좀비들에게 물리적인 공격을 받는 건 다르지 않다.

반면 한서는 다르다.

완벽한 백신 그 자체.

바이러스가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만약 한서가 가진 특별한 무언가를 연구해서 사람들 모두가 완전한 백신을 맞게 된다면 더 이상 좀비들에게 물릴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감히 이빨도 드러내지 못하게 된 좀비들은 먹이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배회하다가 점차 썩어서 사라져버릴 거다.

수없이 반복된 꿈에서조차 찾지 못했던 완벽한 백신을 이렇게 현실에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인한시에 있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동생의 대학 선배라니. 천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좀비 사태는 도한서 덕분에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종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서는 준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한발 다가섰다.

“그럼 내가 백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얘기가 쉽겠네.”

“뭘?”

준성은 한서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차가운 터널 벽에 딱 붙었다.

밀어낼 새도 없이 한서가 완전히 밀착해 섰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까와 같은 자세를 만들고 있었다.

“아까 봤지? 좀비가 날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너도 같이 피해버리는 거.”

입꼬리를 끌어 올린 한서가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이제 아까처럼 좀비가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겠어?”

한서가 기대하는 답은 자신이 제시했던 ‘살기 위해 뭐든 써먹어야 한다’였다. 그 안에는 자신이든, 다른 인간이든, 모든 걸 포함한다.

애석하게도 준성은 그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똑같이 할 거야.”

“이젠 내가 백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것도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 하지만…….”

준성이 과하게 밀착한 한서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밀어내었다.

“네가 백신이든 아니든, 좀비한테 공격을 당하는 놈이든 아니든, 널 방패막이하느니 그냥 내가 물리고 말겠어.”

한서는 준성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려는 거 아니었어? 그건 죽는 길인데.”

“최소한 난 친구 목숨을 방패 삼아 살고 싶을 만큼 쓰레기는 아니야.”

준성의 눈은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단호한 눈을 마주하던 한서는 그가 자신을 ‘친구’라고 지칭한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한서를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난 준성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죽는 길이라고 누가 그래?”

준성은 자신이 꿨던 마지막 꿈을 떠올려보았다.

“물려서 감염되었더라도 좀비가 되기 이전이라면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건…….”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방법을 찾아낸 건 꿈을 통한 여러 번의 재시작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준성이 머뭇거리는 걸 본 한서가 재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그건 준성이 줄곧 착용하고 있던 시계였다.

이때껏 시계가 없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준성은 자신의 휑한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서가 텐트에서 시계를 벗긴 직후에 좀비에게 물린 남자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한서가 빙글거리며 시계를 흔들었다.

“네가 시계를 자꾸 보는 이유, 내가 말해볼까?”

“…그냥 습관이야. 초조할수록 시계를 자주 보는 습관이 있어.”

“그럼 방금은 왜 시계가 없는 줄도 몰랐어? 좀비 떼가 그렇게 몰려오는데.”

“…….”

할 말이 없었다.

좀비들을 유인한 이번 일, 더 나아가 인한역의 스크린도어가 깨진 것은 여태까지의 꿈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예견된 일이었다면 시간을 체크해서 몇 시 몇 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을 더듬고 그에 맞춰 대처를 하든 방법을 이용하든 했겠지만, 이번 사건은 애초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겪은 적이 없는데 시간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준성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서가 준성의 왼손을 받쳐 들었다.

“네가 시계를 자주 보는 이유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고 있어서잖아.”

준성은 감정을 누르며 얼굴에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네가 ‘미래를 아는 것처럼’ 시간을 딱딱 맞춰서 움직여준 덕분에 저 둔한 애들조차 다친 곳 하나 없이 다 살아있어. 안 그래?”

준성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며 직접 시계를 채워주던 한서가 눈을 올려 떠서 준성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오는지,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 어디로 가면 누굴 만날 수 있는지, 전부 다 알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

시계를 채워준 한서가 현재 시각이 표기되는 자리의 유리 부분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너도 몰랐어. 미래 예지 같은 게 안 통하는 새로운 사건이었던 거지. 그래서 시계를 볼 필요도 없었고.”

준성은 이걸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무작정 부정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방법도 있지만, 한서는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빠져나가기 어렵게 증거를 차곡차곡 들이밀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앞날을 내다보는 네 능력은 분과 초 단위까지 예측할 정도로 정확하지만, 몇 가지 큰 구멍이 있어. 예를 들면 나에 대한 거라든지.”

한서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건 겪어보기도 전에 초 단위까지 다 알면서 정작 중요한 백신이 나라는 것도 이제 알았잖아.”

준성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실수했어.’

한서가 예리한 것도 있지만, 자신이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아까 ‘좀비가 되기 이전이라면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라는 구체적인 말까지 해버렸다. 그만한 발언은 어지간히 확신이 있지 않은 이상은 누구도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눈치를 보아하니 한서는 그러려니 하고 물러나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백신’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주었으니 너도 그에 상응하는 걸 내놓으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준성은 자신이 꿈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았던 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었는지 되새겨보았다. 농담하지 말라며 비웃던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로 믿어주었던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마저도 능력에 대해 털어놓았던 결과들이 전부 좋지 않았기에 말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한서는 변수 중의 변수.

자신의 능력이……, 꿈이 미처 건드리지 못한 사람. 그리고 백신.

그런 사람에게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좀비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팔 필요도 없지 않나.

고민하던 준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윽!”

“조금만 참아 봐.”

“소독약을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아!”

준성은 오른손의 어마어마한 통증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비명도 지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아팠다. 거짓말이 아니라, 물렸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아파 죽을 것 같다.

한서는 준성이 아파함에도 그의 오른손을 단단히 붙잡고서 과산화수소 한 통을 죄다 들이 부어버렸다. 몸을 웅크린 채 이를 꽉 깨문 준성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한서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글쎄.”

누가 봐도 가식인 미소를 지어 보인 한서가 백팩에서 꺼낸 항생제 연고를 얇게 펴 발라주고 그 위에 거즈를 덧댄 후 붕대까지 감아주었다.

소독의 엄청난 고통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준성은 눈 깜짝할 새에 말끔해진 오른손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간단한 처치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운동하다 보면 이래저래 잘 다치니까.”

쓰고 남은 의약품을 준성의 백팩에 돌려 넣은 한서가 그걸 제 등에 메었다. 묵직하게 준비해온 비상식량 대부분을 대피소에 주고 왔다지만 그래도 아직 무게가 좀 나갔다.

“그걸 왜 네가 메?”

“손 다 나을 때까진 내가 메고 다닐게.”

준성은 솔직히 한서의 배려가 싫지 않았다. 어느덧 준성에게 있어 한서의 이미지는 꿈속의 살인마를 빗댄 게 미안할 정도로 좋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