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1회 -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던 준성은 곧 남은 거리가 적힌 유도등을 발견하게 되었다.
개안역까지 남은 거리는 105m.
조금만 더 힘을 내면 개안역에 도착할 거고, 그 상태에서 플랫폼이 보이는 구간을 지나면 차량기지로 빠질 수 있는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준성은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캭, 크엑!
카아악-!
그어! 큭, 커허-!
점점 가까워지는 수많은 괴성과 발소리가 준성의 바쁜 심장을 더욱 압박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개안역 플랫폼이 비치는 스크린도어를 만날 수 있었다. 역시나 개안역도 플랫폼을 배회하는 좀비의 수가 상당했다. 그들은 스크린도어 너머의 준성과 한서를 보며 너도나도 유리에 달라붙었다.
피가 말라붙어 있던 스크린도어에 새로운 붉은 손자국이 덕지덕지 새겨졌다. 준성은 꿈속과 똑같이 개안역의 스크린도어가 깨지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인한역의 유리가 파손되어 좀비가 넘어온 걸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났다.
한서와 함께 지체하지 않고 스크린도어가 있는 길을 지나, 다시금 어두운 터널을 달렸다.
내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탓에 준성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즈음.
숨이 약간 거칠어진 정도에 불과하던 한서가 준성의 백팩을 벗겨서는 자신이 메었다.
“힘들면 업어줄까?”
준성은 숨이 찬 나머지 말로 하는 대신 얼굴을 와락 찌푸려주었다. 한서는 그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좀비 무리에게 쫓기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태평함이었다.
긴장감이 없어도 너무 없지만, 한서가 백팩을 가져가 준 덕분에 그나마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준성은 한서의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함과 별개로 그의 배려에 순수히 감사했다.
드디어 어두운 터널 끝이 좌우로 갈라졌다.
“왼쪽으로!”
준성은 꿈속에서 병원을 향해 걸었던 터널과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 선로를 밟으며 일순 삐끗했는데, 한서가 팔을 붙잡아서 지탱해준 덕택에 그대로 달릴 수 있었다.
우르르 몰려오던 좀비들의 기세가 한층 거세졌다.
두 사람과 좀비의 거리는 고작해야 5m 남짓.
이대로 계속 달리다가는 좀비와의 거리가 점점 더 줄어들 게 뻔했다.
준성은 좀비들의 시야 범위가 3m 내외라는 걸 상기하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꿈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다리 근육의 삐걱거리는 통증을 꾹 참아냈다.
좀비들과의 거리가 4m 언저리가 되었을 때.
‘비상통로’라 적힌 유도등이 있는 벽면을 발견했다. 터널의 불이 꺼져 있었기에 벽면 옆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의 손전등이 비추던 빛 덕분이었다.
“이제 손전등 꺼!”
비상통로의 위치를 확인한 준성이 손전등의 전원을 껐다. 터널의 거의 유일한 빛이었던 두 손전등의 빛이 사라지자 사방은 깜깜한 암흑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비상통로의 유도등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준성은 좀비에게 물렸던 남자가 팔 한 번 물리고 도망쳐올 수 있었던 건 터널의 어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붉은 피막으로 인해 좀비들의 시야 범위가 3m 내외인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빛이 있는 걸 기준으로 한다. 어둠 속에서는 바로 앞에 사람이 있어도 피 냄새가 나거나 소리를 내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준성은 좀비들의 시야 범위에 닿기 직전에 손전등을 껐다. 시야 범위를 넘어 그보다 더 가까워졌을 때는 사방이 이미 어둠뿐이라, 좀비들이 의지할 건 오직 소리뿐이었다.
준성은 비상통로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 맞춰 손에 들고 있던 경보기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고선 한서와 함께 통로 방향으로 발을 돌려 쏙 들어갔다.
세 걸음쯤 되는 거리에 두 터널을 잇는 출입문이 보였다. 하지만 철문이라, 혹시나 소리가 날까 봐 문 옆의 벽에 기대어 숨을 죽였다.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기를 따라 좀비들이 저마다 괴성을 지르며 우르르 쫓아 달려갔다. 통로에 숨어, 어둠에 익기 시작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준성의 손이 잘게 떨렸다.
좀비 무리가 통로를 지나 터널 안쪽으로 몰려간 후.
준성이 그제야 안도하듯 숨을 내쉴 때였다.
카악!
가장 뒤에서 홀로 달리던 좀비 하나가 준성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를 냈다. 준성은 뒤늦게 자신의 오른손을 감쌌다.
‘피!’
아까 남자에게 심하게 물린 자리에선 지금도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큰일이다!’
피 냄새를 제대로 맡은 좀비는 준성을 최우선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좀비가 통로로 들어오는 걸 본 준성이 대뜸 한서의 앞을 막아섰다.
‘표적은 나니까 나만……!’
한서까지 위험하게 만들 순 없었다. 어차피 좀비는 눈도 보이지 않는데 피 냄새를 쫓는 것뿐이니, 물어뜯기더라도 자신이 그를 막으면 한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한서야, 문 열고 들어가!”
그렇게 외치며 오히려 좀비에게 스스로 달려들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몸이 휙 당겨졌다. 예기치 못하게 뒤로 당겨진 준성은 문 옆의 벽에 등을 대게끔 밀쳐졌고, 그를 가두듯 얼굴 좌우 벽면에 두 손이 대어졌다.
준성이 놀라서 말을 할 새도 없이 한서의 복부가 밀착했다. 그의 허벅지가 준성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준성은 황당할 정도로 묘한 자세보다도 자신이 한서에게 겹쳐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좀비가 둘 다 공격할 수도 있다.
“뭐 하는 거야?!”
“쉿.”
준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서는 자신의 팔 안에 가둬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그의 시선을 받는 준성은 바짝 긴장한 눈으로 좀비를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준성에게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기세를 보이던 좀비가 바로 지척에서 멈춰버렸다.
우….
갑자기 얌전해진 좀비는 마치 먹잇감이 아무도 없는 공터에 홀로 서 있는 것마냥 힘없이 신음했다. 그러다가 이번엔 경보음에 집중했는지, 터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기괴하게 몸을 꺾은 좀비가 다른 동족들처럼 경보기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마지막 좀비까지 경보기 쪽으로 이동한 걸 본 준성은 뒤늦게 자신이 숨도 쉬지 않고 얼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깊은숨을 내쉬며 안도하던 준성은 그제야 한서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두워서 서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준성을 가둬둔 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한서가 느릿하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선 준성의 다치지 않은 왼손을 붙잡고서 통로의 문을 열어 들어갔다.
철문은 단순히 두 터널을 오갈 수 있는 통로의 중간에 설치된 칸막이 개념이었다.
다음 역으로 갈 수 있는 터널로 옮겨온 준성은 조금 전의 달리기와 긴장의 여파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도한서.”
한서의 이름을 부르자, 여전히 손을 꼭 잡고 있던 그가 준성을 돌아보았다.
준성은 얼얼한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손전등을 켰다. 손전등의 빛은 바닥을 향했지만, 빛이 생긴 덕분에 한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한서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아무 표정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먼저 할 말을 시작한 건 도한서였다.
“살려고 이 짓거리 한다면서 왜 죽을 짓을 했어?”
한서의 목소리가 너무도 싸늘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까지 냈던 도한서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날이 서 있다.
준성은 한서에게 자신의 다친 오른손을 가리켰다.
“내 피 냄새 때문이었어. 타겟이 나니까 나 혼자 물리는 게 맞아.”
“그래서 날 보호하려고 했다고?”
한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중이면 뭐든 써먹었어야지.”
“널 방패막이했어야 한단 소리야?”
“당연한 거 아냐?”
한서의 말에 준성이 기가 찬 헛웃음을 보였다. 농담이라고 해도 어이가 없는데 표정이 진지한 걸 봐선 진담이었다.
준성은 한서의 예측 불가한 뇌 구조에 진심으로 의구심을 품었다.
한서를 말없이 노려보던 준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혹시 좀비들이 널 피하기 때문인가?”
준성은 조금 전에 봤던 좀비의 이상한 행동. 스크린도어를 넘어올 때 좀비들이 한서를 제대로 공격하지 않았던 것. 일직선 대형으로 이동할 때 가장 마지막에 선 한서를 지나 소연을 공격하던 좀비들. 그리고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조교실에 나타난 도한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되짚어보던 준성은 결국 한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너…, 면역자지?”
준성은 자신이 찾아냈던 해결책과 별개로 모든 좀비물 해결의 열쇠인 ‘면역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한서는 확신을 담아 말하는 준성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