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6회 -
준성은 카드를 찍는 기계의 좌우를 손으로 짚어, 허벅지 높이의 바를 훌쩍 뛰어넘었다. 뒤이어 일행들도 지체되는 일 없이 속속 뛰어넘었다. 준성을 제외한 다른 이들 모두 몸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체육학도들이다 보니 이 정도는 아주 거뜬했다.
반면 좀비들은 개찰구의 바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위로 몇 겹의 좀비가 넘어져 쌓이고, 그러다 몇 명이 바를 지나 달려왔다. 넘어져서 바닥에 얼굴 일부가 깨지거나 다른 좀비들에게 밟혀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오로지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고기만을 원하는 그들에게 신체의 훼손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앞을 가로막는 좀비가 없다. 대신 소리를 듣고 몰려든 모든 좀비가 거대한 꼬리를 만들 듯이 뒤로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크악!
캭, 캬학!
흐어어-!
전력을 다해 달리는 준성 일행의 뒤로 듣기 싫은 괴성이 점점 늘어났다. 스크린도어가 있는 플랫폼에 다다를 때쯤엔 깔려서 밟히는 좀비들까지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였다.
“여기서 어디로 가면 돼요?! 아무 문이나 열어요?!”
지우가 다급히 외치며 준성보다 앞서서 스크린도어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스크린도어의 손잡이는 플랫폼 방향이 아니라 전철이 지나다니는 선로 방향에 있었다. 즉, 그들이 있는 위치에서는 수동으로 스크린도어를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지우의 얼굴이 암담해졌다.
“이, 이게 뭐야! 안 열리잖아! 안 열린다고!”
패닉에 빠진 지우가 크게 소리치며 스패너를 내던졌다.
당황한 건 지우뿐만이 아니었다. 채이와 소연도 설마 비상문이 선로 쪽에서만 열리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때, 준성은 시계를 보며 스크린도어의 옆을 따라 달렸다.
“따라와! 빨리!”
준성이 외치자, 채이와 소연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뒤늦게 지우가 달려가는데, 바닥에 내던졌던 스패너가 그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병신 짓 좀 적당히 해.”
뒤따라오는 좀비들까지 잠깐 잊을 정도로 차디찬 음성이었다. 지우는 웃음기 없는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한서를 보며 숨을 멈췄다.
‘비상문’이라는 안쪽 손잡이가 달린 스크린도어의 앞에 다다른 준성은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가쁜 숨을 내쉬는 채이와 소연이 뒤이어 멈춰 서고, 지우와 한서 역시 도착했다.
캬아악!
하악-!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 무리가 지칠 줄 모르고 달려왔다.
“이제 어떡할 거예요?! 예?!”
지우가 또다시 소리쳤다.
플랫폼의 가장 끝, 그리고 스크린도어에 기댄 막다른 구석.
이대로 몇 초만 지나면 좀비들에게 모두 물어뜯기게 될 판이었다.
“으아아아!”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 지우가 스패너로 비상문이 옆의 스크린도어를 마구 내리쳤다. 다행히 강화유리라서 박살이 나진 않았지만 유리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고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작은 파편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좀비들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 오빠…. 어, 어쩌지?”
울음을 터뜨리는 소연을 끌어안아 준 채이가 바들바들 떨며 준성의 소매를 잡았다. 그때마저도 준성은 손목시계를 노려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채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준성의 팔을 마구 흔들 때였다.
탁-
그들이 서 있던 바로 옆 스크린도어에서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문이 열리고, 선로가 있는 방향에서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빨리 이쪽으로 와요!”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준성 일행과 몰려오는 좀비 떼를 번갈아 보며 급히 외쳤다.
“들어가! 빨리!”
준성은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남자에게 속으로 감사해 하며 일행들을 먼저 밀어 넣었다. 채이와 소연, 지우가 들어가고 뒤이어 한서를 밀어 넣으려는데, 그가 강한 힘으로 준성을 먼저 스크린도어 너머로 보냈다.
‘안 돼!’
꿈속에서 준성은 언제나 일행을 먼저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본인이 들어갔었다. 물려도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동생과 그 친구들을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 게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자마자 간발의 차로 좀비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었다. 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스크린도어에 가득히 몰려서는 피 묻은 손으로 유리를 마구 두드려대는 게 굉장한 공포를 유발했다.
그때도 간발의 차였는데 이번엔 한 사람이 더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마지막에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100% 물릴 수밖에 없다.
습관대로 한서를 밀어 넣고 자신이 마지막을 선택했다면 재시작 따윈 없는 완전한 게임 오버였을 거다.
지금은 그 게임 오버의 대상이 도한서가 되었다.
아니, 된 줄 알았다.
도한서의 뒤에 가득히 몰려든 좀비들이 일순 멈칫한 것처럼 보였다. 눈을 깜빡인 것 정도의 찰나라서 순간 잘못 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도한서가 재빨리 스크린도어 안으로 들어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인간 냄새를 맡고 틈새로 손을 뻗었던 좀비의 손가락 한 개가 거세게 닫힌 스크린도어에 끼어 투둑, 하고 떨어졌다.
크아아아아-!
칵, 카학, 캭-!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스크린도어에 다닥다닥 붙은 좀비들이 유리를 거세게 때리며 괴성을 남발했다. 눈앞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으니 공격본능이 앞서서 그러는 거겠지만, 얼핏 보면 다 잡은 사냥감을 눈앞에서 놓친 게 분해서 마구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 하…….”
선로에 내려서 있던 지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채이와 소연까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준성은 스크린도어를 두드리는 좀비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팔을 지탱하듯 잡아주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 좀비들에게 우르르 뜯어먹힐 뻔했던 당사자가 또 그 이상한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바닥에 앉지 말고 조금만 참아. 깨끗한 곳 가서 앉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좀비의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주제에 새삼 무슨 깨끗한 걸 찾는다고.
준성은 자신의 백팩까지 가져가서 들어주는 한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들이 들어있는 백팩이라서 한서가 들어준다는 것도 마다했는데,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며 뺏을 겨를도 없었다.
‘역시 이상해.’
스크린도어가 닫히기 직전에 보인 좀비들의 반응과 일관되게 여유로운 한서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방금은 아주 찰나라서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걸 못 느낀 것 같지만, 시간 계산과 각 패턴의 결과까지 철저히 계산하던 준성으로서는 연이어 느낀 위화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큰일 날 뻔했네요.”
한서를 주시하던 준성은 자신들만큼이나 안도의 숨을 내쉬는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한서를 바라볼 땐 그렇게나 차갑고 냉정하더니, 남자를 향해서는 살풋 미소까지 걸었다. 한서는 준성의 다른 태도를 보며 입가의 곡선을 지워냈다.
“때마침 상황을 둘러보러 오길 잘했네요. 다들 무사합니까?”
남자가 다소 긴장한 눈으로 일행을 훑었다. 눈앞에서 죽게 생겼으니 급하게 구하긴 구했는데 혹시나 일행 중에 감염자가 있진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꿈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누구 한 명 물린 사람이 없다는 건 준성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지친 것뿐이에요. 물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얼핏 눈으로 보기에도 좀비들에게서 튄 피가 묻었을 뿐, 직접적으로 물리거나 다친 상처는 없어 보였다.
안심한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일행들을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준성도 나서서 채이를 챙기는데,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오빠, 저 아저씨가 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니.”
준성은 사실 알고 있었지만 꿈에서 직접 겪어봤다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당장은 믿지도 않겠지만, 믿어버리면 더 골치가 아프다. 꿈속에서 채이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니, 나중엔 왜 오빠가 나서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냐며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다. 그 후, 채이는 자신의 비밀을 안다는 것 때문에 이를 이용하려던 자들의 타겟이 되고 말았다.
‘그건 막아야지.’
동생이 좀비도 아닌 ‘사람의 위험’에 노출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채이는 준성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번 좀비 사태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온 사람이 스크린도어의 문 여는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채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좀비와 싸울 때 어디서 어떤 좀비가 어떻게 튀어나올지 다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거의 맨 뒤에 서 있던 소연이 어떻게 위험할지도 그림을 보듯 다 파악하는 것 같았다.
억측이지만, 어쩌면 스크린도어를 열어줄 이 아저씨의 등장마저 꿰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척 보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 같은데 사전에 합의된 것도 없이 이런 상황이 될 거라 예상했던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채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빠가 예지몽을 꾸거나 미래를 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무슨 노스트라어쩌고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모든 게 그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