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5회 -
캬아악-!
누가 고의로 찢어놓은 것처럼 입이 귀까지 쭉 찢어진 좀비가 치아를 완전히 다 드러내며 포효했다. 준성은 지우가 비명을 지를만한 끔찍한 몰골의 좀비를 마체테로 가차 없이 내리찍었다.
칵!
힘있게 내리친 마체테가 좀비의 정수리 안으로 손가락 한 마디쯤 박혀 들었다. 깊이 박혔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 정도만 들어가도 뇌를 일부 훼손하기엔 충분했다.
움찔거리는 좀비를 발로 차 넘어뜨려서 마체테를 뽑아낸 준성은 뒤이어 옆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케헥!
마체테가 두 번째 좀비의 이마에 박혔다. 버퍼링이 걸린 동영상처럼 멈칫하며 움찔하는 좀비를 밀쳐내고 얼른 뒤를 돌았다. 꿈대로라면, 이 타이밍에 다른 쪽에서 달려온 좀비가 맨 마지막에 선 소연을 노리고 달려들 것이다.
뒤를 돌아본 준성은 당연히 맨 마지막에 소연이 서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변수, 도한서가 합류하면서 일행의 맨 뒤에 선 사람이 그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예정대로 튀어나온 좀비가 소연과 한서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크아-!
“꺄악!”
신경을 곤두세우며 긴장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피범벅의 좀비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소연이 빗자루를 휘두를 생각도 못 한 채 얼어버렸다. 꿈에서 봤던 대로 채이가 소연을 구하기 위해 망치를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퍽!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경쾌하다 표현해도 좋을 만큼 거센 타격음이 들렸다. 머리를 베듯이 얻어맞은 좀비가 옆으로 쓰러져 꿈틀거렸다.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막대로 좀비의 머리를 후려친 한서가 준성을 바라보았다.
그때, 준성은 다리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흐르는 피가 알싸하게 차가워지는 느낌이다.
“오빠, 괜찮아?”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채이가 갑자기 멈춰버린 준성을 흔들었다.
“어, 응. 괜찮아.”
채이 덕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준성은 다시금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준성은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냉소를 담은 차가운 눈매.
희열에 찬 입꼬리.
준성은 조금만 삐끗해도 바로 좀비들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 제아무리 한서라도 절대 여유롭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이마엔 식은땀이 맺히고 눈에는 긴장과 불안이 감돌며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질 거다.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좀비를 후려치는 한서를 바라본 준성은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직감했다.
목숨이 달린 이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즐기는 듯한 한서의 모습에서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로, 순수한 흥미로 멀쩡한 사람을 죽이던 끔찍한 살인마의 얼굴을.
그 살인마는 준성이 꿈속에서조차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동료였다.
‘아니야.’
달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속으로 제 생각을 부정했다.
‘그 사람과는 달라. 다른 사람이잖아.’
준성은 꿈속에서 만났던 살인마의 그림자를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내었다. 현실이 아닌 꿈에 불과했다고 해도 준성에게 분명한 트라우마를 남겼던 그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를 만나지 않는 루트를 만들었으니 현실에서도 만날 리 없다.
준성은 순간적으로 한서가 그 남자와 겹쳐 보였던 게 단순한 착각일 뿐이라며, 마구 흔들리던 머릿속을 다시금 차분하게 다듬었다.
으어-!
크헥, 칵!
일정 간격으로 맞닥뜨리는 좀비들을 준성이 앞장서서 때려눕혔다. 일행들은 준성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리 거침없이 나서서 좀비들을 척척 때려잡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앞에서 맞닥뜨리는 좀비뿐만 아니라, 뒤쪽 일행을 공격하는 좀비마저 그가 재빨리 제거해주거나 지시를 내려주기도 했다.
좀비들이 어느 방향에서 누굴 노리고 달려드는지 이미 훤히 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꿈이 재시작될 때마다 루트를 바꿔서 진행한다 해도 최소한 이 지하철에 들어갈 때까지는 매번 같은 길을 택했다. 그게 동생과 그녀의 친구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다음은 대열 가장 뒤쪽에서…….’
어깨로 강하게 밀쳐낸 좀비가 휘청이자마자 마체테를 휘두른 준성은 멈춰버린 그를 보지도 않고 발로 차버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연……!”
꿈대로라면 또다시 맨 뒤에 선 소연이 공격받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대열의 가장 뒤에 선 건 도한서.
그의 뒤로 턱이 반쯤 사라진 피투성이 좀비가 머리를 드러냈다. 외치는 타이밍이 어긋나는 바람에 좀비는 이미 한서의 왼쪽 어깨와 가까워졌고, 그대로 달려들어서 콱 물어버릴 것만 같았다.
준성이 아차하며 소연이 아닌 한서에게 경고를 하려던 찰나.
좀비가 한서를 물지 않고 그의 옆으로 나와, 소연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한서가 무섭게 막대를 휘둘러 좀비의 이마를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이마가 움푹 들어가기까지 했다. 뒤로 날아가듯 쓰러진 좀비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금, 뭐지?’
준성은 어깨에 튄 검붉은 피를 손등으로 툭툭 털어내는 한서를 보며 강력한 위화감을 느꼈다.
‘꿈과 똑같이 흘러가기 위해…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그냥 우연인가?’
꿈대로라면 소연이 공격당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공격당한 건 뒤에서 달려오는 좀비의 시야에 들어온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서다. 지금처럼 한서가 가장 뒤에 섰다면 당연히 그를 보고 쫓아온 셈인데, 어째서 그가 아니라 앞에 선 소연을 공격하려 한 걸까.
‘잘못 본 거겠지.’
두 달간 체험한 꿈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누구도 좀비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한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거다. 그저 한서를 물려던 걸 자신이 잘못 본 거고, 그걸 확인할 틈도 없이 그가 좀비를 처리해버린 거라 생각했다.
느긋이 생각을 다시 해볼 틈은 없었다. 이미 준성과 일행들은 지하철 바로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준성이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인근에 퍼져 있던 좀비들이 하나둘 이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멈추면 안 돼! 계속 달려!”
준성은 앞장서서 속도를 높였다.
계단 아래쪽에서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올라오고 있었다.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기어 올라오는 좀비도 보였다.
수는 다섯이었지만 한 명씩 순차적으로 올라오고 있었기에, 준성은 침착하게 그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며 내달렸다. 바로 뒤에 선 채이도 준성을 도와 좀비의 머리에 필사적으로 망치를 내려찍었고, 대열의 가운데에 선 지우도 울상인 주제에 스패너를 잘도 휘둘렀다.
원래대로라면 살상력이 제일 낮은 빗자루를 든 소연을 이때쯤부터 앞으로 당겨서 챙겨야겠지만, 그녀의 바로 뒤에는 웃으면서 좀비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한서가 있었기에 준성으로서는 솔직히 무섭긴 해도 좀 든든했다.
계단을 모두 뛰어 내려간 준성은 뒤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좀비들을 보며 단단히 긴장했다. 얼핏 봐도 그 수가 스무 명이 넘는다. 꿈속에서도 본 장면이긴 했지만 현실에서 이렇게 직접 보니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머릿속에선 자꾸만 의심이 차올랐다.
‘내가 꿈에서 봤던 거랑 다르면 어쩌지?’
‘그 시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도한서처럼 꿈에서 못 봤던 사람도 만나버렸는데 앞으로도 변수가 생기지 않으리란 법이 있어?’
머릿속을 헤집어대는 가혹한 의심과 불신이 준성의 다리를 옭아맸다.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멈칫했던 아주 짧은 시간의 어긋남은 준성의 코앞으로 좀비를 밀어 넣었다.
“오빠!”
채이가 어깨를 잡아 뒤로 확 당겨준 덕분에 눈앞에서 딱, 하고 부딪치는 좀비의 치아를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얼굴을 물어뜯길 뻔했다.
좀비가 게걸스럽게 다시 입을 쳐든 그 순간.
화살 같은 게 날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스쳤다. 동시에 준성의 얼굴로 두어 방울의 걸쭉한 피가 튀었다.
컥-!
입가가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크게 벌리던 좀비는 뒤에서 날아온 막대에 꿰뚫려 버렸다. 이마쯤에 맞았다면 두개골을 부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막대는 쩍 벌린 입 안에 박혀버렸다.
막대에 꽂혀버린 충격 때문에 일순 비틀거리는 좀비의 정수리로 지우의 스패너가 강하게 내리꽂혔다.
입이 뚫려서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좀비가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형, 괜찮아요?!”
설마하니 지우에게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하지만 순수히 감탄하고 놀랄 새가 없었다.
맨 뒤에서 막대를 던져 구해준 한서와 그의 뒤에 몰려들고 있는 좀비 떼를 본 준성이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해내야만 해.’
세뇌하듯 머릿속으로 거듭 중얼거린 준성이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속도를 높였다.
일행은 이윽고 개찰구에 다다랐다.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들이 괴성과 함께 더욱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