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4회 -
인한시 전역은 이미 좀비에게 점령당해버렸고, 가는 곳마다 팔팔한 시체들이 피와 살점을 갈구하며 달려들 거다.
그 한복판에 서 있게 되면 싫어도 감정이 피폐해지고 지독한 불안과 두려움이 감정을 건드려댄다. 감정 표현도 거의 하지 않는 동생 강채이마저 날이 갈수록 우울해할 정도로 이 지옥은 너무도 가혹했다.
두 달간 이 지옥을 먼저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자신 역시 지금쯤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절망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준성은 한서의 저 여유로움도 얼마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행을 둘러본 준성은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훑어보았다.
한서는 끝이 뾰족한 막대, 채이는 준성이 철물점에서 구매해 온 망치, 소연은 화장실에서부터 챙겨온 빗자루를 들었고 지우는 보기보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은색 스패너를 들고 있다.
준성은 출발하기 전에 들렀던 철물점에서 그들을 위한 날붙이를 사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좀비를 멈추게 하려면 두개골을 뚫고 뇌를 망가뜨려야 했다.
채이와 소연, 그리고 지우는 사회체육학과 학생들이라고는 해도 그다지 힘이 센 편이 아니었다. 날붙이를 쥐여줘도 두개골을 뚫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둔기나 길이가 긴 막대로 후려쳐서 뇌진탕을 유발하는 게 낫다. 뇌진탕으로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게 다이지만, 운이 좋으면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뒤흔들어 손상시킬 수도 있다.
지금 상황에서 날이 있는 무기가 필요한 건 사실 한서였다. 자신보다야 그가 더 힘이 세고 실제로 검도학과라고 하니 그만큼 실력 면에서는 기대해볼 만했다.
그럼에도 준성이 그에게 자신의 마체테를 내어주지 않은 건, 그가 이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지 의문이어서다. 만약 좀비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살상 능력 높은 무기를 든 그가 패닉을 일으키거나 혼자 도망가버리면 답이 없다.
‘그래도 검도학과 수석이라고 하니, 막대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눈이 마주친 한서가 준성을 향해 또다시 싱긋 웃었다.
지금 이 아비규환을 보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진짜 미친놈인가.
준성은 속을 알 수 없는 한서를 한차례 노려보고서 시계를 확인했다.
‘얼추 시간은 맞게 왔어.’
가장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몇 번이나 머릿속에 그려보던 준성에게 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혀, 형, 우리 조교실로 다시 돌아가요, 예? 좀비 천지인데 어떻게 저걸 뚫고 병원으로 가요?!”
마를 생각을 않는 지우의 눈물이 또다시 그의 눈가를 채웠다.
“조교실은 못 돌아가. 줄 하나 잡고 3층까지 올라갈 자신 있으면 가도 되지만, 그래 봤자 얼마 못 견뎌.”
‘조교님한테 물려 죽을 거거든’이라는 말을 삼키던 준성에게 채이가 물었다.
“좀비가 너무 많은 건 사실이야. 좀비가 없더라도 한참 걸릴 거리 같던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채이는 그래도 오빠를 믿고 싶었다. 이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놀랄 정도의 준비성과 계산을 보여줬으니 이번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채이의 바람대로, 준성은 그들을 병원까지 인도하기 위한 가장 위험도 낮은 루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보이는 바와 같이 거리엔 좀비가 너무 많아. 병원까지 솔직하게 달려가다간 몇 분 못 버티고 다 죽고 말걸.”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준성은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떨군 일행이 준성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하.”
한서가 눈이 이채를 띠었다.
“지하로 가려는구나?”
“맞아.”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골목에서 약 50m 지점에 있는 지하철 입구를 가리켰다. 그 머리 부분과 옆의 파란색 직사각형 기둥에는 ‘인한대역’이라는 글자와 ‘3’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저쪽 입구를 통해 지하철로 내려갈 거야.”
“미쳤어요?!”
지우가 버럭하며 큰 소리를 냈다. 그래놓고 본인도 놀랐는지, 얼른 입을 다물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초에 준성이 좀비가 없는 골목으로 유도했기에 지우의 목소리를 듣고 냉큼 달려올 만큼 가까이 있는 좀비는 없었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주변 소리에 온 신경을 쏟는 가운데, 채이가 지우 대신 말했다.
“지하철은 나도 반대야. 저 지하철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줄 알아? 그 사람들이 다 좀비로 변해 있을 게 뻔한데, 왜 지하철로 내려가자는 거야?”
채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하철은 원래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출입구는 여닫는 문도 없이 휑하니 뚫려 있다. 당연히 좀비가 가만 놔둘 리 없었고, 보나 마나 지하철 내부는 또 하나의 지옥이 되어 있을 거다.
그런 곳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자고 하니, 모두가 난감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유일하게 한 사람.
한서만이 흥미로운 눈으로 준성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성은 일행의 반발을 이미 예상했기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지하철로 가려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야. 스크린도어, 비상대피소, 그리고 지하철 노선.”
짤막한 단어들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행은 준성의 다음 말에 주목했다.
“한국의 모든 지하철에는 스크린도어가 있어. 보통은 자동으로 조작되지만, 비상사태에선 수동 개폐도 가능해.”
그의 말대로 스크린도어 안쪽엔 비상시에 수동으로 열 수 있도록 손잡이가 있었다.
“하지만 좀비들은 지능이 없어서 수동으로 스크린도어를 못 열어.”
“못 연다고 해도 문제는 스크린도어와 상관없이 지하철에 좀비들이 가득하다는 거잖아요.”
“내 말은, 스크린도어 너머의 선로에는 좀비들이 없을 거라는 얘기야. 직접 열 줄도 모르고 강화유리라서 깨졌을 확률도 낮고.”
지우에게 나름대로 풀어서 설명해줬지만, 그 정도로는 굳이 좀비 무리가 있는 지하철로 향해야 한다는 걸 완전히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가 혹할 만한 얘기를 꺼냈다.
“스크린도어 너머의 선로로 넘어가기만 하면 터널 안의 비상대피소로 갈 수 있어.”
운을 떼며 시계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04:31:29 PM]
지금은 12월 초.
겨울엔 5시만 넘어도 금세 어둑해진다.
“1시간 정도만 지나도 사방이 어두워질 거야. 해가 지면 우리가 굉장히 불리해. 좀비들은 청각만으로도 우릴 충분히 쫓아올 수 있고, 반면에 우린 시야가 좁아져서 제대로 대응도 못 해. 그러니 밤에 안전히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죠.”
소연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포함한 여기 있는 누구도 밤에 이동하는 걸 찬성하진 않을 것이다. 더불어 갑자기 나타난 좀비들 때문에 잔뜩 긴장해 있느라 이미 많이 피곤한 상태일 것이다.
막상 오늘 밤에 어디서 쉬어야 할지 생각조차 못 했던 지우와 소연의 얼굴에 고민이 드리워졌다.
“지하철 노선은 병원 방향을 말하는 거지?”
준성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낸 채이가 골목 밖의 지하철 입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지하철 선로를 이용하면 더 가까울 거야. 아까 지도 보니까 병원까지 가는 길이 구불구불하던데.”
“병원까지 직통으로 도착할 순 없어도 중간지점까진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어.”
“그럼 난 찬성이야.”
한결 나아진 표정의 채이가 소연과 지우를 바라보았다.
“다른 선택지 있어?”
“…….”
“…….”
두 사람은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을 뿐.
얘기가 진행되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반발도 하지 않는 한서에게 채이가 직접 물었다.
“선배는요?”
“나도 OK야.”
여전히 웃는 낯의 한서가 준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준성은 조교실에서 느꼈던 이상한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결과도 궁금하고.”
차가운 얼음으로 척추를 내리긋는 듯한 말과 목소리였다.
너무 작은 중얼거림이라서 다른 이들은 누구도 듣지 못했다. 유일하게 들을 수 있었던 준성만이 그의 말을 신경 쓸 뿐.
‘뭐야, 대체.’
여유로움을 넘어 이젠 아주 저 멀리서 관전하며 즐기는 느낌이었다. 준성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깊이 따지고 들 때가 아니었다.
준성은 다시금 시간을 확인하며 허리 뒤쪽의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이제 곧 출발할 거야.”
“진짜 가요?”
겁먹은 얼굴의 지우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앞장설 테니까 잘 따라와. 최대한 좀비가 적은 쪽으로 이동할 거야.”
이땐 준성 역시 긴장한 목소리였다.
꿈에서 여러 번 겪은 일이라고는 해도 현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이상 기회는 한 번뿐이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모두가 죽는다.
‘할 수 있어. 침착하자.’
준성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손에 든 마체테를 꽉 쥐었다.
“달려!”
짧은 신호와 함께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바로 네 명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잔뜩 겁먹었던 지우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뒤를 쫓아오는 듯했다.
준성은 지하철역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인근 좀비의 시야 범위를 계산하며 약간 우회해서 뛰었다. 좀비가 여럿 분포되어있는 곳을 교묘히 피해낸 그는 눈앞에 보이는 혼자 선 좀비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괴성 때문에 준성이 지척에 다다라서야 그를 알아챈 좀비가 흉악한 얼굴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