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1회 -
각 지역에는 다양한 재난을 대비한 비상대피소가 여럿 존재했다. 그 대피소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는 게 바로 이곳이었다.
준성은 꿈속에서 그나마 안전하면서도 구조대가 올 예정인 이 병원으로 향하길 바랐다.
‘멀긴 해도 이래야 모두가 살 수 있어. 그리고 이 근처엔…….’
준성은 병원 옆, 다른 건물에 시선을 두었다. 마지막 꿈에서 좀비에게 기습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저곳에서 이 사태를 종식시킬 ‘그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떠올랐다. 꿈을 한 번 더 꿨다면 충분히 그랬을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결법을 찾을 때까지 매일 반복되던 꿈이 사실은 자신을 괴롭히려던 게 아니라 경고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알려주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나아가 해결까지 할 수 있도록 안배해준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욕만 퍼부었던 악몽이 처음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원룸 건물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맥없이 죽어야 했을 거다.
숨이 끊어진 후에 벌떡 일어나서 좀비가 되어버리는 자신을 상상한 준성이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그사이, 준성의 휴대폰을 움직여서 거리를 가늠해 보던 지우가 암담한 얼굴을 했다.
“여긴 너무 먼 것 같은데, 근처에 다른 곳으로 대피하면 안 돼요? 차라리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는 건요?”
지우가 벌떡 일어나서 조교실의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캔커피 다섯 개와 팩으로 된 주스 세 개, 생수 두 병이 들어있었다.
“조금이지만 물도 있고 이렇게 음료수도 있어요. 과자도 있으니까 아껴 먹으면서 기다리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지우의 말대로 이곳은 안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후 5시까지의 이야기일 뿐, 그 이후엔 감염된 조교가 들이닥쳐서 위험지역이 된다. 문의 비밀번호를 바꾸든, 안에 들어온 조교를 처리하든, 어떠한 방법으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 음식들이 바닥나고 한참이 지나도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꽤 넓은 범위의 인한시 구석구석으로 구조 활동을 펼치려면 좀비를 모두 처리해야만 가능했고, 그전까지는 대피소 위주로 구조 작업을 하는 것만도 빡빡하다.
지우에게 구조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말하려는데, 옆에서 한서가 대신 입을 열었다.
“좀비 영화 보면 보통 높은 데로 가야 구조될 수 있잖아. 여긴 그런 것도 없지만 병원이라면 확실히 구조헬기가 올 수 있을걸.”
한서의 말대로였다.
소방청에서도 정기적으로 구조헬기를 띄워서 생존자들을 찾을 테지만, 그때 구조되려면 헬기가 착륙 가능한 넓고 안전한 옥상이 필요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건물에선 구조헬기마저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한서는 지우의 반응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준성을 응시했다.
“병원으로는 어떻게 갈 거야? 차라도 있어?”
“당장은 차가 있어도 못 가. 이 근처 도로는 가는 길마다 멈춰 있는 차들 때문에 다들 내려서 대피하고 있어. 차가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도로를 발견해서 나가지 않는 한, 오히려 짐만 될 뿐이야.”
“그럼 걸어가야겠네.”
시원시원하게 말한 한서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준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허리에 있는 거, 괜찮으면 내가 써도 될까?”
한서가 눈꼬리를 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가 칼을 좀 잘 쓰거든.”
준성은 자신의 허리에 있는 마체테를 보는 한서의 눈빛에서 이상할 정도의 섬뜩함을 느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꿈에서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의 도한서와 같은 진한 피비린내가 나던, 무섭고 끔찍한 살인마를.
‘칼을 잘 쓴다는 게… 무슨 뜻이지?’
경계심과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 있는 준성에게 채이가 말을 보탰다.
“칼 잘 쓰시는 거 맞아. 검도학과 수석이셔.”
그제야 한서의 말이 이해가 갔다.
준성은 별거도 아닌 말에 괜히 긴장해버린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달라는 대로 날붙이를 줄 생각은 없었다.
도한서는 말 그대로 변수.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달리 그는 이번에 처음 만난 사이였다. 어떤 사람인지 전혀 파악도 못 했는데 무턱대고 자신의 주 무기를 건네줄 순 없다. 게다가 아까 봤던 그 탄탄한 몸과 ‘검도학과 수석’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에게 강한 무기가 들어갔을 때, 나머지 사람 중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 없게 된다.
어제까지의 평화로운 현실과 달리, 지금부터는 누가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법으로 죄를 묻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인지해야 했다.
준성을 눈으로 살피던 채이는 벽에 세워뒀던 나무 막대를 가져왔다. 뾰족했던 끝부분에는 아까 좀비를 찌르면서 묻은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길이로 봤을 때 이게 더 쓰기 편하실 거예요. 길이도 죽도랑 비슷하고.”
채이를 잠시 바라보던 한서는 곧 웃는 얼굴로 막대를 받아들었다. 조금 떨어져서 한 손으로 허공에 막대를 붕붕 휘둘러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채이는 슬쩍 준성을 바라보았다.
자신만큼이나 워낙 표정이 없는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들은 못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채이는 준성이 한서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진작 알아챘었다.
학과는 달라도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종종 한서와 같은 수업을 들어봤던 채이는 그가 검도학과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가진 우수한 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찾아왔을 때 워낙 든든해서 먼저 문을 열어주었지만, 조교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어딘지 모르게 자신이 알던 사람과 상당히 다른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채이는 준성이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아서 한서를 꺼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도 은은하게 풍기는 그의 피비린내 때문인지도.
* * *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조교실의 다섯 사람은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그 앞에 모여 있었다.
조교실 창밖은 준성이 지나온 주차장의 반대 방향이자, 대학부지를 둥그렇게 둘러싼 언덕 방향이기도 했다. 건물 아래로는 언덕 언저리까지 배회 중인 다수의 좀비가 보였다.
커피와 과자를 챙겨 넣은 에코백을 들고 있던 소연이 안경 너머로 보이는 좀비들과 언덕을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로 내려가는 거예요?”
“아니죠? 여기로 어떻게 내려가요?”
당황한 얼굴인 건 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성은 대답 대신 백팩에서 꺼내둔 로프를 보여주었다. 그냥 막 뭉쳐 놓은 로프 뭉치인 줄 알았는데, 한쪽 끝에는 네 개의 올가미를 만든 것처럼 이상한 형태로 묶여 있는 매듭이 있었다.
모두가 그 로프의 모양새를 의아해하는 가운데.
준성은 채이를 불러 조교실의 무거운 캐비닛을 가리켰다.
“저걸 창가까지 끌고 와서 이걸 묶을 거야.”
“묶는다고? 아……!”
뒤늦게 준성의 의도를 알아챈 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 준성은 이곳 인한대학교로 오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었다. 가는 도중에 막혀서 멈추게 될 건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시간에 맞추면서 그 틈에 로프의 매듭을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준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명을 보탰다.
“건물 안에 있는 대부분의 좀비는 2층에 몰려있어. 아래로 내려가려면 2층 계단을 지나야 하는데 그럼 무조건 좀비들과 싸워야 해.”
“그래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요? 저기도 좀비가 있는데?”
“그건 내려가기 전에 내가 처리해줄게.”
‘처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을 새도 없이,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준성이 채이에게 부탁했다.
“캐비닛 옮기는 것 좀 도와줘.”
“내가 도울게.”
채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서가 끼어들었다. 그는 준성이 부탁하기도 전에 이미 캐비닛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계 대상이든 뭐든, 이런 타이밍에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건 고마울 따름이다.
준성은 채이에게 로프를 잠시 맡긴 후, 그 역시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무게 때문에 둘이서 완전히 들고 옮기는 건 어렵지만 밀어서 이동시키는 건 가능했다. 바닥을 끄는 약간의 소음과 함께 캐비닛이 창가 바로 옆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한서의 도움을 받아 캐비닛의 중간쯤에 로프를 묶은 준성은 반대쪽 끝의 네 개의 올가미가 있는 쪽을 채이에게 내밀었다.
“이 네 개의 올가미가 하네스 역할을 할 거야.”
“하네스? 강아지들 몸에 채우는 끈 같은 거 말이에요?”
반려견을 키우는 소연은 강아지의 어깨와 가슴을 감싸 고정하는 형태의 목줄을 떠올렸다.
“맞아. 그것처럼 우린 여기에 두 다리를 끼우고 줄을 타고 내려갈 거야.”
“네?!”
지우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다리를 끼우든 머리를 끼우든, 이런 줄을 타고 어떻게 내려가요?!”
“할 수 있어. 다리를 끼우고 매달려 있으면 내가 잡아서 바닥에 닿을 때까지 천천히 내려줄 거야.”
꿈에서 여러 번 해봤던 일이었기에 침착하게 대답하며 장갑 뭉치를 꺼내 들었다. 빨간 고무 같은 것이 발라져 있는 공업용 장갑이었다.
준성은 로프 때문에 손이 쓸리지 않게끔, 그리고 앞으로 무기를 휘두를 때 미끄러지지 않게끔 모두에게 그 장갑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러고선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이자, 자신을 가장 믿어주는 사람인 동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