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회 -
벨트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이 자리에 여자가 둘이나 있다는 걸 깨달은 준성이 얼른 그의 손을 덮으며 막았다. 준성은 채이와 다른 두 사람을 돌아보며 조교실 데스크 쪽에 있는 칸막이를 눈짓했다.
“아래는 내가 저쪽에서 따로 확인해볼게.”
“아, 응.”
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준성이 한서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한서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얌전히 끌려가고 있었다.
칸막이는 높이가 180cm 정도 되어 보였는데, 준성은 아슬아슬하게 다 가려지긴 했지만 정작 한서는 눈언저리부터 밖으로 삐져나오듯 노출되어 버렸다. 어차피 한서의 몸에 물린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거니까 눈이 삐져나오든 귀가 노출되든 별 상관은 없었지만.
한서는 칸막이 너머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데스크와 소파 간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던 그가 준성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학교 학생 아니지?”
“어, 아니야.”
“나이는?”
“스물일곱.”
“동갑이네.”
“성실하게 대답해 줬으니까 손도 좀 움직여주지?”
차갑기까지 한 준성의 목소리에 한서가 순순히 손을 움직였다. 허리벨트와 바지 앞섶 지퍼까지 열기 시작했다.
한서가 바지를 벗으려는 와중에도 준성은 그의 상체를 구석구석 훑어보고 있었다. 깔끔한 겉옷처럼 몸에도 물린 자국 하나 없이 아주 깨끗했다.
“여긴 왜 왔어?”
바지를 벗던 한서가 또 질문을 던졌다. 준성은 스르르 내려가는 한서의 바지를 보며 대답했다.
“동생 찾으러.”
“동생이 누군데?”
“나 닮은 애 있잖아, 저기.”
준성은 칸막이 너머의 보이지 않는 채이를 눈짓했다.
자신과 채이는 누가 봐도 남매였다. 생긴 것도 닮았지만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굉장히 똑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있으면 으레 있을 법한 ‘애인이냐’하고 묻는 게 아니라 누구나 남매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니 척 보기에도 누가 제 동생인지 알아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서가 칸막이 밖의 세 사람 쪽을 바라보는 사이, 준성은 그의 다리를 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드러난 다리는 상체만큼이나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어떤 운동을 하든 다 잘할 것 같은 탄탄한 근육이 내심 부럽기까지 했다. 나름 운동을 한다고 해봐도 근육은커녕 살도 잘 안 붙다 보니, 몸 만드는 데에 그다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서 해야 하는 일과 취미의 영향도 컸다.
역시나 깨끗한 다리를 훑어보던 준성은 그의 드로워즈 쪽을 보자마자 눈가를 확 찌푸렸다.
‘미쳤네.’
드로워즈 속에 숨어있는 뭉툭한 물건의 두께와 길이를 본 준성은 저게 살인 무기가 아니면 뭐냐며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솔직히 부럽다.’
세상 어느 남자가 저 특대 사이즈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인 평균 사이즈라고 자부하는 준성이었지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봤나 보다.
한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이것도 벗어줄까?”
“됐어.”
내버려 뒀다간 정말 드로워즈까지 다 벗어줄 느낌이라, 얼른 그곳에서 고개를 돌린 준성이 바닥에 떨어진 한서의 바지를 집어 주었다.
“확인 다 했으니까 이제 입어.”
순순히 받아든 한서가 바지를 입으며 말했다.
“저기에 너 닮은 애 없는데.”
“무슨 소리야, 나랑 완전 판박이인 애 있는데.”
까치발을 든 준성이 손끝으로 채이를 가리켰다.
“저기 단발머리. 쟤가 내 동생이야.”
“아하…. 쟤구나.”
바지 벨트를 꽉 조이는 한서의 눈빛이 채이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준성은 그 역시 채이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한서의 눈빛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깝네.”
바로 옆에 있는 준성도 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응?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말 안 했어.”
싱긋 웃어 보인 한서가 목티를 입고 재킷을 걸쳤다. 옷을 다 입은 한서를 본 준성이 먼저 칸막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팔을 덥석 붙잡혔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뭘?”
대꾸하던 준성은 일순 한서의 눈빛이 돌변하는 걸 느꼈다. 입가에 계속 걸고 있던 미소도 온데간데없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차갑고 날카로운 송곳이 목젖을 겨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날 그렇게 봐?”
이상한 압박감에 순간 입을 꾹 다물었던 준성이 도리어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보고 있는데?”
“…….”
바로 대답해 줄 줄 알았는데 한서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입에 걸고 있던 ‘가짜 미소’를 보였다.
“나가자.”
준성의 팔을 풀어준 한서가 그의 머리를 한번 부드럽게 쓸어주며 칸막이 밖으로 나갔다.
“검사 끝났어.”
두 팔을 살짝 벌려 보이며 당당하게 얘기한 한서가 칸막이에서 뒤이어 걸어 나오는 준성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준성은 한서의 말에 동의하며 다른 이들의 불안을 잠식시켜 주었다.
“물린 자국은커녕 생채기도 없어. 안심해도 돼.”
“하아…. 다행이다.”
세 사람 다 눈에 띄게 안도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심한 건 채이였다. 옷을 벗어 물린 자국을 확인해보자고 주도한 건 그녀였지만, 애초에 한서를 안으로 들이자며 문을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만약 한서가 감염자였으면 채이의 죄책감이 상당했을 거다.
지우가 챙겨주는 캔커피를 받아드는 한서를 바라보며 준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티가 났나?’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감정을 누른다고 눌렀는데 아무래도 티가 났나 보다.
준성은 사실 한서를 상당히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나 깔끔한 옷과 상처 하나 없는 몸, 그에 반해 너무도 진한 피 냄새.
옷을 다 벗겨보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도한서라는 남자에게 밴 피 냄새는 그의 ‘옷’이 아니라 본인에게서 나고 있다는 걸.
준성은 꿈에서 만났던 수많은 생존자 중, 한서처럼 그 본인에게 진한 피 냄새가 배어 있던 한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좀비들의 굳어가기 시작한 질척한 피가 아니라 줄줄 흐를 정도로 싱싱한 맑은 피를 뒤집어썼던 사람.
그 사람은 이 지옥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사냥하던 잔인한 살인마였다.
* * *
“……이런 상황이야.”
“잘도 알아냈네, 그런걸.”
한서가 손등에 턱을 괸 채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준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현 상황을 설명해 준 준성에게 순수한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신고에 관한 거든 구조에 관한 거든.”
한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세 사람 역시 같은 의문을 담은 눈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채이는 한서가 조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준성을 추궁하려고 했던 만큼, 유독 눈빛이 무서웠다.
준성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릴까.
꿈에서 이미 다 봤던 거라고, 그래서 이 뒤에 어떻게 흘러갈지도 알고 궁극적으로 이 좀비 사태를 해결하려면 뭘 찾아야 하는지도 다 안다고 해버릴까.
하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다 알잖아. 밝히면 어떻게 될지.’
꿈속에서도 매번 비밀을 만들고 있던 건 아니었다.
채이와 그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었고, 이후에 만나게 될 사람들을 믿고 그들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믿지 않았다. 개중에는 미친놈 취급하며 따로 떨어뜨려서 고립시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하나둘 준성이 말한 대로 이루어질 때마다 그를 두려운 눈으로 보거나 무한한 경외심을 보이는 자들이 나타났다. 거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준성은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사람의 ‘최악’을 볼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두렵고 떨렸다.
한 사람에게 털어놓든, 여러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하든, 결국은 그 최악에 다다랐다.
그랬기에 말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 중에 군 관계자가 있어. 인터넷이 끊기기 직전에 그 사람에게 들은 내용이야.”
다른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일단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들로서는 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이제 처음 만난 사이, 게다가 친구의 친오빠가 하는 말이니 의심보다는 수긍이 먼저였다.
유일하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채이를 못 본 체하며 준성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통신도 안 되고 인터넷도 불가능해진 휴대폰이지만, 온라인 상태가 아니더라도 지도를 보는 건 가능했다. 단, GPS 기능이 있는 앱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에, 오프라인 상태에서도 확인 가능한 한국지도 앱을 미리 설치해 두었다.
지도를 띄운 준성은 네비게이션 속 약도를 닮은 그림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지금 모두가 있는 ‘인한대학교’였다.
“여기가 우리 위치이고.”
그대로 손가락을 움직여 지도 위를 이동했다. 꽤 움직인 후에야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가 그 사람이 말해준 대피소이자 구조 예정 위치야.”
준성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인한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