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6)화 (6/240)

- 006회 -

‘정신 똑바로 차려.’

공포에 노출된 몸이 멋대로 굳으려는 것을 느낀 준성은 아랫입술을 뜯어먹을 것처럼 콱 깨문 채 눈을 치떴다.

어차피 이 좀비를 맞닥뜨리는 것은 꿈에서도 똑같이 있었던 일이었다. 당황할 것 없다.

준성은 미리 꺼내 들었던 마체테로 좀비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반동까지 넣어서 제법 강하게 휘둘렀음에도 둔탁한 두개골에는 절반도 박혀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의 ‘뇌’를 손상시키는 데엔 충분한 깊이였다.

괴성과 함께 준성을 붙잡으려던 팔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좀비의 입에서는 고장 난 기계처럼 억, 억,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고, 그러다가 곧 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두 팔을 툭 떨어뜨렸다. 준성은 그런 좀비를 발로 차듯이 밀어내며 마체테를 힘있게 뽑아내었다.

멈춰버린 좀비를 보며 한차례 거친 숨을 내뱉은 준성이 마체테를 허리 뒤 검집에 박아넣고서 곧바로 자리를 박찼다.

좀비 떼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차량을 둘러싸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몸으로 완전히 덮어버릴 것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쪽으로 달려가던 좀비 중 일부는 차량 사이에서 튀어나온 준성을 발견했고, 각자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크엑!

캭! 캬학!

크어어-!

세 남녀 좀비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준성을 향해 기괴한 움직임으로 달려왔다. 준성은 그들에게 포위되기 직전, 동생이 있을 건물 쪽에서 달려오는 남자 좀비에게 안길 듯 뛰어들었다.

남자 좀비의 피 묻은 매서운 손아귀가 준성을 붙잡을 듯 휘둘러졌다. 준성은 그럴 걸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숙여 그 팔을 피해냈고, 곧바로 좀비의 가슴팍을 어깨로 거칠게 쳐서 넘어뜨렸다.

좀비를 넘어뜨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렸다. 뒤에서 다른 두 좀비와 다시금 몸을 일으켜 달리는 남자 좀비의 괴성이 무섭게 들려왔다.

준성은 건물을 향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면서 백팩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은 건 백팩의 옆구리, 물통 같은 걸 끼워 넣을 수 있는 주머니 속 살충제였다.

살충제를 꺼내 든 준성은 좁은 틈에도 분사할 수 있게끔 배려된 빨대를 떼어 분사구에 끼웠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넉넉히 사뒀던 일회용 가스라이터 하나를 꺼내, 자신을 쫓는 좀비들 쪽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준성이 할 일은 좀비들에게 살충제를 뿌림과 동시에 라이터를 빨대 앞에서 켜는 것이었다.

성능 좋은 토치로 불을 내뿜을 때 나는 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악하긴 하지만 충분히 놀랄 만한 화력을 품은 셀프 화염방사기가 좀비들의 머리를 노렸다.

카악-!

좀비들의 머리에 닿은 불길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타고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불길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고 두피가 타들어 갔다.

사실 노린다면 면적이 넓은 몸쪽이 정확도도 높고 겨누기도 쉬우나, 준성은 좀비들을 일일이 죽일 생각보다도 그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굳이 머리를 노렸다.

좀비들은 통각이 없어서 몸이 불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눈의 피막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던 그들은 머리카락과 눈썹이 불타서 눈 앞을 가리는 통에 타겟을 놓치고 만다.

머리에 불이 붙은 좀비들은 예상대로 멈칫거리며 두 팔을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방향감각마저 상실한 듯이 서로 부딪치고 밀어내며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좀비들을 보며 준성은 다시금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건물 입구에 거의 다다른 준성은 얼른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전화와 인터넷도 안되고 앞으로는 여유롭게 충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휴대폰 대신 그의 디지털 손목시계가 꽤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01:59:31 PM]

‘29초……!’

현실이라는 것 때문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는 순간이 많아서였을까.

꿈속에선 여기까지 오고도 2시까지 2분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고작 29초밖에 안 남았다.

타이밍이 늦으면 곧 밀려들 좀비들에게 그대로 붙잡혀 뜯어먹히고 말 텐데.

“젠장…!”

더 볼 것도 없이 건물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입구를 배회하고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캬아아악-!

피투성이의 좀비들이 사납게 포효하는 것과 준성이 마체테를 뽑아 드는 건 거의 동시였다.

좀비들의 기세가 워낙 거셌기에 보기만 해도 충분히 주눅이 들만했지만, 준성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어버리면 그야말로 게임 오버다.

조급함과 초조함이 준성의 공포를 밑바닥까지 억눌러주었다.

마체테를 들고 달려든 준성은 자신의 바로 앞을 가로막은 좀비의 옆머리를 거세게 가격했다. 건전지가 빠진 로봇 인형처럼 멈칫하고 굳어버린 시체를 제 쪽으로 달려드는 다른 좀비들에게 발로 차 밀치며 마체테를 뽑아냈다.

간발의 차로 다른 좀비들의 손아귀를 피해 로비를 달렸다. 백팩을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힘을 쥐어 짜내듯 달리다가, 옆에서 튀어나오는 좀비들을 신경질적으로 밀치고 마체테로 머리를 내려찍기도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시계를 수시로 확인하고 있던 준성은 곧 ‘초’뿐만 아니라 ‘분’이 바뀌는 걸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02:00:00 PM]

‘늦었다….’

아직 2층에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2시가 되고 말았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회차에서 이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가 뒤이은 좀비들의 파도에 그대로 먹혀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 살점을 뜯어먹으며 괴성을 질러댈 좀비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가운데, 어딘가 숨을 곳을 찾으려던 준성이 문득 이상함을 감지했다.

‘잠깐,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이미 2시가 되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분명 2시 정각에 들렸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올라가야 해.’

준성은 점차 하나둘 늘어나는 좀비 무리를 피해 2층 계단을 올랐다.

뒤를 쫓는 괴성과 많은 발소리로 인해 2층에서도 몇 명의 좀비가 뛰어 내려왔다. 준성은 당황하지 않고 계단의 고저를 이용해 가장 앞에 있는 좀비의 종아리를 반쯤 베어 넘어뜨렸다. 휘청이던 좀비의 몸이 비켜선 준성의 옆을 지나 아래쪽 좀비들을 덮쳤다.

뒤이어 갑자기 몸을 확 웅크린 준성은 자신의 백팩 위로 엎어지듯 덮쳐온 좀비의 두 다리를 잡아 벌떡 일어나며 뒤로 던져버렸다. 꿈속에서 똑같은 행동을 몇 번 성공해본 경험과 백팩의 두툼한 굴곡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이 뚫린 준성은 더 많은 좀비가 내려오기 전에 전속력으로 달려 2층에 다다랐다.

[02:02:34 PM]

꿈과 다르게 2시에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는 것에 언제까지고 당황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준성은 소리가 울리든 울리지 않든, 꿈속에서 자신이 잠시 몸을 숨겼던 2층 첫 번째 교수실 문 앞으로 뛰어갔다.

그 사이, 준성을 발견한 복도의 좀비 일부가 괴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알아들은 더 멀리 있는 좀비들도 하나둘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준성은 교수실의 문고리를 잡으며 도어록 키패드에 손가락을 얹었다. 꿈속에서 아무 곳도 들리지 않고 무작정 여기까지 달려, 이 방을 나서던 교수에게 비밀번호를 내놓으라며 협박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후의 꿈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알아둔 비밀번호가 지금 이 순간에도 굉장히 유용했다.

삑삑삑삑, 달칵.

2시에 매번 울리던 소리가 이번엔 들리지 않았었기에 혹시나 이런 도어록 비밀번호도 다른 게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체할 시간 없이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그러고선 교수실 안쪽 문가에 좀비가 있을 걸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손에 든 마체테로 옆의 그림자를 후려갈겼다.

캬학!

두 손으로 휘두른 마체테는 여타 좀비들에게 꽂았던 것보다 더욱 깊이 박혀 들어갔다. 그 충격으로 사방에 튄 피가 준성의 흰 셔츠와 갈색 코트에 검붉은 무늬를 만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좀비를 벽에 밀쳐 발로 밟으며 마체테를 뽑아낸 순간.

저 멀리서 굉장한 크기의 알람 음악이 들렸다.

휴대폰에 들어있는 가장 기본적인 알람 소리라는 건 알겠는데, 이건 절대 휴대폰 혼자 낼 수 있는 음량이 아니었다. 복도 거의 끝쯤에서 난 소리가 2층 초입의 교수실 안에서까지 들리려면 어지간한 고성능 스피커를 겸비한 휴대폰으로도 무리다.

저 소리의 정체는 회차가 거듭되어도 도통 밝혀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걸 알아보려면 소리를 따라 몰려간 엄청난 수의 좀비부터 쓰러뜨려야 했다. 그래서 굳이 확인해볼 생각도 못 했다.

캬악, 크엑-! 카아악!

교수실 문밖으로 수많은 발소리와 괴성이 난무했다. 역시나 좀비들은 소리를 쫓아 우르르 이동하고 있었다.

준성은 교수실 문에 귀를 댄 채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알람 소리는 좀비들의 괴성 사이에서도 여전히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매번 2시 정각에 울리는 휴대폰의 기본 알람 음악.

시간의 정확성과 음악을 두고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2시에 알람을 맞춰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알람의 주인이 이미 좀비에게 물려서 그걸 끌 수가 없었든, 아니면 끄는 걸 잊어서 좀비들에게 에워싸였든, 준성으로서는 매 회차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이 소리를 기회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이상했다.

알람을 맞추기엔 충분히 애매한 시간인 2시 3분.

심지어 준성이 교수실 안으로 들어간 시점이자, 30초나 더 지나서 알람이 울렸다. 누군가가 그의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다가 의도적으로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준성은 현실의 좀비를 맞닥뜨린 것보다 더한 혼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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