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나는 서정연을 멍하니 바라보며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 반복해서 떠올렸다.
‘씻는 걸 도와 달라고?’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쇄골 라인이 유난히 새하얗게 빛났다.
그걸 보는 내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씻는걸?’
나와 서정연은 아직 키스밖에 못 해서, 당연히 서로 맨몸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씻는걸… 도와주려면… 아무래도 오, 옷을 다 벗어야겠지? 물이 튈 테니까 나도 벗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잠깐만! 애가 다쳐서 아프다는데 지금 이런 생각할 때냐? 도해준 너 미쳤어?’
황급히 이성을 붙잡는 머리와 달리 심장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쿵쾅쿵쾅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열이 멋대로 올라서 목과 귀가 화끈거렸다. 붉어진 얼굴을 가릴 생각도 못 하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는데, 내 대답을 기다리던 서정연이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도해준 씨?”
“……어?”
“어디 봐요?”
“……!”
해맑은 질문에 그제야 내가 서정연의 얼굴이 아닌 가슴팍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정연이 짚어 주기 전까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진 나는 버티지 못하고 내 눈가를 팍 때렸다.
철썩!
“도해준 씨!”
내가 내 손으로 눈을 때리자 서정연이 깜짝 놀랐다. 내 허벅지 위에 누워 있던 정이도 놀랐는지 소파 아래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갑자기 왜 그래요?”
“별거 아니야. 아무래도 정신을 좀 차려야 할 필요가 있어서…….”
다치지 않은 손으로 황급히 내 손목을 붙잡는 서정연에게 나는 온통 새빨개진 얼굴로 애써 웃었다.
“그래, 도와줄게. 당연히 도와줘야지.”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날 보던 서정연이 그 대답에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정말요?”
“나 때문에 다쳤는데 그런 것도 안 도와주면 쓰레기지.”
내 머릿속은 이미 쓰레기지만.
차마 서정연에게 하지 못할 뒷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짙게 미소 지은 서정연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우면서 살짝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 왔다. 서정연과 스킨십을 할 때면 매번 나던 그 향이었다.
“그럼 저 밥 먹는 것도 도와줘요. 정이 산책도 같이해 주고… 옷 입는 것도 도와주고.”
“어, 어?”
“한 손으로 하기 어려워서요. 특히 정이는 산책하다가 목줄을 놓치면 큰일 날 텐데. 정이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그건 안 되지…….”
씻는 거부터 정이 산책까지 다 도와주면 집에는 언제 가야 하려나? 도저히 시간이 안 날 것 같다.
이번에는 내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재촉하듯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적거린 서정연이 물었다.
“싫어요? 안 도와줄 거예요?”
“그럴 리가. 다 도와줄게.”
이렇게 안쓰럽게 물어보면 어떻게 거절해. 다른 사람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못한다.
집이야 나중에 가면 되지. 어차피 옷이나 필요한 물건은 이미 여기에 갖다 놓았으니 며칠 묵는 건 상관없었다.
“오늘부터 바로 도와줄 거죠?”
“응.”
그제야 만족한 기색으로 옅은 숨을 내쉰 서정연이 얼굴을 들었다. 코앞에서 나와 시선을 마주한 서정연이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이며 말했다.
“저 키스해 줘요.”
“…….”
아까부터 든 애먼 생각과 서정연에게서 풍기는 향기, 눈앞에 들이닥친 예쁜 얼굴. 거기에 키스해 달라는 유혹까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릿속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기분 탓인가? 오늘따라 서정연이 날 좀 더 열심히 꼬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내가 다친 손을 자꾸 신경 써서? 내가 죄책감을 느낄까 봐?
내게서 혼란스러워하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서정연이 먼저 입술을 맞대 왔다.
항상 내가 먼저 해 주기를 기다리던 서정연이 안달 내듯 먼저 키스해 오는 모습에 나 또한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 줄이 뚝 끊어졌다.
서정연의 셔츠 깃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한층 더 깊게 맞물린 입술에서 따듯한 혀가 질척하게 비벼졌다.
끼익, 그대로 서정연을 밀어붙여 소파 위에 눕혔다. 서정연 또한 순순히 누우며 내 팔을 잡아당겨 상체를 더욱 붙어 왔다.
아, 기분 좋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자꾸만 뭔가를 더 하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 애인은 다쳤다. 지금 많이 아픈 상태다. 끊임없이 되뇌며 욕망을 억지로 내리누르던 그때였다.
홀린 듯이 키스하던 나는 서정연이 다친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걸 알아챘다.
“서정연. 잠깐, 읏…….”
그러지 말라고 알려 주기 위해 입술을 잠깐 떼자마자 서정연이 곧장 따라왔다.
결국 나는 키스를 이어 가며 내 어깨를 잡은 서정연의 손목을 움켜쥐고 억지로 떼어 냈다. 그리고 다른 것을 잡지 못하도록 다친 손을 서정연의 머리 위로 올렸다.
내게 손목이 잡혀 머리 위로 고정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키스할 때마다 내 몸 어딘가를 항상 잡고 있던 서정연을 떠올려 보면 억지로 빈손이 된 상태가 제법 어색한 모양이다.
빈손을 자꾸 움찔거리는 게 귀엽긴 하지만, 다친 손이 나랑 키스하다가 덧나는 꼴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후우, 도해준 씨…….”
그렇게 한참 동안 키스하던 서정연이 뺨을 붉게 물들인 채로 내게서 입술을 떼며 말했다.
“저 손…….”
“미안. 불편해?”
몽롱한 눈으로 웅얼거리는 서정연이 귀여워서 눈꼬리에 입을 맞추며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었다.
“불편한 건 아닌데, 아쉽긴 하네요. 한 손만이라고 해도 제 마음대로 뭔가 잡을 수가 없다는 게.”
“이 주일만 참자. 다친 거 나을 때까지 내가 다 도와줄게.”
키스 한 번 하는 데에도 평소처럼 행동하는데, 씻고 밥 먹는 일상에서는 더더욱 무심코 다친 손을 쓰겠지.
그러다가 상처가 심해질까 봐 겁났다. 서정연이 부탁한 대로 상처가 낫기 전까지는 옆에 붙어 지내면서 도와주는 게 좋을 거 같다.
‘…허튼짓 말고 제대로 챙겨 줘야지.’
무려 열 바늘이나 꿰맨 상처였다. 그것도 나를 지키려다가 다친 건데, 나는 서정연의 맨몸을 떠올리면서 설레다니. 나 진짜 쓰레기인가 봐.
속으로 자책을 늘어놓으며 한탄을 삼키던 그 순간이었다. 셔츠 자락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시선을 내리자 단추를 하나둘씩 풀고 있는 서정연이 보였다.
“뭐 해……?”
“네?”
갑자기 내 셔츠 단추는 왜 풀고 있는 거지? 어이없어서 묻자 서정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 씻는 거 도와준다면서요.”
“그런데?”
“옷을 벗어야 씻는 걸 도와주죠.”
“내가 벗으라고? 씻는 건 너잖아.”
“씻는 사람도 벗어야죠. 다 젖을 텐데.”
당황하는 내게 대답해 주는 와중에도 단추를 푸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다친 손은 놔두고 한 손으로만 하는데도 왜 이렇게 단추를 쉽게 푸는 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꾸 건드릴래?”
그야 나도 서정연과 똑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신 차리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오히려 서정연이 방해꾼이었다.
내 질문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서정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뭐 어때요.”
“아니, 그래도…….”
“우리 이제 복잡한 일 하나도 없잖아요.”
“…….”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다친 손을 뻗어서 손가락 끝으로 내 눈가를 톡 건드렸다.
“제일 귀찮고 거슬리는 놈들도 치웠고.”
손가락 끝이 아래로 내려와 이번에는 뺨을 건드려 왔다. 익숙한 향기 사이로 소독약 냄새가 뒤섞였다.
“남아 있는 귀찮은 놈들은 미리 준비해 둔 대로 치우기만 하면 되고.”
“그건 그렇긴 하지.”
그 얘기를 듣자 새삼스럽게 그와 같이 지낸 몇 개월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서정연과 카페에 마주 앉아서 어나더 길드에 잠입하자는 제안받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런 사이가 됐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고생 많이 했어요.”
“너도.”
서정연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여전히 어나더 길드와 노퓨쳐에게 고통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그 상황이 길어지면 길드를 나가거나 게임을 접는 길드원들이 생겼을 거고 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다. 그렇게 따지면 서정연이 길드와 내 심신의 안정을 모두 지켜 준 셈이었다.
“고마워.”
뭔가 멋있고 감동적인 감사 인사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말재주가 없어서 나오는 건 고작 이 한마디뿐이었다. 그런데도 서정연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쪽, 콧등에 가볍게 뽀뽀를 한 서정연이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같이 씻어요.”
그 간지럽고 애교 섞인 말에 결국 나도 버티지 못하고 서정연을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남은 단추를 직접 풀어서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서정연과 같이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서정연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으며 내게 입을 맞췄다. 욕실로 가는 동안 우리는 몇 번이고 입술을 부딪치고, 몇 번이고 같이 웃었다. 방석에 누워서 개껌을 먹던 정이가 우리 웃음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칵, 내 허리를 끌어안고서 욕실로 들어간 서정연이 욕실 문을 닫았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