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회의가 끝난 뒤, 하경민을 데리고 QA팀으로 돌아온 팀장은 불쾌감이 서린 얼굴로 하경민의 등을 확 밀었다.
“빨리 좀 움직여! 하, 씨발. 내가 저 새끼 때문에 이게 뭔 개고생이야.”
팀장이 버럭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일을 하던 QA팀 직원들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팀장이 오히려 보란 듯이 더 큰 소리로 명령했다.
“10분 줄 테니까 당장 자리 정리하고 나가!”
“아니, 팀장님.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상황을 지켜보던 대리가 팀장에게 다가와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하경민은 땀에 범벅이 된 얼굴을 숙이고서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화가 나다 못해 속이 다 터진다, 아주!”
“뭔데요? 디렉터님이랑 만나고 오신 거 아니에요?”
“어휴… 아니 글쎄 저 새끼가 버그를 유출해서 그걸 써먹었단다!”
“예? 유출이요?”
폭탄처럼 던져진 유출이라는 말에 대리가 크게 당황했다. 동시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속에서 자신의 책상을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던 하경민이 낮게 중얼거렸다.
“왜…….”
왜 이렇게 됐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왜 자기가 이런 처지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남들도 다 이 정도 편법은 쓰고 살잖아?
버그를 유출한 게 어때서? 그거로 내가 뭐 대단한 거 했어?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는데. 아이템 판 것도 뭐? 그렇게 쉽게 가져가도록 놔둔 놈들이 문제 아닌가?
“씨발, 씨발…….”
염불을 외듯 속삭이며 욕설을 뱉어 낸 하경민이 손톱을 억지로 뜯어냈다.
뭐 얼마나 갖다 팔았다고? 그거 다 나중에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는데, 디렉터 시발놈이. 내가 여기 들어와서 일한 값어치 따지면 그딴 아이템 몇 개를 팔아도 오히려 이득 보는 건데 병신이 그것도 모르고.
“아니, 아니지.”
디렉터를 저주하던 하경민이 무언가를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아래로 드러난 하경민의 두 눈동자는 지저분한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디렉터도 좆같은 새끼지만 진짜 범인은 다른 새끼지.’
회의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상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일 길마. 그 새끼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다. 짜증 나고 비열한 새끼.
운 좋게 길드 랭킹 1위를 찍은 놈이 나한테 그 자리를 빼앗길까 봐 더러운 짓을 벌였다.
요일 길마 옆에 ‘진짜 흔적’이 앉아 있던 건 상상도 못 했지만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그 새끼가 배신하고 요일 길마한테 붙은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이대로 물러나면 그게 다 요일 길마가 바라는 걸 텐데.
까드득, 까득. 강박적으로 뜯어낸 손톱에서 결국 붉은 피가 흘렀다. 하경민은 그 쓰린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일 길마를 떠올렸다.
요일 길마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기처럼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사람을 건드려 놓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낼 모습을 떠올리니까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내려다보며 하경민은 생각했다. 요일 길마에게 이 치욕을 갚아 주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그때, 책상 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가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가위는 무척 깨끗했다. 시중에 판매하는 가위라 끝은 조금 뭉툭했지만, 윗부분이나 가윗날은 굉장히 매끈하고 날카로웠다.
혼란과 억울함, 분노가 뒤죽박죽 섞여 있던 하경민의 얼굴이 가위를 들고 나서는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차분해졌다. 무언가 결심을 내리듯, 입술을 꾹 다문 하경민이 거침없이 자리를 떠나갔다.
“얘기 들어 보니까 버그만 유출한 게 아니라 지 친구한테 공유하고, 아이템도 복사해서 다 팔아 치웠더라고. 하, 시발.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하냐고. 저 새끼는 나가면 끝이지, 고생은 죄 우리 몫인데.”
“아니… 아이템까지요? 어떻게요?”
“뭘 어떻게야, 우리 테스트 계정에 있는 거 옮겼겠지! 지랄 같아서 진짜… 뭐야?”
대놓고 하경민을 욕하던 팀장이 고개를 돌리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리 정리하라니까 그새 어디 갔어?”
“화장실 간 거 아닐까요? 상태가 나빠 보이던데.”
“하, 나. 가지가지 하네.”
***
회사 건물을 나온 하경민은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가고 있는 요일 길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하아, 하아.”
심장이 빠르게 뛰어오르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기묘한 흥분과 불안이 몸을 잠식했다. 허억, 허억. 숨소리가 도무지 제어되지 않았다.
한 손에 가위를 강하게 움켜쥐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걸어가는 하경민의 모습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행인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하경민의 시선은 오로지 앞에 있는 요일 길마에게 꽂혔다.
뒤에 하경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요일 길마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책하길 잘했네.”
“그렇죠? 이왕 나온 거 저쪽까지 쭉 가 볼까요? 카페가 나오면 들러도 좋고.”
시발 새끼들. 남의 인생은 구렁텅이에 처박아 두고 한다는 말이 뭐? 산책하길 잘해? 카페를 들러? 가위를 붙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 자신이 자꾸 호구같이 행동하니까 가해자 새끼들이 본인 잘못도 모르고 저딴 식으로 웃는 거잖아.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터였다.
타닥, 요일 길마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진 걸 확인한 하경민이 발끝에 힘을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가가면 들킬 위험이 크니 차라리 뛰어서 급습하는 게 성공률이 더 높을 거라는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울려 퍼지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려지고 오로지 요일 길마만이 보였다.
그때였다. 요일 길마도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챘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그래 봤자 이미 늦었어!’
눈앞에 요일 길마의 얼굴이 보였다.
이 거리에서는 피할 수 없다. 등줄기로 짜릿하게 올라오는 희열과 쾌감에 하경민은 저도 모르게 입술이 찢어져라 웃었다.
목표는 저 눈. 자신을 깔보고 한심하게 쳐다보던 저 눈이었다. 크게 뜨여진 요일 길마의 눈을 향해 하경민이 가위를 휘두른 그 순간이었다.
요일 길마의 얼굴과 가위 사이로 무언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하경민은 그게 누군가의 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위가 요일 길마의 눈 대신 누군가의 손바닥을 찔렀다. 끝이 약간 뭉툭한 탓에 손바닥을 꿰뚫는 대신, 가위가 손바닥 위로 쭉 미끄러졌다. 워낙 강한 힘으로 휘두른 터라 가위 윗부분에 손바닥이 길게 베였다.
손목 근처부터 중지와 이어진 부분까지,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길게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시, 시발! 당장 꺼…….”
회심의 공격이 막혔다는 사실에 더없이 분노한 하경민이 벌컥 소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소름 끼쳤다. 옅은 미소를 짓고서 회의실에 앉아 있던 남자가 지금은 오싹한 한기가 돌 만큼 서늘한 얼굴로 하경민을 쳐다봤다.
분명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는 대낮의 거리인데도 새하얀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져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어, 으…….”
새하얗게 질린 하경민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겁을 집어먹은 짐승처럼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주춤 뒷걸음질 치려는 하경민의 손목을 상대가 피가 나는 손으로 세게 붙잡았다.
“별 병신 같은…….”
하경민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인 상대가 붙잡은 팔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순식간에 하경민의 발목을 후려 찼다.
가차 없이 차인 발목에 화끈한 통증이 퍼짐과 동시에 하경민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덜걱, 들고 있던 가위도 아래로 떨어졌다.
쿠웅!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요란하게 넘어진 하경민이 제정신을 못 차렸다. 바닥에 제대로 부딪힌 얼굴이 죄 까졌다. 하지만 부딪힌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여태 붙잡혀 있는 팔이 등 뒤로 휙 꺾였다.
“어, 으, 억, 끄아아악!”
우두둑, 끔찍한 소리와 함께 팔과 어깨에 내리꽂히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하경민이 비명을 내지르며 울부짖었다.
“놓, 놔줘, 놔, 아아악…!”
발버둥 치는 하경민의 등을 무릎으로 짓누른 상대가 봐주지 않고 팔을 더더욱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미칠 듯한 통증에 하경민이 꺽꺽거리며 반대 손으로 피가 나도록 바닥을 죽죽 긁었다.
“끄윽…….”
어깨와 팔에 가해지는 고통을 버티다 못한 하경민이 결국 기절했다. 하경민이 눈을 뒤집고 고개를 툭 떨구는 것을 확인한 상대가 그제야 꺾었던 팔을 놔주고 몸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아니, 너 일단 손…….”
창백하게 질린 상태로 더듬더듬 묻던 도해준이 서정연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발견하고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도해준 씨.”
조심스럽게 피가 나는 손을 잡아 오는 도해준에게 서정연이 말했다.
“아무래도 경찰 불러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