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영상이 끝나자마자 디렉터가 입을 열었다.
“실수라고 했습니까?”
회의실 공기는 영상을 보기 전보다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속에서 하경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영상에 찍힌 사람은 하경민 씨로 보이는데요.”
“…….”
“영상에 함께 찍힌 상대에게 버그를 유출하고 악용하도록 시킨 게 맞습니까?”
“…….”
이어지는 디렉터의 질문에도 하경민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선택했다. 디렉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가 이거 하나만 있는 줄 압니까?”
“…….”
“버그를 유출하고 악용한 데서 끝난 게 아니라 아이템을 멋대로 복사하거나 본인 계정으로 옮겨서 판매하고… 지지난해 10월부터 해 온 부정행위에 대한 모든 증거 자료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디렉터는 갑자기 손으로 두 눈을 꾹 누르며 헛웃음을 흘렸다. 문득 이런 부분까지 설명하는 자기 모습에 현타가 밀려온 것처럼 보였다.
“설마 이런 준비도 안 해 놓고 직원을 불러서 묻겠어요?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디렉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팀장이 하경민을 짜증스럽게 다그쳤다.
“뭐 해, 하경민 씨! 뭐라고 말 좀 해 봐!”
“…….”
“아니, 대체 뭔 정신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일은 일대로 벌여 놓고 지금 입만 다물고 있으면 다야? 죄송하다고 빌지는 못할망정!”
팀장의 닦달에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던 하경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상…….”
“뭐?”
“영상…….”
천천히 고개를 든 하경민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적나라하게 노려봤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물었다.
“영상, 누, 누가… 누가 찍었는지…….”
기껏 입을 열고 한다는 말이 저런 거라니. 디렉터와 팀장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이 자리에 함께 있어서 그런지, 하경민은 내가 버그 유출을 신고하고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피부를 찌를 듯한 적의에 내가 막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내가 찍었어요.”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놀라서 옆을 돌아보자 서정연이 옅은 미소를 띤 채로 하경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경민도 설마 여기서 서정연이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눈동자를 흔들며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쪽은 누, 누구…….”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요?”
“…….”
“왜? 관련 없는 사람이 끼어들어서 찍었다고 해도 영상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 아니면 뭐, 영상 조작이라도 했을까 봐요?”
“당신이 뭔데, 함부로 남의 영상을 찍, 찍어서… 이거 고, 고발…….”
고발? 갑자기 무슨 고발? 혹시 고소한다는 뜻인가?
웬만하면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으려 하는데, 하경민을 상대로는 그게 쉽지 않았다. 디렉터와 팀장도 나와 비슷한 눈빛으로 하경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잘됐네요. 하경민이라고 했던가요? 나도 당신을 고소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하경민의 어이없는 말실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은 서정연이 이어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제 사칭범. 저 영상에도 나왔듯이 사칭하도록 종용한 사람이 그쪽이더군요.”
“어… 어……?”
“그쪽이 데려온 사칭범 덕분에 ‘흔적’ 닉네임을 향한 게임 속 여론은 물론, 커뮤니티에 부정적인 글들이 참 많이 올라왔어요. 날 사칭했다는 증거나 그로 인해서 내가 피해 봤다는 자료도 많고.”
“어… 으…….”
두 눈을 부릅뜨고 서정연이 하는 말을 듣던 하경민은 한층 더 거무죽죽한 낯빛이 되어서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땀을 어찌나 많이 흘리는지, 얼굴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옷이 축축하게 젖을 지경이었다.
‘멍청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바로 저번 주말에 흔적이 나와 같이 자기들을 상대로 길드 전쟁에서 이겼으면 한 번쯤 의심해 볼 법할 텐데, 설마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진짜 흔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나 보다.
고소하겠다고 적반하장으로 행동하려던 하경민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덜덜 떠는 모습에선 더는 발뺌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걸 디렉터도 느꼈는지 재차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이 두 사람한테 뭐 할 말 없습니까, 하경민 직원?”
“…….”
경직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끝끝내 얼굴을 들지도 않고 입을 열지도 않는 하경민을 잠자코 응시하던 나는 책상 아래로 서정연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하고 가자.”
나지막한 내 말에 서정연이 나를 돌아봤다. 내게 향한 새까만 눈동자에는 정말 괜찮겠냐는 염려가 담겨 있었다.
“여기 더 있어 봤자 별 의미 없을 거야.”
“…알겠어요.”
지금이 하경민에게 사과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만들어 준 서정연의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하경민은 내게 순순히 사과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한참을 기다리면 버티다 못한 하경민이 사과와 비슷한 무언가라도 내뱉겠지만, 그걸 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버그도 해결됐고 어나더 길드와 사칭범 문제가 일단락된 이상, 나는 하경민에게 그리 감정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었고.
“그래요. 회의는 일단 이거로 끝내죠.”
나와 서정연의 대화를 들은 디렉터가 프로젝터를 끄며 말했다.
“팀장님은 하경민 씨 데려가서 뒷정리 도우세요. 하경민 씨는 오늘부로 출근할 필요 없습니다. 사무실 돌아가서 한 시간 내로 짐 정리해서 떠나세요. 직원 출입증도 알아서 반납하시고.”
“…….”
“미리 말해 두지만, 하경민 씨의 아크로드 계정은 이미 영구 정지 상태입니다. 버그를 악용한 블레이드 유저도 마찬가지고요. 버그 유출을 포함한 부정행위의 처리는 추후 통보가 갈 겁니다.”
온몸을 덜덜 떨며 디렉터의 설명을 듣던 하경민이 마지막 말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걸 보며 깨달았다. 아, 이제 정말 끝이었다.
***
“우리 잠깐만 산책하고 갈래요?”
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탄 서정연이 지하층 대신 1층을 누르며 미소 지었다.
“도해준 씨도 좀 답답하지 않아요? 근처라도 구경하고 가요.”
“좋아.”
답답하기보단 기분이 어쩐지 복잡했다. 몇 개월간 고생했던 사건이 드디어 마무리되어서 속이 시원한 동시에 식은땀을 흘리며 절망하던 하경민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1층에 내려서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정연이 말했다.
“도해준 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근데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뭐?”
그 말에 나는 놀란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 기분을 쉽사리 짐작하고 있는 서정연이 신기했다.
“지금은 하경민이 불쌍해 보이는 것뿐이니까.”
“불쌍해 보인다고?”
“불쌍하죠. 어쨌든 한순간에 직장도 잃고 형사 고소까지 당할 처지인데.”
선선한 바람이 길거리를 걷는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낮의 햇살이 내려오는 거리에는 주변에 회사밖에 없어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일주일만 지나면 그런 복잡한 기분은 사라질 거예요. 지금 기분이 자꾸 처지는 건, 이유야 어찌 됐건 고통받는 사람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탓일 테니까.”
“음,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제 말이 맞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우리가 아니었어도 하경민은 언젠가 꼬리가 잡혀서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더 심했겠죠. 오랫동안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갑자기 그 짓을 그만둘 리가 없잖아요.”
서정연의 설명을 들을수록 마음이 조금씩 편해졌다.
아무래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으로 하경민이라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피해자고, 이 모든 건 하경민이 본인 손으로 직접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산책하길 잘했네.”
서정연이 해 준 다정한 위로가 고마워서 픽 웃으며 말하자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그렇죠? 이왕 나온 거 저쪽까지 쭉 가 볼까요? 카페가 나오면 들러도 좋고.”
결국 데이트하자는 거잖아. 이런 귀여운 데이트 신청을 내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
갑자기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에 퍼져 나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덮쳐 왔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불길한 예감을 본능적으로 느낀 몸이 경직되고 심장이 빠른 속도로 쿵쿵 뛰어올랐다.
“도해준 씨?”
나보다 몇 걸음 앞서가던 서정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서정연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뒤쪽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으아아아!”
뒤로 몸을 돌린 동시에 누군가가 내지른 비명이 귓가에 크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증오와 분노에 범벅이 된 얼굴. 상대가 입술을 길게 찢으며 귀신처럼 웃었다. 동시에 어떤 새하얗고 뾰족한 날붙이가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