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판교에 있는 아크로드 게임사에 도착한 우리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 미리 안내받은 위층으로 향했다.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우리가 안내받은 장소는 12층에 있는 회의실이었다. 미리 와 있던 디렉터가 우리를 반겨 줬다.
“행사장에서도 느꼈지만 두 분 다 정말 훤칠하시네요. 하하, 일단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적당한 인사말과 함께 회의 테이블의 왼편을 손짓한 디렉터가 먼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경민 직원을 이쪽으로 막 부른 참입니다. 10분 정도 기다리면 올 건데, 그 전에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흠, 짧게 목을 가다듬은 디렉터가 이어 말했다.
“우선…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 드렸던 대로 하경민 직원의 아크로드 닉네임은 ‘노퓨쳐’가 맞습니다. 음, 그리고 이건 살짝 다른 문제인데.”
잠시 고민하던 디렉터가 앞에 놓인 태블릿PC를 우리에게 넘겨줬다.
뭔가 싶어서 받아 보니 태블릿PC 화면에는 어떤 기록이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거래 내역인 것 같았다.
“지난 주말에 하경민 직원의 계정을 좀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구매한 적도, 얻은 적도 없는 아이템을 여러 차례 판매한 내역이 뜨더군요.”
구매하지도 얻지도 않은 아이템을 판매했다고? 나는 경악스러운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거 설마…….”
“네. 본인이 멋대로 아이템을 생성하거나 복사해서 판매한 겁니다.”
디렉터 본인도 하경민이 버그 유출과 악용 외에 다른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설명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경민 직원은 QA팀 소속이고, QA팀에서는 신규 콘텐츠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테스트 계정에 들어 있는 아이템을 무단으로 본인 계정으로 옮기고, 테스트하기 위해 권한을 넘겨받은 아이템을 생성해서 판매한 거로 확인됐습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게임사에서 직접 나서서 발견해 낸 내용이니 거짓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하경민은 버그 유출과 악용에 더해서 아이템까지 멋대로 빼돌렸다는 건가.
‘진짜 고소당하고 싶어서 환장했나?’
버그 유출과 악용도 당연히 문제였지만, 이건 딱 한 번 벌어진 일이었다. PVP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실수했다고 변명하면 얼마든지 무마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이템을 빼돌려서 판매한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빼돌린 아이템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개인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 동시에 게임사에 큰 손해를 입혔으니 실수라고 퉁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죠.”
잠자코 디렉터의 말을 듣던 서정연이 입을 열었다.
“레이드를 뛰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장비나 의장은 계속 바뀌더라고요. 전 그래서 현질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서정연과 함께 부캐로 어나더 길드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하경민은 접속만 할 뿐, 길드원이랑 함께 레이드를 하러 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경민이 워낙 필드에 나타나질 않으니까 이상하다고 여겼었지.
어차피 아이템을 복사하거나 빼내 와서 팔면 되니까 굳이 PVE를 하러 갈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런 식으로 과연 얼마나 금전적 이득을 얻었을지 궁금해졌다.
“버그 픽스는 이미 진행 중이고, 공지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내일 올라갈 겁니다. 하경민 직원은 오늘부로 바로 해고되고 계정 압류도 진행될 예정이고요.”
태블릿PC를 돌려받은 디렉터가 우리에게 물었다.
“이 자리는 두 분이 희망하셔서 만들어진 자리인데, 혹시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경민 직원은 두 분이 제안 주신 대로 처리할 건데, 굳이 시간 내서 찾아오신 거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나는 대답 대신 서정연을 돌아봤다. 하경민과 만나기를 요청한 건 서정연이었으니 이번 질문에 답은 그가 하는 편이 나았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사과받는 겁니다.”
서정연은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기색으로 말했다.
“저희가 그 직원한테 피해받은 게 한둘이 아니고, 기간도 몇 개월이나 되는데 얼굴 보고 사과라도 받아야죠. 그 직원이 해고당하고 계정 압류당하는 거야 엄연히 따지면 우리와 상관없지 않습니까?”
“큼, 그거야…….”
“이렇게 억지로라도 자리를 만들어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부탁드린 겁니다. 그 직원이 우리를 따로 만나 줄 리가 없고, 먼저 사과를 해 올 일은 더더욱 없으니까.”
대답을 듣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연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하경민이 부정행위의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했지만 우리가 그간 본 피해의 보상이 되어 주지는 못 한다.
그래. 얼굴 보고 사과라도 받아야지. 대단한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하경민이 우리에게 한 비매너 행동들이 있는데 용서도 구하지 않고 넘어가면 너무 억울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말씀드리자면, 곧 QA팀 팀장이 하경민 직원을 데리고 올 겁니다. QA팀 팀장도 함께하는 자리라서, 두 분 마음은 알지만 지나치게 탓하는 태도는 조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태도를 조심해 달라는 건 우리를 배려하는 말이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하거나 과한 행동을 하면 하경민이 나중에 그걸 걸고넘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어차피 하경민의 문제가 확실시된 상황이니 우리는 그냥 지켜만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사과를 들으면 된다.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니까.
똑똑.
“아, 왔나 보군요. 들어오세요.”
때마침 설명이 끝나자마자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디렉터의 허락에 문이 열리며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디렉터가 말한 QA팀 팀장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 어어…….”
퉁퉁한 체격의 안경을 쓴 남자. 저번에 비상계단에서 본 노퓨쳐, 하경민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팀장을 따라 들어온 하경민이 날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하경민도 나를 알아본 것이다.
“앉으세요.”
디렉터의 손짓에 우리 맞은편에 앉은 하경민이 잔뜩 불안하고 불편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을 거다. 나는 그런 하경민을 도리어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시선을 알아챈 하경민이 더더욱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제가 왜 갑자기 두 사람을 회의실에 부른 건지 의아할 겁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디렉터의 태도는 방금과는 달리 굉장히 딱딱하고 차가웠다.
우리는 손님인 데다가 귀중한 증거 영상까지 지원해 줬고, 저들은 직원 관리 못 한 책임자와 부정행위를 저지른 직원이었으니 다를 수밖에 없긴 했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말이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서 팀장님한테도 알려 드리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사항입니다.”
“중요한 사항… 말입니까?”
팀장이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런 팀장을 두고서 디렉터는 하경민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가죠. 하경민 씨.”
“예, 예?”
“업무를 위해 주어진 권한을 이용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거로 확인되는데, 이에 관해서 할 말이 있습니까?”
“……예?”
디렉터의 추궁에 멍한 표정을 짓던 하경민이 이내 나를 노려봤다. 선명히 느껴지는 적의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 아닙니다. 전 그런 적 없습니다!”
흥분으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하경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디렉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심드렁히 되물었다.
“그런 적 없다고요?”
“없습니다! 제가 그,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흐음…….”
“무슨 제보를 받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아닙니다. 마, 만약 뭔가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실수였을 겁니다.”
“실수?”
“네, 실수요. 아무리 제가 QA팀에서 일한다지만 게임에 있는 시스템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플레이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뭔가 했을 수도 있고…….”
“뭐, 그래요. 그럴 수 있죠. 다만 제가 물으려던 건 하경민 씨가 아니라 하경민 씨와 함께 플레이한 유저가 쓴 버그 때문입니다. 블레이드 버그를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더군요.”
“블레이드 버그를요?”
가운데 껴서 대화를 듣던 팀장이 그제야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채고는 기겁했다. 팀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하경민은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같이 게임 하는 사이라지만 그 사람이 버그를 쓰는 거랑 저랑 무슨 관련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 유저도 그저 우연히 버그를 쓰게 된 걸 수도 있잖아요.”
“그게 하경민 씨 의견입니까?”
“네! 오히려 저는 부, 불쾌합니다. 절 불러서 이런 모함을 하시다뇨. 사람들 앞에서 모, 모욕을…….”
“됐고. 그럼 영상을 보고 나서 다시 얘기합시다.”
찝찝한 기색으로 디렉터와 하경민을 번갈아 쳐다보던 팀장이 물었다.
“혹시 증거 영상이라도 있는 겁니까?”
“보면 알 겁니다.”
디렉터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디렉터의 등 뒤에 있는 프로젝터에 빛이 들어왔다.
미리 노트북에 연결해 뒀었는지, 디렉터가 노트북을 몇 번 두드리는 거로 금세 영상이 켜졌다. 틀어진 영상은 내가 예상했던 그 영상이었다.
[내, 내가 못 할 말 한 건 아니잖아. 걔들도 내가 버그 쓴 걸 알 텐데…….]
[야. 내가 돈도 빌려줘, 무기도 줘, 버그도 알려 줘,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아니, 뭔…….”
영상에 선명히 찍힌 하경민의 얼굴과 대화 내용을 들은 팀장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찬가지로 영상을 본 하경민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