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나를 노리고 쏟아지는 여러 공격을 피하거나 카운터 스킬로 쳐 내며 서정연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노퓨쳐는 사칭범을 지키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울 가능성이 커요.
-제일 뒤로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아뇨.
서정연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모를까, 노퓨쳐는 지금 자기네들이 이길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서 당당하게 행동할 거예요.
-흐음.
현재 사칭범은 노퓨쳐가 구해 준 좋은 무기가 있고, 버그도 배워 둔 상태였다.
또한 우리가 이미 버그 악용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자기들이 이길 거라고 쉽게 확신하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서정연의 설명을 들은 나는 입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우리도 그에 맞춰서 몇 명 정도는 준비시켜 두는 게 좋겠는데. 주변에 있는 놈들을 치워야 노퓨쳐랑 사칭범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그보다는 전 도해준 씨가 걱정이에요.
-응? 나?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손을 뻗은 서정연이 눈꼬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무리 시선을 집중시킨다고 해 봤자 결국 일반 길드원일 뿐이에요. 길전에서 이기려면 길마를 잡아야 하는 거 도해준 씨도 잘 알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제가 요일 길드 편에 서서 모습을 드러내면 위기감을 느낀 노퓨쳐가 어떻게든 도해준 씨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상관없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해 주는 서정연의 모습이 감동적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라고 느껴졌다.
단순히 내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1년이 넘도록 어나더 길드와 시도 때도 없이 길드 전쟁을 하면서 내가 제일 크게 깨달은 것은,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할 수 있는 플레이에 한계가 있다는 현실이었다.
당연히 나라도 노퓨쳐와 사칭범이 어나더 길드원들을 데리고 다 같이 덤벼들면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다굴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딴 속이 훤히 보이는 전략에 속 편히 당해 줄 생각도 없었다.
카강!
창날을 쳐 내자 오른편에서 스킬이 날아왔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 바로 옆에서 따라오던 서정연이 나 대신 스킬을 받아쳤다.
내가 어떤 스킬을 썼는지, 회피기가 남아 있는지, 무슨 공격을 맞으면 위험한지, 내가 서정연의 스킬 타임라인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것처럼 서정연도 내 스킬 타임라인을 모두 지켜보며 적절한 타이밍에 나를 도와줬다.
서정연뿐만 아니라 내 뒤를 따라오는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이골이 나도록 PVP를 하고, 나와 호흡을 맞춰 온 사람들이었다.
노퓨쳐가 나를 죽이기 위해 어나더 길드원을 여러 명 끌고 온다면, 나도 내 편을 데려가면 된다. 그렇게 서로가 합을 맞춰서 부딪혔을 때.
‘이기는 건 반드시 우리다.’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타다닥, 키보드 위에 손이 춤을 추듯 경쾌하고 빠르게 움직이자 스킬 쿨타임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창술사의 스턴기를 회피기로 흘려보내며 공격 스킬을 꽂아 넣었다. 봉에 배를 얻어맞은 적 캐릭터가 공중을 휙 날았다가 땅에 처박혔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체력의 절반이 사라졌다.
경직 때문에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적 창술사를 뒤따라온 좋은날씨가 대신 마무리해 줬다.
【폭풍처럼 강하게, 템페스토소!】
음유시인인 여여랑의 외침에 우리 몸을 감싸고 있던 새파란 빛이 초록색 빛으로 변했다.
공격력 강화 버프를 받고서 노퓨쳐와 사칭범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나더 길드원들을 거침없이 치워 내며 나아갔다.
나와 서정연이 함께 돌진기를 사용했다. 푸른 검과 붉은 봉이 동시에 앞으로 쏘아졌다.
【아아악!】
노퓨쳐와 사칭범을 막고 서 있던 마지막 어나더 길드원이 대미지를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마땅한 탱커가 없고, 장비까지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우리가 공격하는 대로 우르르 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내게 죽은 라임나무의 판단이 여기서도 좋게 작용한 셈이었다.
“지금!”
나는 마지막 어나더 길드원이 죽는 것을 보자마자 외쳤다. 계속 이 타이밍만을 기다려 온 유진호가 그 신호를 듣고 미리 시전해 둔 마법 스킬을 노퓨쳐와 사칭범에게 떨어트렸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노퓨쳐와 사칭범 사이에 있는 바닥이 금이 가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커다랗게 생긴 균열은 이내 땅과 땅 사이를 갈라놨고 뜨거운 용암이 치솟았다.
용암 위를 지나가는 캐릭터에게 화상을 입혀 도트 대미지가 들어가는 CC기 스킬이었다.
이거로 노퓨쳐와 사칭범을 떨어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노퓨쳐 앞에는 내가, 사칭범 앞에는 서정연이 마주 섰다.
【즐겁게, 더 강하게! 크레센도!】
여여랑이 궁극기를 사용했다. 공격력과 공격 속도, 스킬 대미지가 대폭 상승한 것을 느끼며 나는 망설임 없이 노퓨쳐를 향해 달려들었다.
치잉!
건슬링어인 노퓨쳐가 다급히 총을 들어 올렸다.
공격 속도를 높이는 강화 스킬을 사용했는지, 특유의 효과음이 나고 총구에 은색 빛이 감돌았다. 그걸 본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 진짜…….’
타앙, 옆으로 회피기를 쓴 노퓨쳐가 총을 쏘자 은으로 된 탄환 세 개가 내게 날아들었다.
‘존나 못하네.’
노퓨쳐가 강화 스킬을 쓰든, 내 공격을 피해서 반격하든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막말로 지금 이 상황에서 노퓨쳐가 버그가 아닌 핵이라도 써서 공격 속도를 10배로 높였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었다.
팍, 일부러 쳐 내지 않고 내버려 둔 탄환 하나가 어깨에 박히며 피가 튀어 올랐다. 타격 효과로 화면이 붉게 번쩍였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노퓨쳐를 향해 봉을 휘둘렀다.
빠악!
횡으로 그어진 봉에 상체를 얻어맞은 노퓨쳐가 공중을 휙 날았다가 곧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건슬링어 스킬을 맞은 나와 강화 평타를 맞은 노퓨쳐. 서로 사이좋게 한 대씩 교환했지만 나는 체력의 10% 정도가 깎였고, 노퓨쳐는 절반 조금 안 되게 깎여 나간 상태였다.
이래서 상관없다는 거다.
노퓨쳐가 정말로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면 포지션을 더 뒤로 잡아야 했고, 내가 여기까지 접근하기 전에 궁극기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강한 공격을 해 뒀어야 했다. 그게 근딜을 상대하는 원딜의 기본이었다.
이렇게 허접한 놈한테는 화려한 스킬을 써 줄 필요도 없었다. 나는 회피기를 써서 도망가려고 하는 노퓨쳐의 뒤를 끝까지 따라붙어서 쉬지 않고 평타를 썼다.
빠악, 퍽, 퍼억! 콰직!
매타작하는 소리와 함께 봉이 휘둘러질 때마다 노퓨쳐의 체력이 확확 깎여 나갔다.
제대로 된 대처는 물론이고 그럴싸한 반격조차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처맞기만 하는 노퓨쳐의 꼴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잊고 있던 분노가 치솟았다.
‘직업 간에 상성도 모르는 새끼가.’
그간 서정연의 뒤에 숨어서 혜택이란 혜택은 다 받아 처먹어 놓고 배신까지 해? 좆같은 짓을 할 거면 혼자 할 것이지, 사칭범을 내세우면서 애꿎은 서정연의 닉네임이 자꾸 오르내리게 만들어?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빡쳤다. 치미는 분노를 손가락에 담아서 열심히 마우스를 누르자 내 캐릭터도 그에 맞춰서 더 힘차게 봉을 휘둘렀다.
빡! 콰직, 퍽! 퍼억!
그사이, 어나더 길드원들을 어느 정도 처리한 길드원들이 날 구경하며 한마디씩 했다.
[길드] sky004: ㄹㅇ찰지게 패시네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여여랑: 이날만을 기다려온 사람ㄷㄷ
[길드] 불좀켜줄래: 몬데몬데
[길드] 좋은날씨: 일욜님이 노퓨쳐 개패고 있음
[길드] 류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류페: 나도 보고싶다
[길드] sky004: 내가 지금 녹화중ㅇㅇ
[길드] 아스타로트: 굿
[길드] 좋은날씨: 노퓨쳐는 처맞을만하지
[길드] rxrx78: ㅇ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