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이런 미친.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고, 좋아서 팔에 힘이 절로 빠졌다. 나는 팔을 굽히고 쓰러지듯 서정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너 진짜… 아…….”
저런 적나라하고 야한 말을 하는 건 서정연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란 말인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땀이 날 정도로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정연이 내 귀를 만지작거리며 자꾸 재촉했다.
“빨리요, 도해준 씨.”
“…….”
“도해준 씨?”
“그만 좀 불러…….”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공평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서정연은 어째서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거지?
시종일관 여유롭고 느긋한 서정연의 태도가 갑자기 엄청 얄밉게 느껴졌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 마음을 굳게 먹고 시선을 들자 나를 보고 있던 서정연과 금방 눈이 마주쳤다. 이 와중에도 서정연은 계속 내 귀를 매만지고 있었다.
아까는 입술을 쓸던 엄지손가락이 이제는 내 귓불을 쓸고 꾹 눌러 왔다. 귀를 지분거리는 손길을 내버려 둔 채로 고개를 숙여 서정연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쪽,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살결과 함께 좋은 향기가 확 풍겨왔다. 쪽쪽, 웃을 때면 휘어지던 눈꼬리에 이어서 새하얀 뺨에도 입을 맞춘 나는 마지막으로 서정연의 입술을 핥았다.
얌전히 입맞춤을 받던 서정연이 제 입술을 핥아 오는 내 혀를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한 손으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서정연의 눈가를 가리며 깊게 키스했다.
혀끼리 비벼지는 감촉이 소름 끼칠 만큼 좋았다. 내 혀를 빨아 당겨서 잘근거리며 씹던 서정연이 이번에는 제 혀로 내 입천장을 문질러 왔다. 서정연의 눈가를 덮고 있던 손끝이 절로 움찔 떨렸다.
추읍, 쵹, 잔뜩 질척한 소리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정신없이 키스하던 나는 혀에서 번지는 아릿함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윽, 잠깐만…….”
빨아 준다더니, 이 정도로 아프게 하는 거냐고. 어이없어서 한 소리 하려던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서정연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 아래로 드러난 서정연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키스하기 전에는 새하얗더니. 나만큼이나 흥분한 티가 나는 지금 이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몽롱한 시선으로 눈을 깜빡이는 서정연에게 말했다.
“너무 강해서 아프잖아.”
“아파요? 어디 가요?”
“혀.”
“…왜요?”
“왜냐니. 네가…….”
설명하려던 나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차마 서정연이 했던 것처럼 혀를 빨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말을 뱉어 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슬쩍 돌리자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서정연이 다시 내 목에 두 팔을 감으며 실실 웃었다.
“내가?”
“…….”
“내가 너무 혀를 강하게 빨아서? 그래서 아프다고요?”
“조용히 해…….”
“이번에는 조절해 볼 테니까 한 번만 더해요.”
지치지 않고 졸라 오는 모습에 서정연을 타박하던 나도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집에 언제 가려고? 이러다 날 다 지겠네.”
“그럼 제가 여기서 자고 가죠, 뭐.”
“이 좁은 침대에서 둘이 어떻게 자려고.”
“응? 난 침대에서 같이 잔다고는 안 했는데?”
이 와중에도 장난을 걸어오는 서정연에게 키스 대신 뺨에 뽀뽀하며 물었다.
“내 집에서 자는데 나랑 같은 침대 안 쓰면 어디서 자려고. 바닥?”
“그거야 내 마음이죠.”
“안 돼. 정이 놔두고 우리끼리 여기서 자면 어떡하냐.”
“그러니까 도해준 씨.”
내 턱을 붙잡아 입술 쪽으로 끌어당긴 서정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빨리 해 줘요. 해지기 전에 한 번 더 하고 가게.”
“어휴…….”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솔직히 설렜다. 나는 더 사양하지 않고 서정연에게 다시 깊게 입을 맞췄다.
***
“굳이 버그 수정을 다음 주로 미룬 건, 어쩌면 저 버그를 우리가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요.”
서정연이 건네주는 와인 잔을 받아서 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버그를 이용한다고? 블레이드 버그를 우리가 쓰겠다는 건 아닐 거고.”
“당연하죠. 쓰레기 잡으려고 우리가 쓰레기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와인 오프너로 순식간에 코르크 마개를 빼낸 서정연이 내 잔에 와인을 따라 줬다.
“비상계단에서 노퓨쳐가 그랬잖아요? 다음번 길전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기억나.”
“우리가 먼저 길드 전쟁을 거는 거예요. 저번처럼. 내일 바로 신청하면 주말에 할 수 있잖아요.”
“나야 상관없긴 한데… 이번엔 우리가 정말로 불리할 수 있어.”
잔에 채워지는 연한 노란빛 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블레이드 버그는 알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노퓨쳐가 게임사 직원이니까 다른 버그를 더 알아 올 가능성이 있어.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다른 길드원들은 블레이드 버그조차 모르고 있잖아. 한번 당하기 시작하면 금방 기세가 밀릴 거야.”
“이해해요. 여러 유저가 뒤엉켜서 싸우는 길전은 수많은 변수가 생겨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죠.”
“그래. 저번 길전도 수월하게 이긴 건 너랑 내가 부캐로 어나더에 잠입해서 정보를 알아낸 덕분이었잖아.”
나는 시선을 내려 내 곁에 배를 드러낸 채로 잠들어 있는 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신나게 산책을 다녀오고 나서 내가 사 준 장난감을 한참 갖고 놀던 정이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이번에 사칭범은 버그에다가 새로운 무기까지 꼈어. 그리고 우리가 지난번에 썼던, 사칭범을 아예 무시하겠다는 계획도 두 번 통하진 않겠지.”
“맞아요.”
“네가 이런 부분들을 모를 리 없고.”
나는 턱을 괴며 서정연을 향해 씩 웃었다.
“뭘 하고 싶은 건데?”
노퓨쳐와 사칭범의 대화를 생각했을 때, 우리가 디렉터를 만나서 다음 주에 이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하지 못했다면 어나더 측에서 먼저 길전을 걸어왔을 거다.
지난 1년간 어나더에서 걸어오는 전쟁은 한 번도 거절한 적 없었으니 우리는 당연히 받아들였을 거고. 그리고 노퓨쳐가 알아본 버그 악용으로 피해를 크게 봤겠지. 최악의 경우, 저 허접들한테 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빠르게 해결되기를 바랐는데… 서정연이 이렇게 나온다면 믿고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도해준 씨. 예전에 저한테 그랬잖아요.”
나를 따라 비슷한 미소를 지은 서정연이 말했다.
“본캐로 요일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냐고.”
“……!”
“저한테 오면 잘해 주겠다고 호언장담도 했죠?”
“뭐? 무슨… 잠깐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발언에 당황한 내가 대답하기 전에 서정연이 이어 입을 열었다.
“손도 잡으면서 길드 들어오라고 막 꼬셨잖아요. 어떻게 잘해 준다고 했더라? 퀘스트 깨는 거 도와주고 레이드 자리 꼭 비워 준다고 했던가?”
“아니, 그…….”
“그 말 지켜야 해요?”
제 잔에도 와인을 채운 서정연이 눈꼬리를 접으며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채앵,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려 봐! 너… 진심이야? 길드에 들어오겠다고? 심지어 본캐로?”
“네에.”
“그… 그러면…….”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이마를 쥐어 싸매고 재빨리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물론 지금도 서정연은 내 길드에 들어와 있긴 하지만,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휘일비 캐릭터고. 본캐인 흔적이 오는 건 얘기가 다르다.
흔적. 블레이드 종결 무기에 어마어마한 가격의 장비들로 떡칠해 둔 미친 계정. 기껏해야 20위 안팎을 넘나들던 노퓨쳐의 길드를 1년 만에 서버 2위로 끌어올려 우리 길드와 비등비등하게 싸우게 만든 실력자. 나만큼이나 대미지와 게임 센스가 뛰어난 귀한 근딜!
서정연이 본캐로 내 길드에 들어온다면 어나더와의 길전 따위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두세 달 뒤에 업데이트된다는 새 레이드 퍼클도 노려 볼 수 있다!
상상하면 할수록 너무 좋았다. 나는 흥분과 설렘으로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느끼며 서정연에게 다급히 물었다.
“진짜로? 진짜 우리 길드 들어올 거야? 본캐로?”
“네.”
“언제? 내일 바로?”
“…….”
“나 유진호랑 잠깐 통화 좀 해도 돼? 이 소식을 당장 알려야…!”
“진정해요, 도해준 씨.”
들썩거리는 내 어깨를 힘줘서 꾸욱 내리누른 서정연이 어딘가 찝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너무 좋아하니까 뭔가 좀…….”
“이제 와서 말 바꾸면 안 된다?”
“현실의 저도 이렇게 좀 반겨 주면 얼마나 좋아요?”
서정연이 씁쓸한 눈빛으로 내게 한 소리 했다. 그 타박에 어쩐지 양심에 찔린 나는 재빨리 변명을 쏟아 냈다.
“무, 무슨 소리야. 어딜 봐도 현실의 너를 더 좋아하지. 아니, 근데 말이 좀 이상하다? 흔적도 현실의 너도 너잖아. 난 둘 다 좋아할 뿐이야.”
열심히 핑계를 대 봤지만 서정연의 씁쓸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젠장.
“아무튼… 도해준 씨가 길전에 대해서 걱정하는 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저와 도해준 씨가 함께 문제의 놈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봐요.”
“음, 확실히 해 볼 만하지.”
“사칭범부터 빠르게 처리하는 게 관건일 텐데, 사실 이건 별로 걱정 안 되네요. 도해준 씨는 이미 버그 쓰는 사칭범을 이긴 전적도 있으니까.”
나와 시선을 맞춘 서정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짙게 웃었다.
“기대되네요, 제가 복귀할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