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관계자들을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화창한 햇살이 우리를 비췄다.
행사장에 들어가서 디렉터를 만나고,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나누기까지 기껏해야 4시간도 걸리지 않았는데도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고생 많았어요, 도해준 씨.”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챙을 조금 들어 올린 서정연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그의 기다란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가장 중요한 일을 성공적으로 끝냈네요.”
“너도 고생했어.”
그래도 끝내 놓으니까 속은 시원했다. 어나더 길드에게 한창 괴롭힘을 당할 때 제재 요청을 모조리 씹는 게임사 때문에 스트레스 장난 아니었는데.
“그보다 마지막에 왜 주말 지나고 나서 해 달라고 한 거야?”
“음, 그건 이따가 설명해 줄게요. 들어 보면 도해준 씨도 분명 찬성할 거예요.”
내가 분명 찬성할 거라고? 뭐길래 저러지? 어차피 관계자들과 얘기는 이미 끝났고, 서정연이 하고 싶다면 군말 없이 해 주려고 했으니까 뭐든 상관은 없지만.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더 할 건 없으니 돌아가서 삐져 있을 정이 달래 주고 산책도 시켜 주고… 아, 장난감이나 사다 줄까.
차 조수석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매며 정이를 떠올렸다.
우리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육포를 맛있게 먹던 정이의 작고 귀여운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 양심 아파.
역시 맨손으로 돌아가는 건 좀 그렇겠지. 뭐라도 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야 강아지를 키워 본 적도 없고 정이랑 알고 지낸 지도 얼마 안 됐으니 정이 주인인 서정연에게 물어보려고 고개를 막 돌린 그때였다.
쪽!
나와 마찬가지로 운전석에 앉은 서정연이 먼저 안전벨트를 매고서 냉큼 뽀뽀를 해 왔다.
쪽쪽,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린 내 입술에 몇 번이고 더 뽀뽀한 서정연이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이 웃었다.
“하, 아까부터 참느라고 죽을 뻔했어요.”
“…나는 지금 너무 놀라서 죽을 뻔했는데.”
기가 막혀서 넋을 놓은 사이에 서정연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파라락 털고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모습인데도 얼굴 때문인지 무슨 화보 찍는 배우 같았다.
머리를 대충 매만진 서정연이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면 일단 도해준 씨 집으로 갈까요?”
“어, 뭐?”
“오늘 자고 간다고 했잖아요. 도해준 씨 집부터 먼저 가서 옷 챙기고 우리 집에 가면 되겠어요. 그렇죠?”
“진짜 오늘도 자고 가라고?”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차가 신호에 걸려서 멈춘 사이에 서정연이 잔뜩 서럽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도해준 씨가 너무 좋고… 같이 있고 싶은데… 도해준 씨는 자꾸만 집에 가려고만 하고…….”
“아니, 내가 언제… 계속 네 집에서 잘 순 없잖아!”
“이제 겨우 이틀째잖아요. 우리 오늘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벌써 헤어질 생각하는 도해준 씨 때문에 저 정말 섭섭해요.”
“헤어진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쓰지 말아 줘…….”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서정연이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내렸다. 잔뜩 시무룩해진 모습에 나는 다급히 변명을 쏟아 냈다.
“싫다는 게 아니라, 나도 물론 좋긴 한데, 그, 혹시라도 네가 불편할까 봐 그러지.”
“저 하나도 안 불편해요.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데 손님이 와 있으면 당연히 불편하지 않냐.”
“손님이요?”
운전하느라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서정연이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손님이랑 입술 비비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해준 씨는 집에 초대한 손님이랑 입술 비벼요?”
“뭐?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냐.”
“저도 그래요. 그러니까 도해준 씨.”
서정연이 내비게이션 화면을 툭툭 두드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 주소 좀 찍어 봐요.”
“…….”
웃는 얼굴에서 어딘가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난 얌전히 내비게이션에 내 집 주소를 등록했다.
***
집 앞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가서 옷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차 시동을 끄며 서정연이 내게 물었다. 마주친 새까만 두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엄청 좁을걸. 정리를 못 해서 지저분하기도 하고.”
“괜찮아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연은 벌써 몇 번이고 날 집에 데려가 줬는데, 나도 공평하게 데려가 줘야겠지.
어제 나가기 전에 집 상태가 어땠었는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2층이라서 탈 필요는 없었다.
“들어와.”
현관문을 열며 손짓하자 서정연이 얌전히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서정연의 집에서 하루 자고 올 걸 대비해서 집 정리를 대충이나마 해 둔 상태라 심하게 지저분하진 않았다.
서정연이 방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구경할 것도 없을 텐데.
내 자취방은 흔히 볼 수 있는 원룸이었다.
한쪽 구석에 침대가 있고, 그 바로 옆에는 책상과 컴퓨터가 놓여 있다. 반대편 주방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고 중간쯤에는 욕실이 있었다.
한마디로 서정연의 집과 달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볼만한 구석이 없는 곳이었다. 옷장을 열며 서정연에게 말했다.
“오래 안 걸릴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아무 데나 앉아도 돼.”
“천천히 해요.”
서정연이 옷을 찾는 나를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겨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사이에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옷을 찾아서 하나씩 집어 들었다.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만 더 자면 되니까 밤에 입을 간편한 옷과 속옷, 내일 알바 갈 때 입을 옷만 챙기면 됐다. 옷 외에 필요한 건 다 서정연 집에 있으니 가져갈 필요 없고.
‘새삼 엄청 편하네.’
옷 몇 벌만 서정연의 집에 갔다 두면 언제든 놀러 가서 자도 상관없다는 거잖아?
문득 든 생각에 스스로가 어이없어진 동시에 설레서 심장이 뛰었다. 이거 완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꼴이었다.
“크흠, 다 됐어. 이제 가자.”
머쓱함에 괜히 헛기침하며 말하자 침대에 앉은 채로 나만 뚫어져라 응시하던 서정연이 입을 열었다.
“도해준 씨.”
“어.”
“이리 와 봐요.”
옷을 집어넣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 두며 서정연을 돌아보자 녀석이 나를 향해 양팔을 활짝 펼쳤다.
‘뭐지? 혹시 안아 달라는 건가?’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서정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아 달라는 게 맞다는 뜻이었다.
조심스럽게 녀석의 앞으로 걸어가서 상체를 숙여 끌어안았다. 그러자 나를 마주 안은 서정연이 그대로 몸을 뒤로 휙 기울여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으앗.”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누운 서정연 때문에 그대로 서정연의 몸 위로 쓰러졌다. 어차피 침대에 누운 서정연의 몸 위라서 하나도 아프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뭐야?”
“좋아서요.”
서정연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웅얼거렸다.
“여기 들어오니까 도해준 씨 냄새가 가득해서.”
“…….”
귓가에 속삭이듯 나온 말과 어깨에 흐트러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목덜미로 열기가 확 치솟았다.
아니, 이런 말을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지? 창피하지도 않나?
급격하게 뛰어오르는 심장에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잘근거리자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서정연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심장 뛰는 거 봐. 끌어안고 있으니까 다 느껴지네.”
“…….”
“그렇게 부끄러워요? 내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시끄러워…….”
정확한 지적에 뺨으로 한층 더 열기가 몰렸다.
이러고 있다간 심장 터지겠다 싶어서 우선 맞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누워 있는 서정연의 얼굴 옆에 손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키자 서정연이 이번에는 내 목에 양팔을 둘렀다.
‘잠깐, 이거 자세가……?’
이쯤 되자 나도 더는 모를 수가 없었다. 아래에서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던 서정연이 짙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도해준 씨.”
내가 평소에 덮는 이불 위에 누워서 예쁘게 웃는 서정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키스해 줘요.”
“…너 처음부터 이거 노린 거지?”
사람이 너무 설레고 좋으면 현기증이 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느끼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묻자, 서정연이 가증스럽게도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안 해 줄 거예요?”
“아니, 그…… 읏!”
미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 힘이 내 턱을 움켜잡았다. 내 얼굴을 코앞까지 끌어당긴 서정연이 낮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그럼 내가 하지, 뭐.”
“…….”
“혀 내밀어 봐요, 도해준 씨.”
서정연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쓸어 만졌다. 입술이 쓸리는 감촉에 내가 잠시 넋이 나간 사이, 서정연이 이어 말했다.
“빨아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