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106)화 (108/132)

106.

나는 분위기가 달라진 회의실을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영상이 찍힌 장소는 보시면 알겠지만 이 건물 비상계단입니다. 회의실에 오기 전, 저희가 실제로 목격하고 찍은 영상이죠.”

“설마 우연히… 저 두 사람이 얘기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원래는 바로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는데… 저 사람들이 버그 얘기를 하더군요.”

“으음…….”

“영상에 얼굴도 제대로 찍혔으니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죠. 저 두 명이 게임사 직원이 맞나요?”

그 질문에 디렉터가 잠시 눈치를 보다가 개발팀 팀장을 바라봤다.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개발팀 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저도 잘 아는 직원은 아닙니다만, 회사 오가면서 몇 번 보긴 했습니다. 회의도 했었고.”

개발팀 팀장이 가리킨 건 노퓨쳐로 추정되는 살집 있는 남자였다.

“제 기억으로는 QA팀 직원이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하경민이라고 했던가? 아마 맞을 겁니다. 계약직이고.”

“옆에 남자는요?”

“저 사람은… 글쎄요. 저도 모르는 얼굴인데.”

난색을 보이는 개발팀 팀장 옆에 앉아 있던 GM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옆에 사람은 친구이지 않을까요? 자세히 보니까 행사장 명찰을 달고 있는 것 같은데.”

“직원들한테도 지인 초대하라고 초대장 하나씩 줬으니까. 그거 받고 왔나 본데?”

“근데 여기 건물에까지 데려왔을 줄은… 큼, 여러모로…….”

디렉터가 말끝을 얼버무리며 불편한 티를 냈다. 나와 서정연이 있는 자리라서 대놓고 직원에게 뭐라고 하진 못하지만, 세 명 다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 우리야 좋지.

영상을 공개한 후의 반응이 예상보다 강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진심이야 어찌 됐든 외부인인 우리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테니까.

“원하시면 아까 보여 드린 게임 영상부터 이 영상까지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도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우선 방금 말했던 QA 팀 계약 직원의 아크로드 계정 닉네임입니다.”

나는 영상이 띄워진 스크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보여 드린 게임 영상과 이번에 찍은 영상에서 나온 대화로 미뤄 봤을 때, 버그를 악용한 유저와 저기 있는 두 사람이 겹치는 게 확실합니다. 버그를 사용한 블레이드가 행사에 초대된 지인이고, 그걸 알려 준 직원이 블레이드가 소속된 길드의 부길마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설명 초반에 특정 길드에서 PVP를 걸어왔다고 하셨죠. 저 두 사람 모두 그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겁니까?”

“네. ‘어나더’ 길드의 현 길마와 부길마입니다. 직원이 부길마고요.”

“잠시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던 GM이 물었다.

“제가 알기로 어나더 길드는 예전부터 그… 도해준 님이 관리하는 길드와 전쟁해 온 길드이지 않나요? 이번 같은 문제는 처음 발생한 건가요?”

“아, 그건…….”

나는 대답하기 전에 서정연을 돌아봤다.

GM이 저런 궁금증을 갖는 건 당연했다. 이들은 영상 속에 ‘heunJeok’이 서정연의 계정인 ‘heunjeok’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아직 사칭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니 오해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걸 설명하려면 서정연의 사칭 문제 또한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관계자들에게 사칭 문제를 말해도 될까? 만약 서정연이 불편하면 이 문제는 될 수 있는 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었다.

내가 자신의 기분을 살핀다는 걸 바로 알아챈 서정연이 빙긋 웃었다.

“난 괜찮아요.”

“…….”

정말 괜찮은 건지, 지금 상황에서 마지못해 허락하는 건지 모르겠다. 관계자들 다 보는 앞에서 길게 대화할 수 없으니 답답하네.

한숨을 삼켜 낸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제 길드와 지난 1년간 길드 전쟁을 해 온 상대 길드가 저 어나더인 건 사실입니다. 근데 그때와는 길드 멤버도, 길마도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예? 어, 하지만 제가 알기로…….”

“네. 흔적이라는 유저가 어나더 길드 길마죠. 혹시 세 분은 저 계정이 한 번 삭제됐다가 복구된 걸 아십니까?”

“아, 음…….”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묘하게 변했다.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관계자들은 이렇다 할 확답을 주지 않았지만 이미 분위기만으로도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서제현은 게임사에 대체 무슨 짓을 해 둔 거야…….’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힐끔 바라본 서정연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표정이 아까보다 복잡했다.

“흔적 본 주인은 계정이 복구된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나더 길마와 저 영상에 찍힌 유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라고요? 근데 닉네임이…….”

“사칭입니다. 단순히 닉네임만 따라 한 게 아니라 이전 흔적과 동일 인물이라고 말하고 다니고, 저렇게 버그 악용까지 했으니… ‘사칭범’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죠.”

잠자코 내 말을 듣던 디렉터가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설마 도해준 님 옆에 계신 분이?”

“…네. 진짜 흔적입니다.”

역시 이렇게 되네.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관계자 세 명의 시선이 서정연에게 쏠렸다.

“아, 이분이…….”

“그…….”

“아아…….”

회의실 분위기가 한층 더 이상해졌다. 나는 눈물을 삼켜 내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진짜 무슨 짓을 한 거냐, 서제현…….’

제게 쏠린 시선에 서정연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지만, 평소 내게 짓는 미소와 달리 싸늘한 기운이 풍겼다. 이러다가 분위기만 더 개판이 되겠다 싶어서 급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희가 원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아까 말했듯이 영상 속 QA팀 계약직의 아크로드 계정 닉네임. 그리고 두 번째는 블레이드 스킬 버그 수정과 저 버그를 악용한 블레이드 유저의 계정을 정지시키고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려 주세요.”

“공지요?”

“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적어 주세요. QA팀 계약직이 버그를 유출했고, 그 계약직의 닉네임은 무엇이며, 어나더 길드의 길마가 버그를 악용했다는 내용 말입니다. 당연히 처벌도 확실히 해 주셔야 하고요.”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최종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과한 걸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킨 유저의 닉네임을 공개하고 처벌한다. 이건 아주 당연한 거였다.

“버그가 유출되기 전까지 저는 몇 번이고 어나더 길드의 비매너 플레이를 제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요청은 모조리 무시당했고 결국 버그 악용 피해까지 받았습니다.”

“…….”

“이 최소한의 제안마저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방금 보여 드린 두 개의 영상은 넘기지 않을 거고, 상황에 따라서 오늘 있었던 일을 다른 곳에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영상도 온라인상에 공개할 거고요.”

이어지는 내 말에 디렉터가 침음을 흘렸다.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쓸어 만지는 디렉터를 향해 나는 방금보다 유순해진 어투로 얘기했다.

“협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로 벌써 몇 개월간 고생했고, 여기까지 와서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이상은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아,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어찌 됐건 유출과 버그 모두 다 저희 문제니까요. 오히려 제보해 주셔서 감사하죠. 증거 영상을 주신다면 말씀하신 내용을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디렉터의 모습에 내심 초조하던 마음이 한결 놓였다.

‘증거 영상을 우리가 갖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 블레이드 버그만 조용히 수정하고 아무 일도 없던 척 넘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디렉터가 그 정도로 쓰레기에 철면피인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순진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고민하듯 눈썹 끝을 긁적이던 디렉터가 개발팀 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블레이드 버그 문제부터 해결할까요? 팀장님, 픽스하는 데에 얼마나 걸리죠?”

“사무실 가서 팀원들하고 한번 확인해 봐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바로는 어렵고, 적어도 며칠은 주셔야 합니다.”

“좋아요. 그럼…….”

“잠시만요.”

그때였다. 익숙한 음성이 디렉터와 개발팀 팀장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블레이드 버그 수정과 공지 글을 올리는 건 주말 지나고 나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자 서정연이 책상 아래에서 내 손을 가볍게 잡아 왔다. 손을 단단하게 잡아 오는 감각에 놀랐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됐다.

‘아무래도 서정연이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나 본데. 그래, 하고 싶다면 하게 해 줘야지.’

서정연의 말을 들은 디렉터는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 싶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이번 주는 행사 때문에 정신없으실 텐데. 버그 수정은 다음 주에 하시고, 대신 저 직원과 만날 자리를 한번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군요.”

어딘가 경직된 태도로 말하던 나와 달리 서정연은 목소리 자체에 여유가 가득했고, 어딘가 묘하게 강압적인 느낌을 풍겼다.

디렉터가 의견을 구하기 위해 개발팀 팀장과 GM을 바라봤다. 자신은 뭐든 상관없다는 GM에 이어서 개발팀 팀장도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만 넉넉하면 저희야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두 분이 사건의 피해자인데, 만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다음번 만남은 강남에 있는 저희 회사 건물로 오셔야 하는데, 두 분 어떻습니까?”

“알겠습니다.”

“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시기 전에 핸드폰 번호 알려 주시면 저희 쪽에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지갑을 꺼내 든 디렉터가 명함 한 장을 뽑아서 내게 건네줬다.

나도 화답하는 의미로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려고 했는데, 서정연이 먼저 자기 번호를 말해 버리는 바람에 내 번호는 알려 줄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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