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105)화 (107/132)

105.

비상계단을 빠져나온 우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시간을 오래 보낸 건 아니라 그런지, 아직 회의실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실 중앙에 있는 큰 책상으로 걸어가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아까 찍은 영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혹시 모르니 따로 백업해 놨다.

“증거 영상으로선 정말 좋지만 개인적으로 쓰지는 못할 거예요.”

엄연히 따지면 일반인을 몰래 찍은 영상이었으니 당연했다.

이걸 게임 커뮤니티에 올리거나 다른 유저들에게 보여 주는 건 어렵고, 지금 여기 회의실에서 관계자들에게 보여 주며 증거 영상으로 제출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거로도 충분해.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하네. 이런 곳에서 노퓨쳐랑 사칭범을 마주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흠, 제가 보기엔 노퓨쳐는 도해준 씨가 오는 거 알고 있었을 것 같아요.”

팔짱을 낀 서정연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것만으로도 서정연이 지금 엄청 불쾌한 상태라는 게 확 티가 났다.

“명찰을 달았다고 해도 행사장에 수십 명이 돌아다니는데, 그중에서 도해준 씨를 바로 발견하고 쫓아다녔다는 건… 처음부터 사람들의 명찰을 일일이 확인했다는 거고. 그건 결국 특정 사람을 찾아다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다른 때였으면 노퓨쳐가 굳이 날 보려고 했다는 걸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아까 얘기한 거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나에 대해서 떠드는 말에 적대감이 너무 뚜렷하게 담겨 있던 탓에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까 계단에서 본 남자가 정말 노퓨쳐고 여기 직원이라면… 내가 행사장에 들를 거라는 정보쯤은 쉽게 알 수 있을 만하지. 게임사 측에서 먼저 각 서버 1위 길드의 길마한테 초대장을 보냈으니.”

나는 입가를 매만지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건넸다.

“서정연, 그럼 너도 노퓨쳐를 실제로 본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거야?”

“그렇죠. 애초에 노퓨쳐 길드에 들어간 이유가 도해준 씨랑 제대로 싸우려고 들어간 거여서.”

“이유가 뭐 그러냐…….”

그 대답에 2년 전 서정연과 처음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공팟에서 만났을 텐데. 실력이 워낙 좋아서 인상 깊게 봤던 터라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게다가 서정연이 또라이처럼 굴기도 했고. 생판 남인 나한테 대뜸 시비를 걸었으니까.

‘새삼 신기하네. 이상하기도 하고.’

서정연은 그때 왜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걸까?

서정연이 정상과는 살짝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남한테 막무가내로 시비 걸고 다니는 성격은 절대 아닌데. 이제까지 서정연의 행동을 고려해 보면 상대가 먼저 자길 건들지 않으면 본인도 딱히 시비를 걸진 않았다.

역시 이해하기 어려워서 서정연에게 물어보려고 입을 막 열려던 그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아까 봤던 디렉터가 다른 두 명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여긴 개발팀 팀장님이고, 이쪽 분은 아까도 만났었죠? GM팀 대표로 와 줬습니다. 두 분 다 실제로 게임을 관리하고 있으니 저보다 설명을 훨씬 잘 이해해 줄 겁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마스크를 벗으며 관계자들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아 악수했다.

“그러면 우선 이렇게 다섯 명이 얘기 나눠 볼까요?”

인사가 끝나자 우리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한 디렉터가 자신도 중앙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음, 일요일 님?”

“도해준입니다.”

“좋아요. 도해준 님, 아까 들은 바로는 저희 게임 버그가 ‘유출’됐다고 하셨었는데요.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디렉터의 요청에 회의실에 앉아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그 속에서 나는 설명을 시작하기 전, 옆에 앉아 있는 서정연을 잠시 바라봤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정연의 검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굳이 말을 듣지 않아도 서정연이 날 응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속으로 천천히 심호흡한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저희 길드는 ‘어나더’ 길드 유저들과 필드 PVP를 하게 됐습니다. 협의된 PVP가 아니라 상대가 일방적으로 싸움을 걸어온 PK에 가까웠죠.”

회의실 내부에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내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설명하면서도 의외라고 느낀 건, 디렉터를 포함해서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 세 명이 내 설명을 진지한 태도로 들어 주고 있다는 거였다.

대놓고 무시하진 않더라도 이렇게 진지하게 들어 줄 거라는 기대까진 안 했는데. 뭐, ‘유출’이라는 단어가 가진 효과가 큰 거겠지만.

“상대 유저가 블레이드 버그를요?”

“블레이드 스킬 중에 ‘파훼 태세’라는 스킬을 사용했을 때, 상대방이 카운터 스킬을 쓰면 발동되는 버그입니다. 1초에서 2초 정도 화면이 멈춘 다음에 사망하는 버그죠.”

“흠.”

“다만 이건 카운터 스킬을 쓴 사람의 화면이 그런 거고, 아마 블레이드는 상대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거로 보일 겁니다.”

버그로 인한 프레임 드랍이 발생해서 화면이 멈춘 사이에 사칭범은 편하게 공격을 성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버그 악용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개인이 가진 실력으로 정당히 싸워야 할 PVP가 버그 하나로 엄청나게 불합리한 콘텐츠가 되어 버리는 거니까.

“아까 행사장에서 제게 챙겨 온 영상이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게 버그가 찍힌 영상인가요? 여기에서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상이 담긴 USB를 건네주자 개발팀 팀장이 노트북을 프로젝터와 연결한 다음,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유진호가 찍은 영상이 모두 앞에서 재생됐다. 사칭범과 전투가 이어지고, 마지막에 카운터 스킬을 시전한 타이밍에 화면이 멈추고 그 직후에 죽는 거까지.

영상을 보던 관계자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카운터 스킬이 아예 발동이 안 된 모양인데.”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단순히 화면만 멈추는 거라면 카운터에 스킬이 튕겨서 오히려 블레이드가 대미지를 받아야 정상이니까. 근데 또 카운터 스킬 시전 소리는 제대로 들리네요.”

“이거 블레이드 시점으로 확인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저 스킬 관련해서 버그 신고 들어온 거 아직 없어요?”

“없습니다. QA 팀에 확인해 보면 버그 자체 진행 상태는 알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음…….”

영상을 보고 직원들의 대화를 듣던 디렉터가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도해준 님. 영상도 잘 봤고 버그에 피해를 보신 부분도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저 정도의 버그라면 꽤 심각한 문제이고, 당장 해결이 필요한 버그인 게 맞습니다.”

“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거로는 ‘버그가 유출됐다’라고 확신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저 블레이드 유저가 유출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당연히 낮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저희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묻고 싶은 거요?”

내 말에 디렉터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럴 거다. 내가 ‘유출된 게 맞다’라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도리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까 저쪽 입장에선 어이없을 수밖에.

하지만 나와 서정연은 오로지 이때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나 다름없었다. 아크로드 관계자를 만나서 노퓨쳐와 사칭범의 정체를 알아낼 기회를 얻는 지금 이 순간 말이다.

나는 디렉터를 정확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디렉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버그를 우연히 알아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블레이드 직업 유저가 블레이드 스킬 버그를 알아내는 건 이상할 게 없으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입니다. 반대로 따져 보면 계획적으로 버그를 알아내서 그걸 악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에요. 결국 어느 한쪽의 증거가 확실히 있지 않은 이상 유출됐을 가능성과 우연히 찾았을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거야 당연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알아봐 주기를 부탁하려고 했습니다. 버그가 유출됐는지 아닌지 알아내는 건 평범한 유저인 제가 아니라 게임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

“전 여기까지 와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증거 영상을 넘겨주는 거로도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인 지적에는 개인감정이 조금 담겨 있었다.

우리 길드는 그동안 어나더 길드의 비매너 행동에 피해를 볼 때마다 여러 번 제재 요청을 보냈지만 모조리 무시당했다. 그 피해는 결국 버그 악용까지 왔고.

게임 직원이면서 버그를 멋대로 악용한 노퓨쳐와 사칭범이 일차적으로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게임사가 무고한 피해자인 건 아니었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는 우리 길드와 타인에게 닉네임을 사칭 당한 서정연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까 입장이고, 지금은 좀 다릅니다.”

“무슨 뜻이죠?”

“영상을 하나 더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핸드폰에 있는 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겨도 될까요?”

내 질문에 어딘가 넋을 놓고 있던 개발팀 팀장이 살짝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연에게 눈짓하자 서정연이 핸드폰을 꺼내서 아까 찍었던 영상 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버그 증거 영상을 보여 주던 스크린에 이번에는 아까 찍었던 두 남자의 말다툼 영상이 틀어졌다.

[내, 내가 못 할 말 한 건 아니잖아. 걔들도 내가 버그 쓴 걸 알 텐데…….]

[야. 내가 돈도 빌려줘, 무기도 줘, 버그도 알려 줘,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곧 길전 한 번 더 할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준비나 해 놔. 다음번 길전은 무조건 이겨야 해. 내가 쓸 만한 버그 더 있나 찾아볼 테니까.]

“허…….”

“으음…….”

2분도 채 되지 않은 영상이 진행될수록 회의실 분위기는 처참해져 갔다. 영상을 지켜본 관계자들이 저마다 앓는 소리를 내거나 난감한 기색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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