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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104)화 (106/132)

104.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놀란 와중에도 내 몸을 끌어안는 강한 힘에 속절없이 심장이 뛰었다.

“서정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는 모습에 등을 마주 안아 주며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서정연이 숨을 깊게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어떡하죠, 도해준 씨.”

“엉?”

“저 키스하고 싶어요.”

한탄하듯 나온 목소리에는 진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뭐? 아니, 지금 여기서?”

뜬금없이 왜 불이 붙은 거지? 그야 나도 아까 무대 뒤에서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에 차긴 했지만.

“안 돼요?”

“안… 되지, 여기서는. CCTV가 있을지도 모르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말이 횡설수설 나왔다. 사실 CCTV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랐다. 보통 비상계단에도 CCTV를 설치해 두던가?

“그리고 이제 회의실 가서 디렉터도 만나야 하잖아.”

“하아.”

한숨을 내쉰 서정연이 약간 짜증이 담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어요.”

“…….”

아까 내가 했던 생각과 똑같아서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공감도 가고.

나는 서정연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달래듯 말했다.

“오늘만 고생하면 사칭 문제도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잖아.”

“그렇죠…….”

“버그 악용했다는 증거 영상 바로 보여 주고, 노퓨쳐랑 사칭범이 정말 여기 직원인지 확인해 보고. 그다음에 빨리 집에 가자.”

얌전히 내 말을 듣던 서정연이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집이요?”

“어.”

“도해준 씨 집 아니라 내 집에 온다는 거죠?”

“어… 어?”

그러고 보니 굳이 또 서정연의 집에 갈 필요는 없네. 왜 당연하게 서정연 집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서정연이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나를 간절히 바라봤다.

“안 올 거예요?”

“바로 또 가기는 조금 그렇지 않나?”

“정이가 도해준 씨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 정이. 그제야 아까 정이를 혼자 거실에 두고 도망치듯 나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네. 우리한테 크게 실망했을 정이한테 간식이랑 장난감도 사다 줘야 하고 산책도 시켜 줘야 하는데.

내가 갈등 중이라는 걸 빠르게 알아챈 서정연이 본격적으로 졸랐다.

“으응, 같이 갈 거죠? 저 지금 키스하고 싶은 거 열심히 참고 있는데 버리고 가면 진짜 슬플 거 같아요.”

“내가 뭘 또 버린다고 그러냐…….”

“그냥 오늘도 자고 가는 건 어때요? 저녁 맛있는 거 해 줄게요. 어제 다 못 마신 술도 곁들여서 같이 먹어요.”

서정연은 검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열심히 꼬시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코앞에 있는 얼굴이 예뻐서 힘든데, 본격적으로 유혹하는 말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이성이 마구 뒤흔들렸다.

“하, 지만 나 내일은 알바도 가야 하고.”

“데려다줄게요.”

“오늘도 자고 가려면… 옷도 더 가져와야 하는데.”

“그것도 도와줄게요.”

“…….”

서정연이 콧등을 톡 붙여 왔다. 고개를 살짝만 비틀면 단번에 키스할 수 있는 거리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치솟은 열기로 목과 얼굴이 후끈후끈했다.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처연한 얼굴에 홀려 버린 나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아, 알겠어. 하루 더 자고 갈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마!”

“제가 어떻게 보는데요?”

“너 진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서정연의 모습에 이를 갈던 그때였다.

철컹, 끼익! 다른 층에 있는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서정연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린 곳은 바로 아래층이었다.

“시발, 짜증 나게.”

욕설을 내뱉는 거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다른 목소리가 이어서 울려 퍼졌다.

“내, 내가 못 할 말 한 건 아니잖아. 걔들도 내가 버그 쓴 걸 알 텐데…….”

숨죽이고 아래층 남자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버그? 버그라고? 심상치 않은 예감에 서정연을 바라보자 녀석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한 서정연이 내게서 몸을 떼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서정연의 뒤를 따라갔다.

반 층 정도 내려가서 상체를 슬쩍 기울이자 아래층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자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서 한 명의 생김새를 확인한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아까 행사장에서 봤던 놈이잖아?’

체크 남방을 걸치고 안경을 쓴 퉁퉁한 체격의 남자. 남자 앞에는 마찬가지로 안경을 쓰고 왜소한 체격의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냐고!”

“아, 아니… 난…….”

“그 새끼들이 네가 버그를 쓰든 말든 이제 와서 신경 쓰겠냐?”

“그래도…….”

체격이 왜소한 남자는 낯익은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있었다. 아까 우리가 착용했던 것과 똑같은 행사장 입장 명찰이었다.

‘그럼 아크로드를 하는 사람이라는 건데.’

대화도 그렇고, 아크로드 행사장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설마…….’

저 두 명이 누군지 슬슬 감이 오는 내가 눈가를 좁힌 그 순간이었다.

내 옆에서 잠자코 남자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서정연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켜서 동영상으로 남자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이래도 되는 건가? 너무 당당하게 촬영하는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남자들과 거리가 워낙 가까운 데다가 비상계단이 워낙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려서 숨소리라도 잘못 냈다간 곧장 들켜 버릴 거다.

“지랄할 거면 진작에 지랄했겠지. 그리고 네가 버그 쓴 거 모른다니까?”

“아니야! 딴 놈들은 아니라도 그… 요일 길마는 알고 있는 거 같다니까. 나한테 말하는 게…….”

“그러니까 알아도 상관없다고. 그때 네가 버그 써서 이겼으면 몰라, 져 놓고 뭐가 문제인데?”

“시, 신고하면 어떡해. 버그 썼다고… 막 커뮤니티 같은 곳에 글 올라오면? 가뜩이나 나보고 사칭범이라고 존나 욕하는데.”

“지금까지 별소리 없는 거 보면 눈치 못 깐 게 확실해.”

“하지만 요일 길마가…….”

“아, 시발! 좀! 그 새끼들은 네가 버그를 썼는지 관심도 없으니까 그만 징징거려. 돈 받아 처먹어 놓고 왜 자꾸 지랄이야?”

왜소한 쪽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자 앞에 선 남자가 짜증 난다는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야. 내가 돈도 빌려줘, 무기도 줘, 버그도 알려 줘,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너도 좋아서 시작한 일이잖아.”

“…….”

“병신같이 굴지 좀 마. 이제 몇 개월만 더 하면 되니까. 요일 길드하고 우리 길드가 점수 차이 별로 안 나는 거 너도 봤지?”

“어, 어.”

“그 새끼들이 요즘 뭐 하고 다니는진 모르지만, 점수 쌓이는 속도가 예전보다 존나 느려. 퇴물 됐다는 증거지.”

끼익, 다시 철문을 연 남자가 비웃음을 담은 채로 덧붙여 얘기했다.

“애초에 우리 길드 덕분에 겨우 1위 유지해 온 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특히 오늘은일요일, 그딴 새끼가 1위 길드 길마라고 나대는 꼴이 좆같았는데.”

“그럼 진짜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곧 길전 한 번 더 할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준비나 해 놔. 다음번 길전은 무조건 이겨야 해. 내가 쓸 만한 버그 더 있나 찾아볼 테니까.”

“알았어.”

자신감 가득한 대답에 왜소한 남자가 그제야 안심하고 상대를 따라 비상계단을 벗어났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완전히 갔다는 것을 확인한 서정연이 촬영을 끝냈다.

“미쳤다.”

아까부터 내내 느꼈던 감정을 뱉어 내자 서정연이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 제대로 찍혔네요. 대화 내용도 잘 들리고 얼굴도 선명하게 보여요.”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거지? 저 사람들… 그러니까…….”

“네. 체격 있는 쪽이 노퓨쳐인 거 같고, 상대가 제 사칭범인 것 같아요.”

“잠깐, 그럼…….”

다른 곳이면 모를까, 여기는 디렉터가 직접 알려 준 건물이었다. 행사를 위해 게임사 측에서 빌렸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건물에 당당히 와 있는 저 두 사람은…….

“정말로 직원이었던 건가?”

충격적인 상황에 이어서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어이없는 심정을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행사장 스태프가 입는 옷을 안 입고 있어서 직원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빌린 건물에 들어와 있는 거 보면 직원일 가능성이 더 높겠죠?”

“아니라도 이젠 큰 상관 없긴 해. 직원이든 아니든 버그를 일부러 빼내서 악용했다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저 남자가 왜 행사장에서 도해준 씨를 따라다녔는지 이제 이해되네요.”

행사장에서 나와 서정연은 길드 이름과 닉네임이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내 앞에 지나가다가 명찰을 확인한 남자는 내가 ‘오늘은일요일’이라는걸 알고서 일부러 쫓아다닌 거였다.

어쩐지 시선이 찝찝하더라니, 설마 노퓨쳐였을 줄이야.

‘물론 노퓨쳐라는 건 아직 불확실하지만, 그 부분은 회의실에서 디렉터한테 영상을 보여 주면 알아봐 주겠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서정연이 영상을 찍은 핸드폰을 내 손에 쥐여 주며 웃었다.

“잘됐네요, 도해준 씨. 이거로 버그가 ‘유출’됐다는 말도 이제 더 당당하게 할 수 있겠어요.”

“그래.”

나는 서정연이 쥐여 준 핸드폰을 강하게 잡으며 짙게 웃었다.

감히 신성한 PVP에서 버그를 악용한 거로 모자라 불법까지 저질러? 넌 이제 뒤졌어, 노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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