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103)화 (105/132)

103.

디렉터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까 말한 인터뷰 건은 그냥 한 소리가 아닙니다. 나중에라도 꼭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군요.”

다시 한번 인터뷰를 언급하며 악수를 청하는 디렉터의 얼굴에는 진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속으로 웃으며 악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나와 주면 우리야 고맙지.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업 인터뷰 건은 제가 좀 부담스러워서 거절했을 뿐인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인터뷰를 핑계로 따로 대화할 자리를 잡아 보려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잠깐, 이러면 진행이 너무 느려질 수도 있는데.’

처음에는 인터뷰 약속을 잡은 다음에 그 자리에서 버그 악용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면 디렉터가 그 인터뷰 일정을 언제 잡을지 너무 불확실했다.

지금 진행하는 게임 행사가 끝나고 나서 일정을 잡을 수도 있고, 한 달이나 두 달 뒤에 잡을 수도 있었다. 약속을 잡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그저 적당히 상대해 주기 위해 건넨 말일 수도 있었다.

‘서정연이 무리해서 겨우 얻어 낸 기회인데, 어물거리다가 놓칠 수는 없어.’

우리에게 시간이 넉넉했으면 모를까, 사칭범이 쓴 블레이드 스킬 버그가 고쳐지기 전에 어떻게든 버그 유출과 악용에 대해서 디렉터와 얘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었다.

4주년 행사가 끝난 다음에 버그가 수정될 가능성이 컸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추측일 뿐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수정될 수 있는 게 게임 버그였으니 여유롭게 생각했다간 기껏 잡은 회심의 증거를 허무하게 날려 버릴지도 몰랐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전하게 인터뷰 핑계로 약속을 잡을지,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도박을 걸어 볼지.

“…….”

예전의 나라면 당연히 안전한 길을 선택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얻어 낸 기회가 아니라 서정연이 얻어 낸 기회였으니까. 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살려 내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자 혼잡하던 머릿속도 빠르게 정리됐다. 나는 디렉터의 손을 힘줘서 잡으며 짙게 웃었다. 그리고 하려던 말을 바꿨다.

“저도 이렇게 따로 대화할 타이밍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디렉터님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디렉터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밀려오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아크로드 버그를 유출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나를 향한 디렉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명백하게 당황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유출’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쓴 보람이 있었다. 디렉터를 뒤흔드는 거에 성공했으니 이제 궁금증만 끌어내면 대화할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다.

“얼마 안 된 일입니다. 직업 스킬과 관련된 버그였고, 그 버그 악용으로 전 피해를 봤습니다.”

“어, 음, 이게 무슨…….”

“증인도 있고, 증거 영상도 있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망치듯 뒤로 몸을 빼려는 디렉터의 손을 놔주지 않고 더욱더 강하게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버그야 고치면 된다지만, 유출된 게 맞다면 디렉터님도 알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원하시면 당시 상황도 설명해 드릴 수 있고, 챙겨 온 영상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주셨으면 해요.”

최대한 깔끔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내 말을 듣던 디렉터의 얼굴에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쯤에서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우리와 디렉터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만큼 많이 놀랐을 거다. 디렉터의 입장에서는 게임 유저고 뭐고 오늘 처음 만난 타인이 자신들이 관리하는 게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였으니까.

“크흠, 그…….”

한참 시간이 흐른 끝에 드디어 디렉터가 아까보다 훨씬 진정한 모습으로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요일 님 얘기는 아크에서 버그가 유출됐고, 그거로 직접 피해를 보았다는 거죠?”

“네.”

“음… 버그로 피해 생긴 건 이해가 가는데, 어째서 그게 유출된 버그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글쎄요. 지금 여기에선 유출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정도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디렉터가 내 말을 듣고 ‘버그’보다는 ‘유출’에 더 집중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 자리에서 순순히 알려 줄 수는 없었다.

시간을 내주겠다는 확답을 받기 전까진 나도 섣불리 내가 가진 패를 공개하지 않을 거다. 이런 어수선한 무대 뒤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장소에서 대화하는 게 우리 목적이니까.

“디렉터님은 유출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된 버그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면 일이 훨씬 간단해지니까 좋겠지만, 아닐 경우도 대비해야 하지 않나요?”

“…….”

“회사 내부 일이 계속해서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건 위험하잖아요. 지금이야 피해자가 몇 명 안 되는 버그 문제지만, 나중에 가서는 중요한 프로젝트나 업데이트 내용이 유출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일요일 님은 유출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설명 드리고 증거를 보여 드리는 만큼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끄응…….”

미끼는 이 정도로 던졌으면 충분할 거다. 내 짐작대로 미치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뒷머리를 벅벅 긁은 디렉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혼자서 들을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관련 직원들도 부르도록 하죠.”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좋아요. 행사장 입구로 나가면 바로 오른편에 건물 하나가 있습니다. 이번 행사를 대비해서 미리 빌려 둔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회의실이 나와요.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네.”

빠른 속도로 말을 마친 디렉터가 핸드폰을 꺼내 들며 어딘가로 급하게 걸어갔다. 관계자들을 더 부른다고 했으니 그 일로 전화하려는 모양이다.

“하아…….”

디렉터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긴장이 확 풀리며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진짜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으로 부딪힌 건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길이 생겨서 천만다행이다.

“고생했어요, 도해준 씨.”

내가 디렉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얌전히 뒤에 서서 기다리던 서정연이 축 처진 내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 줬다.

“디렉터가 미끼를 제대로 물었네요. 도해준 씨 덕분에 영상 챙겨 온 보람이 있겠어요.”

“으,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일단 디렉터가 말한 건물로 가자.”

굉장히 어려운 일을 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한 건 그저 디렉터와 약속을 잡은 것뿐,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디렉터가 관계자들을 불러온다고 했으니 아까 무대에서 봤던 GM 대표나 게임 개발자 같은 직원들이 자리를 채울 텐데, 우린 이제부터 그 사람들에게 영상을 보여 주고 유출 가능성을 설명해야 한다.

“유출이라는 말을 쓴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 만하니까. 의심하게 만든 건 노퓨쳐와 제 사칭범이고.”

디렉터가 알려 준 대로 행사장을 빠져나와서 옆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서정연이 날 보며 웃었다.

“우린 당연히 해야 할 의심을 한 거고, 증거 영상까지 줬으니 그다음은 여기 관계자들이 처리하는 게 맞죠. 노퓨쳐와 사칭범이 진짜로 여기 직원이든 뭐든 알아내는 건 게임사의 몫이라는 뜻이에요.”

“어… 그런가?”

“그런 거죠. 도해준 씨는 게임을 즐기는 유저이자 피해받은 입장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아요.”

띵, 우리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금방 4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깨끗한 복도가 나타났다. 왼쪽 끝에는 회의실이라 적힌 표지판이 달려 있었다.

“근데 도해준 씨.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뭔데?”

“평소의 도해준 씨라면 아까 대화에서 이렇게 강하게 나가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가 있어요?”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말에 조금 놀랐다.

하여간 이런 눈치는 엄청 빠르다니까. 조금 머쓱했지만, 대답 못 해 줄 것도 아니라 뺨을 쓸어 만지며 입을 열었다.

“네가 겨우 얻어 낸 기회잖아.”

“아…….”

“어떻게든 놓치고 싶지 않았어. 무대에 올라갈 정도로 힘써 줬는데, 놓치면 아깝잖아.”

“…….”

음, 생각했던 걸 입으로 내뱉는 건 제법 부끄러운 짓이군.

어쩐지 서정연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애꿎은 복도 벽만 노려보며 걷는데, 갑자기 강한 힘이 내 손목을 확 낚아챘다.

“서정연?”

놀라서 고개를 들자 내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잡아끄는 서정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깊게 눌러쓴 모자 때문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가자 서정연이 복도 중간에 있는 철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순식간에 환한 복도에서 불 꺼진 비상계단으로 끌려온 나는 이윽고 내 몸을 꽉 끌어안는 서정연의 행동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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