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디렉터와 GM이 나를 알아보는 기색을 보이자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사회자가 신난 음성으로 물었다.
“어? 지금 디렉터님과 GM님 분위기도 그렇고, 채팅창 반응도 그렇고. 뭔가 엄청 유명하신 분인가 봐요!”
“아뇨, 아닙니다.”
기대가 가득 담긴 눈을 한 사회자가 부담스러워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사회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 추측이 맞나요? 어떤가요, 디렉터님?”
“하하, 잘 알고 있는 유저이긴 합니다. 우리 GM 케이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은일요일’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유저분이 유일하게 몇 년 동안 서버 길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아하, 그러니까 몇 년 동안 1위 자리를 유지해 온 사람이 여기 나오신 ‘오늘은일요일’ 님이 유일하다는 거죠?”
“네. 모두 아시다시피 우리 아크로드는 많은 PVP 시스템이 있고, 그중에서 가장 인기 많은 게 길드 전쟁이니까요. 길드 전쟁에서 얻은 포인트가 쌓일수록 길드 순위가 높아지는데, ‘요일’ 길드는 몇 년 동안 계속 1위를 유지하더라고요. 제 기억으로는 2년은 넘은 거 같은데, 맞나요?”
디렉터가 나를 보며 묻자 사회자가 들고 있던 여분의 마이크를 내게 넘겼다. 얼떨결에 마이크를 받아 든 나는 시종일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서정연을 째려보며 대답했다.
“…2년 정도 됐습니다.”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된 거라거나, 우리 길드가 유독 강해서 유지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어나더 길드와 꾸준하게 치고받고 싸우면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다른 서버의 길드들은 상대 구분 없이 싸우는 거에 비해, 우리는 한 달 내내 어나더하고만 쉴 틈 없이 전쟁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원래 1위였던 내 길드는 순위 유지에 필요한 점수가 더욱 잘 쌓였고, 어나더는 2위까지 올라오게 된 거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길드 순위 얘기를 이런 행사장 무대 위에서 듣게 될 줄이야.’
이게 게임 행사장의 힘인가? 다른 곳이었으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게임 길드 순위가 어쩌고저쩌고 떠들어 봤자 기껏해야 게임 좀 그만하라는 소리나 들을 텐데.
“길드 순위도 그렇고, 예전에 직업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저 몇 명을 뽑아서 인터뷰를 준비했었는데요. ‘오늘은일요일’ 님에게 봉술가 직업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무참하게 까였었죠.”
“와, 정말요?”
“가차 없이 차 버려서 쪽지를 나눈 GM 직원이 마음에 상처를 좀 받았습니다.”
디렉터의 능청스러운 말에 사회자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런 일도 있었지. 아마 작년 초였을 거다. 한창 어나더 길드와 서정연한테 시달리던 시기라서 인터뷰고 나발이고 다 까 버리고 길드 전쟁에 집중했었는데. 뭐, 그게 아니더라도 저런 인터뷰는 귀찮아서 거절했겠지만.
근데 왜 이런 얘기까지 나오는 거지? 서정연을 따라서 무대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길드 순위에 이어서 인터뷰 거절한 후일담까지 언급되니까 머리가 다 아팠다.
진한 현타가 몰려와 잠시 넋을 놓은 사이에 사회자가 능숙하게 진행을 이어 나갔다.
“좋아요, 엄청난 고수분과 그 친구분이 올라오셨으니까 어떤 질문을 할지 더욱 기대되는데요! 디렉터님과 GM님에게 하실 질문은 어느 건가요?”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구나. 나는 해방되었다는 기쁜 마음으로 서정연에게 마이크를 넘겨줬다.
내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서정연은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절 여기에 함께 데려와 준 일요일 님만큼 잘하진 않지만, 저도 나름 아크를 즐기는 유저입니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굉장히 듣기 편하고 좋았다. 서정연을 만난 뒤로 매일같이 듣던 목소리인데도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통해 들으니까 새삼스럽게 또 좋았다.
설레는 마음에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를 느낀 나는 좀 머쓱해졌다. 참, 애인이 너무 잘나도 문제라니까.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말을 하던 서정연이 갑자기 옆에 서 있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질문을 할지 궁금해서 나 또한 녀석을 바라보고 있던 차라 눈이 곧장 마주쳤다.
날 보며 빙긋 미소 지은 서정연이 말을 이었다.
“게임에 결혼 시스템을 추가해 주실 의향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뭐?”
뭘 추가해 달라고? 결혼? 갑자기 결혼이 왜 나와?
나를 포함해서 질문을 받은 디렉터와 GM은 물론이고 언제나 밝은 태도를 유지하던 사회자까지도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PVP에 대해서 얘기하고, 길드 순위나 직업에 관한 설명이 쭉 이어지던 행사장에 뜬금없이 ‘결혼’이라는 간지럽고도 로맨틱한 단어가 던져졌다.
차분히 주변을 살핀 서정연은 오히려 이런 반응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NPC하고 호감도를 쌓는 시스템은 최근에도 업데이트가 이뤄졌는데, 유저끼리 하는 결혼 시스템은 없는 게 좀 아쉬워서요. 다른 온라인 RPG 게임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크흠, 그렇긴 하죠.”
이어지는 설명에 헛기침한 디렉터가 어딘가 어색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좀 놀랍네요. 사실 결혼 시스템을 이미 준비해 둔 상태거든요.”
“엇, 그게 정말인가요?”
잠시 뒤로 빠져 있던 사회자가 놀라며 되물었다. 사회자도 실제로 아크로드를 즐기는 유저로서 결혼 시스템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네, 이렇게 밝히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결혼 시스템은 하반기나 늦으면 내년 상반기에 추가될 예정이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와 버프 아이템도 준비 중이니까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친. 진짜로 준비 중인 거였어?
아니, 오픈한 지 몇 년이나 된 게임에서 무슨 결혼이야, 결혼은! 그딴 거 준비할 시간에 직업별 스킬 밸런스나 좀 조율하라고.
어이없고 기가 막혔지만 디렉터와 GM 앞에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밸런스나 건드리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뭐… PVP에 과몰입한 나만 저렇게 생각하고 다른 유저들은 결혼 시스템을 반길 수도 있긴 하지.’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당장 여기 있는 사회자만 봐도 반응이 굉장히 좋으니까.
“질문자님 덕분에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됐네요! 무대까지 올라와서 Q&A에 참여해 주신 두 분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겨우 이 숨 막히는 무대 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관객들의 영혼 없는 박수를 받으며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넘겨줬다.
우리가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미리 대기 중이던 행사 스태프가 다가왔다.
“참가 상품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세요.”
별걸 다 주네. 스태프의 뒤를 따라가며 서정연에게 소리 낮춰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서 얼굴도장 찍은 건 좋은데, 결국 따로 시간 잡는 건 실패했네.”
“흠, 그러게요. 애초에 뭐라도 해 보려고 올라간 거였으니 쓸 만한 결과가 안 나온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쉽긴 하네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이해하는데 나한테 미리 얘기 좀 해 주면 안 되냐? 나 진짜 많이 놀랐거든?”
한숨을 내쉬며 타박하자 서정연이 은근슬쩍 내 손목을 살짝 잡아 왔다.
“화났어요?”
“…화난 건 아니고.”
“도해준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전 기분 좋았어요. 사람들이 도해준 씨를 알아보고 실력 인정해 주고… 그런 걸 보니까 이상하게 제가 뿌듯하고 만족스럽더라고요.”
“게임에 미친놈이라고 소문 자자한 게 뭐 좋은 일이라고 뿌듯해하냐.”
자꾸만 혼자 질주하는 서정연의 행동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짚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런 말을 들으니까 힘들게 세운 각오가 물에 닿은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 버렸다.
괜히 목덜미로 열기가 치솟아서 투덜거리자 내 손목을 조금 더 강하게 잡은 서정연이 속삭였다.
“불특정 다수가 도해준 씨 얼굴 보는 건 싫은데, 이런 상황은 또 좋네요. 나도 나를 모르겠어요.”
서정연이 걸으며 내게 몸을 바싹 붙였다. 어깨와 팔이 서로 맞닿으면서 체온이 번져 나갔다. 고개를 조금 위로 올리자 서정연의 입술이 보였다.
아, 키스하고 싶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서정연의 예쁜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서정연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기분 좋은 감촉에 이성이 강하게 뒤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이성 줄을 겨우 붙잡고 있던 그때였다.
“여기 굿즈 가져가시면 됩니다.”
불쑥 끼어든 스태프의 안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서정연과 거리를 벌리며 작은 테이블에 올려진 굿즈를 확인했다.
아크로드 로고가 그려진 봉투 안에는 자잘한 굿즈가 들어 있었다. 부채랑 공책이랑… 이건 뭐야. 볼펜? 열쇠고리도 있네.
게임은 즐겨도 굿즈에는 관심 없는 나는 봉투에 가득 담긴 굿즈를 봐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서정연이랑 데이트나 가고 싶네.’
진짜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굿즈가 담긴 봉투를 받아 드는데, 뒤에서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오, 일요일 님. 상품을 받고 계셨군요.”
우리에게 걸어오는 상대는 다름 아닌 아직 무대 위에서 Q&A를 진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디렉터였다.
“안녕하세요. Q&A는 끝났나요?”
“네. 큼, 더 질문하는 사람이 나오질 않아서…….”
아, 질문이 들어오지 않아서 조기 종료됐다는 건가. 하긴, 아까도 서정연 말고는 손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 조기 종료될 만하네.
‘어? 잠깐만. 이거…….’
나와 서정연이 동시에 시선을 맞췄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기회다!’
디렉터를 붙잡을 절호의 순간이 드디어 우리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