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101)화 (103/132)

101.

공식적인 이벤트는 다 여기서 진행하는지, 중앙 무대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이벤트를 보려고 무대로 모인 사람도 많았다. 무대 뒤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중계 영상이 비쳤다.

사람 틈에 껴서 Q&A가 진행하는 걸 지켜보자 곧 남자 둘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전 아크로드 디렉터 박경재라고 합니다. 아크로드 4주년 행사에 와 주신 유저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게임 운영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GM 케이입니다. 반갑습니다.”

캐쥬얼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두 명이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아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디렉터와 GM의 인사에 스크린에 비친 생중계 방송 채팅창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대부분 저 사람이 디렉터냐, 처음 본다, 아저씨네, 이런 감상들이고 가끔 중간마다 게임 거지 같이 운영한다며 욕설이 보이기도 했다.

“자. 무대로 모신 두 분과 함께 이제부터 Q&A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뒤편에 이렇게 실시간 채팅창이 보이시죠? 홈페이지 설문 조사를 통해 미리 선정해 둔 질문 10개가 끝나면 채팅창에서도 질문을 받을 예정입니다.”

디렉터라. 다른 사람들에 맞춰서 적당히 박수를 치며 곁에 있는 서정연에게 물었다.

“어때, 저 사람은? 충분할 것 같은데?”

“네. 디렉터라면 영상을 보여 줬을 때 쓸 만한 피드백을 들려주겠네요.”

“문제는 어떻게 만나느냐인데…….”

저 정도 직위의 사람이라면 일정이 이미 다 잡혀 있을 수도 있고, 일정이 한가하더라도 평범한 유저가 만나 달라고 요청해도 만나 줄 리가 없었다.

‘디렉터라면 노퓨쳐나 사칭범이 정말로 아크 직원인지도 확인해 줄 수 있을 텐데.’

무대 위에 있는 저 사람만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게 척척 해결될 텐데 그게 참 쉽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하면 접근할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쓸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해준 씨.”

어깨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옆에 서서 내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은 서정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엉?”

“도해준 씨만 괜찮으면 제가 어떻게든 자리 만들어 볼게요.”

모자챙 아래로 보이는 서정연의 예쁜 얼굴에 한순간 넋이 나갔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어떻게 자리를 만들게?”

“음… 제 계정을 서제현이 실수로 삭제했던 얘기 했었죠?”

“응.”

“서제현이 그 계정 살리려고 진짜 엄청 난리 쳤었거든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집안사람들한테 생떼 부리는 것밖에 없는 고등학생이 난리를 어떻게 쳤겠어요?”

“어…….”

그 질문에 서제현을 떠올렸다.

뭐만 하면 변호사 부르겠다, 비서 아저씨한테 이르겠다, 돈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냐, 이런 말들만 줄줄 내뱉는 서제현이 난리를 쳤다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네. 높은 확률로 저 게임사는 ‘흔적’이라는 닉네임을 알고 있고, 재벌가와 관련된 유저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예요. 문의 글만 남기면 될 일을 게임에 관심 없고 제멋대로 사는 서제현이 알 리가 없으니까. 서제현을 돌보는 비서들도 일단 애가 난리 치니까 해 달라는 대로 해 줬을 거고.”

“으.”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서정연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얘기를 해 주는 서정연도 어쩐지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처음 설명 들었을 때는 서제현 때문에 ‘흔적’ 계정이 삭제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충격이라서 계정 복구를 어떻게 했는지는 신경 쓰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따져 보면 경악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서정연이 혼란에 빠진 내 어깨를 살살 쓸어 만지며 슬픈 기색으로 설명을 이었다.

“제가 충격받은 사이에 서제현이 멋대로 게임사에 진상을 부려 놨더라고요. 저 너무 창피했어요, 도해준 씨.”

“그래, 그랬겠다.”

서정연의 눈꼬리가 한없이 아래로 쳐지는 걸 보니까 내 가슴이 다 찌르르 아팠다. 진심을 담아서 위로하자 서정연이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따 차로 돌아가면 뽀뽀해 주세요.”

“알겠어, 뽀…… 뭐?”

“좋아요. 도해준 씨가 뽀뽀까지 하면서 위로해 준다니까 제가 한번 노력해 볼게요.”

뒤늦게 이성을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짓자 서정연이 시무룩한 표정을 싹 지우고 나를 따라서 웃었다. 그 와중에 웃는 게 또 예뻐서 한층 더 어이없었다.

“아니, 장난 그만하고. 진짜로 가능한 거야? 오히려 서제현이 깽판 쳐놔서 너 블랙리스트 같은 곳에 올라가 있는 거 아냐?”

“블랙리스트는 모르겠고 진상 유저 리스트에는 확실히 올라가 있을걸요? 근데 어쩔 수 없죠. 이렇게라도 시도해 봐야 하니까.”

걱정스러운 나와 달리 서정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 방법이 없으면 사업 쪽으로 가 볼 수도 있고.”

“사업?”

“뭐, 콜라보 제안한다든가. 게임이랑 콜라보하는 제품들 많잖아요.”

“…그런 게 가능해?”

“가장 가능성 높고 쉬운 방법이죠. 대신 이 방법을 써도 여기서 바로 디렉터를 만나는 건 어려워요. 돌아가서 우선 본가에 연락해 보고, 회사 측에서 게임사랑 협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니까.”

“음…….”

콜라보 제안이라니. 그렇게까지 해야만 저 디렉터를 만날 수 있다는 건가. 일이 너무 커지는 감이 있어서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고 오늘은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해 보자. 일단 이 이벤트가 끝나고…….”

여태 어깨를 붙잡고 있는 서정연의 손을 밀어 내며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Q&A를 진행하던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채팅창에서 질문을 받아 봤는데요! 혹시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신 분 중에서 질문하실 분 계신가요? 자, 손을 드셔서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면 됩니다.”

발랄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행사장에 울려 퍼졌지만, 무대 앞에 서 있는 그 누구도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는 사람들 속에서 서정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거나 한번 나가 볼까요?”

“뭐라고?”

“도해준 씨가 그래도 1위 길드 길마인데 디렉터나 GM 대표 정도면 알아보겠죠?”

서정연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걸 본 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나, 나보고 지금 저기 나가라고?”

“아뇨. 제가 나갈 거예요.”

“그게…….”

그게 무슨 개소리야, 라고 내가 미처 따져 묻기도 전에 서정연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 망설임 없이 그대로 돌진해 버리는 서정연의 행동에 경악한 내가 입을 떡 벌린 사이, 사회자가 홀로 손을 든 서정연을 발견했다.

“오, 거기 손 드신 분!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면 됩니다.”

내심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아서 머쓱해하던 사회자가 반색하며 서정연에게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차마 대놓고 말릴 수 없어서 어버버 거리는 사이에 서정연은 당당하게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서정연이 무대 위로 올라와 카메라에 찍히기 시작하자 스크린에 비친 채팅창의 속도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눈가 부분은 잘 안 보여도, 그 아래 얼굴이나 체격 같은 건 그대로 보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모델 아니냐, 존나 잘생겼다, 연예인임? 따위의 채팅이 올라오는 걸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내 애인이 잘나긴 했는데, 그걸 온전히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서 기분이 복잡했다.

“와, 아주 훤칠하신 분이 올라오셨어요. 닉네임이…….”

사회자가 서정연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의 내용을 살피고는 의외라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분의 파트너로 행사에 참여해 주신 분이었군요! 친구분도 여기 계신가요?”

젠장.

나를 찾는 사회자의 질문에 이번에는 내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거기 친구분? 친구분도 올라오시겠어요?”

여전히 밝은 사회자의 목소리가 장난 아니게 부담스러웠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결국 나도 나가야 하는 거잖아!’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무대 위로 올라가 서정연 옆에 서서 녀석의 팔을 살짝 꼬집자 이 여우 같은 놈이 ‘아야’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려 댔다.

“너 진짜 죽을래?”

“미안해요. 저만 나오면 될 줄 알았는데. 명찰 달고 있는 걸 깜빡했어요.”

정면을 보며 작게 속삭여서 따지자 서정연이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게임에서도 뭐 하나 하겠다고 결정하면 거침없이 내지르더니, 현실에서도 이러네.

고삐를 제대로 쥐지 않은 죄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 사회자가 내 명찰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요일’ 길드의 ‘오늘은일요일’ 님! 맞으신가요?”

사회자의 외침이 울려 퍼진 동시에 무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소개를 기다리던 디렉터와 GM도 어딘가 아는 얼굴을 하고서 나를 돌아봤다.

아, 쪽팔려. 밀려오는 창피함에 나는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하하.”

“웃어? 웃었냐?”

그 적나라한 반응에 서정연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이 사태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서정연의 허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쿡 찌르며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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