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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99)화 (101/132)

99.

새하얀 커튼 너머로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뻐근한 눈가를 꾹 눌렀다.

‘네 시간도 못 잤잖아…….’

새벽에 서정연의 작업실로 찾아가면서 얼렁뚱땅 시작된 키스는 그 뒤로 침실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를 쓰는 건 안 되겠다고 한사코 거절하는 나를 끝까지 붙잡은 서정연이 커다랗고 둥근 눈으로 애원했다.

-그냥 껴안고 자기만 할 테니까 같이 자면 안 돼요?

-아니, 같이 자는 게 문제라니까.

-왜 문제예요? 방금까지 키스도 해 놓고. 키스할 거 다 했으니까 볼일 끝났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봐요, 침대도 엄청 크잖아요. 같이 자도 불편할 거 하나도 없어요.

서정연이 살살 꼬시는 말에 넘어가 버린 나는 결국 손님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정연의 침실에서 잠을 잤다.

심지어 침대에 같이 눕고 나서도 서정연은 틈만 나면 입술을 맞춰 왔다. 무슨 키스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씐 건지, 찰싹 달라붙어서 자꾸만 키스해 오는 통에 자고 일어나서도 입술이 아릴 지경이었다.

‘거기에 넘어가는 나도 문제다.’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까 현타가 진하게 몰려왔다. 한참 동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던 나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를 있는 힘껏 안고 있던 서정연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침실 밖에서 정이 짖는 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정이 밥을 챙겨 주고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남자랑 키스해 놓고 일상에 아무런 지장 없이 행동하다니…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저런 게 바로 연상의 여유인가.

“미치겠네.”

서정연을 떠올리자 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 진짜로… 서정연 좋아하는 거구나.

이젠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키스까지 한 마당에 상대가 남자라는 핑계를 대면서 감정을 모른척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건 처음이라 자각이 늦었던 것도 있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린 것도 맞았다. 그래도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아닌척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럼 나 서정연이랑 사귀는 건가? 오늘부터?’

키스했으니까 당연히 사귀는 거겠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나와 달리 서정연은 키스만 하고 사귈 마음이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요즘 세상에 사귀자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쪽이 여자였으면 나도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텐데, 남자와의 연애는 처음이라 영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서정연이 원래 게이였는지, 나처럼 남자는 처음인지조차 몰랐다.

정말 1%의 확률이라도… 서정연이 그저 새벽의 충동으로 내게 키스해 온 거라면, 그래서 연애 상대로는 날 고려하지 않았다면.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거절하는 서정연을 상상하자 가슴속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결심했다.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몸을 일으켜서 비장하게 욕실로 향했다. 일단 씻어야겠다. 급한 문제라 해도 방금 자고 일어나서 꼬질꼬질해진 모습으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 비치된 드라이기로 머리카락까지 바싹 말린 나는 밖으로 향했다.

마침 요리가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던 서정연이 나를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일어났어요, 도해준 씨? 아직 여유 있어서 더 자도 되는데.”

“괜찮아. 그보다 서정연.”

“네?”

서정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나는 팔을 뻗었다.

탁! 서정연의 뒤에 있는 벽을 한 손으로 짚으며 몸을 밀착하자 나와 벽 사이에 갇힌 서정연이 놀란 얼굴을 했다. 새벽과는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엇, 네?”

어딘가 멍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던 서정연이 눈을 깜빡였다.

“새벽, 큼, 새벽에 있었던 일 말이야.”

“새벽에 있었던 일?”

“나랑 키스…했잖아.”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묻고 싶었는데, 막상 키스라는 단어를 뱉어 내려니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서정연이 순순히 대답했다.

“했죠.”

“그럼 너 이제 나랑…….”

사귀는 거야? 라고 물어보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잠깐. 이거 질문이 너무 유치한가? 난 서정연보다 4살이나 어려서 안 그래도 애처럼 보일 텐데.

솔직히 살면서 스킨십을 한 상대에게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따위의 질문을 건네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던 나는 겨우 말을 이었다.

“나랑, 음, 연애해 볼 의향이…….”

“도해준 씨.”

“엉?”

고민한 거에 비해 딱히 새롭지 않은 질문을 꺼내려던 그때, 서정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잖아요.”

“어, 뭐?”

“이따가 데이트로 아크 행사장도 가야 하고.”

“으응?”

아크 행사장은 엄연히 따지면 데이트보단 노퓨쳐와 사칭범 문제를 해결하려고 가는 거 아니었나?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늘부터 1일?”

“네에. 당연하죠.”

당황하는 나를 새침하게 노려본 서정연이 실망스럽다는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저랑 키스를 그렇게 해 놓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어요? 진짜 너무해요, 도해준 씨.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랑 침대에서 뜨겁게 뒹굴어 놓고.”

“악!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키스만 했잖아!”

“그러니까요. 침대에서 저랑 그렇게 쪽쪽거려 놓고 이제 와서 사귄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런 말을 왜 해요? 제가 사귈 생각 없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거야…….”

나는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넌 어떤지 모르지만 난 이런 상황이 처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내가 남자이다 보니까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확신하기가 어려워서.”

“흐음.”

이상하다. 분명 시작은 내가 먼저였는데 왜 또 내가 서정연을 달래 주면서 해명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잔뜩 섭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서정연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니까.

“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에요. 남자한테 끌려 본 것도 도해준 씨가 처음이고. 아니, 더 정확히는 성별 상관없이 이렇게 끌려 본 사람은 도해준 씨가 처음이에요.”

조용히 내 말을 듣던 서정연이 양팔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살기 시작한 이 집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도해준 씨를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저도 제가 놀랍더라고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솔직한 이야기에 불안감이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초대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던가.

문득, 서정연의 지난 연애보다 그가 진심을 공유할 만큼 가깝게 지내 온 상대가 있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새벽에 저한테 후회 안 할 거냐고 물어봤잖아요. 새벽에도 지금도 후회 안 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도해준 씨는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날 응시하던 서정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후회해요?”

“…내가 후회하면 지금 널 붙잡고 이런 거나 묻고 있겠냐.”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씩 웃은 서정연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향이 나요. 1층 욕실에서 씻었어요?”

“어떻게 알았어? 1층이랑 2층이랑 바디워시 향이 다른가?”

“네. 1층은 클린코튼 향이고, 2층은 라벤더 향이에요. 저도 1층에서 씻었는데. 우리 지금 같은 향 나겠네요.”

그 말에 나도 반사적으로 내게 바싹 붙어 있는 서정연의 향을 맡았다. 그러자 정말로 부드러운 향이 코끝에 닿아 왔다.

같은 욕실에서 씻고, 같은 바디 워시를 썼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었다.

“도해준 씨, 저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

“도해준 씨도 제가 좋았던 거죠? 근데 왜 집에 놀러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한 거예요? 부담스러웠어요?”

진짜로 궁금했는지 연달아 묻는 서정연의 목소리는 나름 진지했다.

이것만큼은 부끄러워서 알려 주고 싶지 않았는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사고 칠까 봐 걱정돼서. 놀러 오고 싶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거든.”

“사고요? 음, 새벽에 있었던 일 같은?”

“…그래, 그런 거.”

서정연이 짚어 주는 말을 듣자 다시금 현타가 몰려왔다.

몇 번이고 놀러 오라던 서정연의 제안을 그간 참 열심히도 거절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니. 그럼 내가 거절했던 건 다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건지.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킥킥거리며 웃은 서정연이 숙였던 상체를 다시 일으켰다. 그러고는 쪽,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이제 문제 될 것도 없으니까 자주 놀러 올 거죠?”

“너만 괜찮으면.”

“저야 물론 괜찮죠. 아예 여기서 살아도 상관없는데? 매일 같이 자고, 2층에서 같이 게임하고. 그럼 좋잖아요.”

사귄 지 1일 된 사이에서 나눌 대화 치고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 세상에 어느 커플이 사귀자마자 동거하냐고. 뭐, 있기야 하겠지만… 내 집도 아니고, 서정연에게 그런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다.

서정연도 그냥 분위기 타서 뱉은 말이겠지. 동거를 쉽게 시작할 성격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건 나중에. 그래도 자주 놀러 올게.”

“좋아요. 저도 지금은 그거로 만족할게요.”

지금은…이라고? 그 한마디에 어쩐지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에이,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이겠어? 고개를 저으며 밀려오는 불길함을 애써 떨쳐 냈지만, 앞으로 연애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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