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잠시만요.”
핸드폰을 든 서정연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거실이 워낙 조용해서 통화 내용까진 아니지만, 상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자?’
톤이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자가 분명했다. 통화를 하는 서정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 시간에 여자가 전화한다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지.
카페 알바가 끝나고 만났을 때, 서정연의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까 좀 이상했다.
‘…혹시 여자친구가 있는 건가?’
생각해 보면 서정연과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연애는 해 봤는지, 현재 여자친구는 있는지… 그런 대화 말이다.
뭐, 저 얼굴로 연애를 안 해 봤으면 그게 더 어이없는 일이긴 한데. 그래도 여자친구가 있으면 나랑… 이렇게 매일 만나거나 집에 놀러 오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여자친구랑 놀면 되잖아.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런 와중에도 서정연은 통화가 계속 이어졌다.
“어. 거기까진 괜찮아.”
상대에게 편하게 반말로 대답하는 서정연의 태도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내게 존댓말을 하는 서정연의 평소 모습과 비교가 됐다.
여자친구인지 그냥 아는 사람인진 모르지만, 저 사람한테도 반말하고 서제현한테도 반말하네. 서제현은 가족이고 동생이니까 반말이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한테도 반말 못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나하고도 이 정도면 제법 친한 거 아냐? 그리고 내가 4살이나 어린 동생이고.’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왜 나한테는 반말을 쓰지 않는 거지? 물론 나도 서정연보고 형이라고 안 부르고 반말하니까 불만을 티 낼 처지가 아닌 건 알지만.
“…….”
통화하는 서정연을 바라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져서 억지로 시선을 내려 텅 빈 술잔을 응시했다.
아까 서정연과 함께 술을 마실 때는 분명 기분이 엄청 좋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바닥으로 뚝 떨어지다 못해 내핵까지 파고들 기세였다. 한순간에 너무 우울해져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이따 메일 보내 놓을게. 그래.”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는 정이를 쓰다듬으며 열심히 기분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자 드디어 서정연이 통화를 끝내고 내 곁으로 돌아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불쑥 튀어나온 대답은 내가 듣기에도 무척 딱딱했다. 그걸 눈치 빠른 서정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 서정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해준 씨?”
“…큼, 전화가 온 거니까 어쩔 수 없지.”
혹시라도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거까지 알아챌까 봐 황급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덧붙여 말했다.
내가 서정연이랑 무슨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전화 좀 했다고 기분 나빠 하는 티를 내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서정연이 이런 일로 내 눈치를 보는 건 나도 원치 않았다.
“근데… 흠, 누구야?”
그래도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한 상대가 궁금하긴 하니까 슬쩍 물어봤다. 진짜로 여자친구인가?
물어봐 놓고 어쩐지 심장이 뛰고 초조해져서 괜히 시선을 피하는데, 서정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출판사 담당자예요.”
“어, 뭐?”
“담당자요. 반말하는 건 나이도 같은 데다 오래 알고 지내서. 거의 10년 됐나? 외국에서 살 때 만난 사이거든요.”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답변에 잠시 멍해졌다. 출판사 담당자라니. 그제야 서정연의 일이 책 번역이라는 게 기억났다.
“그럼 이번 전화도?”
“네. 번역 문제로 전화한 거예요. 지금 바로 몇 가지 확인 좀 해 줄 수 있냐고 원작 측에서 급하게 요청이 왔나 봐요. 원작 소설이 북미 작품인데, 그쪽은 지금 낮 시간대니까.”
여자친구나 서정연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의 전화가 아니라… 일 얘기였다고? 정말로?
당황하는 날 보며 한숨을 폭 내쉰 서정연이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도해준 씨랑 술 마시고 있는 와중에 다른 사람 전화는 안 받고 싶은데, 담당자는 무조건 일이 있을 때만 전화해서요.”
“그래?”
“네에. 그 외엔 서로 절대 연락 안 해요. 무엇보다 담당자는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요.”
“그렇구나.”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사이라니. 게다가 상대는 결혼까지 했고.
초조하고 불안한 감정이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눌렀다.
“아무튼 미안해요, 도해준 씨. 같이 술 마시고 있는데 전화를 받아서.”
“아냐. 일 때문인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것도 진짜 미안한데, 술은 더 마시기 어렵겠어요. 담당자가 부탁한 일을 좀 해 줘야 해서요. 파일 확인하고 몇 가지 수정해 주면 끝나는 간단한 문제긴 한데,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아요.”
상황을 설명하는 서정연이 나보다 더 아쉬워 보였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모습에 급히 녀석을 달래 줬다.
“어차피 내일 행사장도 가야 하잖아. 술은 여기까지 마시는 게 맞아. 너야말로 이제부터 두 시간 동안 일해야 하는데, 안 피곤하겠어?”
“괜찮아요. 도해준 씨, 침실 안내해 줄 테니까 먼저 자요. 전 이따가 일 끝내고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서정연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코앞에 내밀어진 새하얗고 예쁜 손을 홀린 듯이 잡자 녀석이 단번에 나를 일으켜 세웠다.
“치우는 거 도와줄게.”
“내버려 두면 내일 오전에 사람 와서 알아서 치워 줄 거예요. 이리 와요.”
“으응.”
일으켜 세운 뒤에도 손을 놓지 않고 꼭 잡은 서정연이 그대로 앞서 걸어갔다. 술잔과 안주가 올려진 테이블이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서정연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도 않아서 얌전히 따라갔다.
2층으로 나를 데려간 서정연이 저번에 보여 준 손님방으로 향했다.
“도해준 씨가 온다고 해서 미리 정리해 놨으니까 편하게 써요. 새 칫솔은 2층 욕실에도 놔뒀으니 양치질도 여기서 하면 돼요.”
칫솔까지 준비했다니, 진짜로 세세한 부분까지 다 신경 써 줬구나. 새삼스럽게 감동이 밀려왔다.
달칵, 손님방 문을 연 서정연이 불을 켰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협탁, 테이블, 옷장까지. 손님방인데도 가구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전 1층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을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내려오거나 전화해요.”
서정연이 느릿하게 손을 놓았다. 사라진 온기에 눈을 깜빡이는 사이 방 밖으로 나간 서정연이 문을 닫아 주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해 왔다.
“잘 자요, 도해준 씨.”
“……잘 자.”
그걸 끝으로 서정연이 문을 닫아 주고 방을 떠나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서정연이 떠나간 후에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
카페에서 일도 하고, 서정연과 술도 마셨건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방 불을 끄고 침대에 눕고 나서도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척였다. 낯선 느낌은 당연히 있었지만, 잠자리가 불편한 건 아니었다. 불편한 건 몸보단 마음이었다.
집주인인 서정연은 밑에서 일하고 있는데, 손님인 내가 이렇게 잠이나 자도 되는 건가? 물론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만.
심지어 서정연은 이따가 행사장까지 운전도 해야 하잖아. 술 마시고 일을 하는 바람에 많이 피곤할 텐데. 아무리 운동을 해 왔다지만 사람인 이상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하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는 몇 시간이 지나도 잠들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1층으로 내려가서 물도 한잔 마시고, 서정연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게 나을 거 같다.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새벽 5시가 넘어간 늦은 새벽이었다. 서정연도 진작에 일이 끝나고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작업실에서 일한다고 했으니까 거기에 없으면 침실에서 자는 거겠지.’
조심스럽게 방을 나서서 1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집 안 곳곳에 작은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는 덕분에 어둡지 않았다.
거실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유독 강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복도 안쪽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가까이 다가가 방문을 열어 보자 환하게 불이 켜진 방 안과 서정연이 보였다.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가서 주위를 살펴봤다. 책상에 놓인 서류들과 책, 노트북. 방 벽면을 채운 책장을 보아하니 여기가 작업실이 분명했다.
서정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작업하다가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다. 의자 등받이 각도가 살짝 내려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에는 불편해 보였다.
침실로 가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잠들어 있는 서정연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겨우 눈붙인 상대를 섣불리 깨울 수도 없었다.
‘담요라도 없나?’
혹시 하는 마음에 근처를 둘러보자 방 벽면에 붙어 있는 옷걸이에 걸린 카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라도 덮어 줘야겠다.
카디건을 들고 서정연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아주 곤히 잠들었는지, 내가 카디건을 활짝 펼쳐서 몸 위에 덮어 주는데도 서정연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속눈썹 엄청 길다.’
가지런하고 길게 뻗은 속눈썹이 마치 인형 같았다. 새하얀 뺨과, 그림자가 진 높다란 콧대에도 시선이 갔다.
곧이어 그 아래, 적당히 혈색이 감도는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목덜미로 열기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