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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96)화 (98/132)

96.

“일 잘했어요, 도해준 씨? 고생했어요.”

열린 차창 너머에서 서정연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찬 목소리에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기분 좋아 보인다?”

“당연하죠. 드디어 도해준 씨가 우리 집에 하루 자는 날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기분 좋은 이유가 되는 건지 물어본 건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내일은 아크로드 4주년 기념 이벤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초대장에는 오후 2시까지 오라고 했으니, 오늘 서정연의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같이 준비해서 출발하면 충분할 거다.

“정이는?”

“집에 있어요. 오늘은 낮에 이미 산책 다녀왔거든요.”

차를 출발시킨 서정연이 연신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도해준 씨랑 집에서 같이 놀려고 일부러 낮에 산책시켜 놨어요. 가서 저녁부터 먹어요. 그다음에는 영화를 봐도 좋고, 게임을 해도 좋아요. 도해준 씨 하고 싶은 거 해요.”

“나도 아무거나 좋아.”

평소와 달리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서정연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났다.

내가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저렇게 좋을까? 서정연이 이런 걸 속일 성격도 아니고, 이만큼 들뜰 정도면 진짜로 신났다는 건데. 어쩐지 그게 좀 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았다.

‘물론 난 속 편하게 좋아할 수는 없지만.’

뺨을 긁적인 나는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하자. 서정연의 집에 놀러 가서 밥 먹고 게임 하는 건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 그건 괜찮지만, 문제는 자기 전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같은 침대를 쓰자고 하진 않겠지.’

서제현이 있었던 저번과 달리 오늘은 정말로 우리 둘뿐이니까. 당연히 손님방을 나한테 줄 거다.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혹시 모르니까 각오를 해 둘 뿐이다.

카페와 서정연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덕분에 금방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 현관으로 향하자 정이가 짖는 소리가 현관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왕! 망! 마앙!

현관문을 열자 꼬리를 열심히 흔들던 정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아 달라고 팔짝팔짝 뛰는 정이를 안아 들며 서정연이 내게 말했다.

“가방에 갈아입을 옷 들어 있는 거 맞죠? 저녁 식사 준비하는 동안 아예 씻고 옷도 갈아입을래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거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딱 멈췄다.

‘뭐, 뭐야. 저 신혼부부끼리 할 법한 대사는?’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가 있지? 완전 반칙 아냐?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 난 괜찮아. 저녁 준비하는 거 도와줄게.”

“아까 미리 해 놔서 혼자서도 금방 해요.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면 좋잖아요. 어차피 자고 가는 건데.”

“…….”

마지막 말에 얼굴에 열기가 확 치솟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빨갛게 변한 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나는 온통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도망치듯 욕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서정연이 직접 차린 메뉴는 평범한 한식이었다. 흰쌀밥과 찌개, 몇 가지 나물 반찬과 고기반찬. 아무래도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분이 왔다 간 모양이다.

와인 안주에 초점을 맞췄던 지난번 저녁 메뉴와는 확실히 달랐다.

‘하긴, 내일 행사장에 가야 하니까 술을 마시는 건 좀 그렇지.’

이번에도 절대… 기대한 건 아니다!

맨정신에도 불안한데 술이라니, 당연히 안 되지. 덜 말라서 살짝 축축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튼 생각을 멀리 밀어 내는데, 뒤에서 새하얀 손이 어깨를 잡아 왔다.

“도해준 씨.”

“어?”

저녁을 준비한 다음에 다른 방 욕실에서 씻고 온 서정연이 나처럼 살짝 젖은 머리를 하고서 빙긋 웃었다. 가까이 마주 선 탓에 서정연의 체향이 확 풍겨 왔다.

“밥 먹고 술 한잔 간단하게 할래요?”

“어……?”

“생각해 봤는데요.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해도 좋지만, 같이 술 마시면서 얘기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내일 일정이 있으니까 도수 낮은 과일주는 어때요?”

기다란 눈꼬리를 살살 접어 웃는 예쁜 얼굴과 코끝에 아른거리는 향기에 정신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던 나는 그 말에 멍하니 입을 열었다.

“과일주…….”

“마실 거죠?”

“으응.”

대답하자마자 번뜩 이성이 돌아온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 어깨를 밀어서 친히 의자에 앉혀 준 서정연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맛있다고 소문난 과일주가 있거든요. 제가 이럴 때 아니면 술 마실 일이 언제 있겠어요. 도해준 씨가 없었으면 저 술도 저번 와인처럼 버려야 했을 거예요. 그럼 아깝잖아요.”

“저기, 그…….”

“저녁 먹고 나서 마시는 거니까 안주는 저번보다 간단한 게 좋겠죠? 일단 밥부터 먹어요. 도해준 씨가 좋아하는 갈비찜도 있어요.”

뒤늦게 마시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젓가락을 드는 서정연을 마주하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삼켜 내고 젓가락을 들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는 저번과 똑같이 소파 앞 테이블에 술상을 차렸다. 보기만 해도 상큼하고 달아 보이는 샛노란 사과주와 잔 두 개, 간단한 간식거리가 놓였다.

와인을 마셨을 때와 비교해 보면 차려진 게 매우 간단했다.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었다. 도수가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고, 많이 마실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남의 집에서 두 번이나 취하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으니 오늘은 꼭 제정신을 유지하고 싶었다.

아웅.

내 허벅지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던 정이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어느새 시간은 밤 11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안 피곤하면 술 조금만 마시고 같이 게임 해요. 아니면 영화 볼까요?”

“게임도 좋아.”

내 잔에 술을 따라 주는 서정연은 아까 퇴근하고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기분 좋아 보였다. 턱을 괴고서 그 모습을 바라본 나도 가슴 속에 간지러운 감정이 번져 나갔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놀러 올 걸 그랬다. 서정연의 집에서 얌전히 하룻밤 잘 자신이 없어서 계속 거절했던 건데, 막상 와 보니까 저번 같은 사고가 벌어질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난감한 상황이 자주 일어날 리가 없긴 해.’

지레 겁먹고 놀러 오라는 서정연의 말을 몇 번이고 거절한 게 좀 미안해졌다.

오늘은 서정연이 하자는 대로 다 해야겠다. 술 마시고 싶으면 마셔 주고, 게임 하고 싶으면 같이 하고.

“그러고 보니 말해 주려고 했는데, 성하연 말이에요.”

“성하연?”

“네. 새벽쯤에 메시지 보냈더라고요. 다음 주 주말에 레이드 가지 않겠냐고 하던데, 아무래도 스타그램 디엠 소식은 아직 모르나 봐요.”

“모른다는 게 더 신기하네. 그때 서제현하고 대화를 나눈 여자분이 정말로 친동생이라면 성하연하고 한 번쯤 대화를 주고받을 만할 텐데.”

내 말을 들은 서정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술로 채워진 잔을 건네줬다.

“음, 도해준 씨는 외동이라고 했죠?”

갑자기 외동 얘기는 왜 하는 거지? 어리둥절해진 사이, 이어서 자신의 잔에 똑같이 술을 채운 서정연이 장난스럽게 잔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도해준 씨가 말한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형제도 있지만, 서로 연락은커녕 얼굴도 잘 안 보는 형제 사이도 많아서요. 만약 성하연이 정말로 친오빠라고 해도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으음, 아무리 그래도 자기 친오빠 일인데.”

“뭐… 나중에 만나면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 줘야지, 이 정도로 생각한 거 아닐까요? 사실 이건 다 제 추측이고, 성하연이 이미 들었는데도 모른척하는 걸 수도 있고요.”

“이렇든 저렇든 이상한 놈인 건 확실해.”

한숨을 내쉬며 술을 한 모금 마신 나는 입 안 가득 퍼져 나가는 사과 맛에 눈을 깜빡였다.

“맛있네.”

저번 와인보다 훨씬 달면서 부담이 덜했다. 짧은 감상 한마디에 서정연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요. 한 병 더 사 둘 테니까 다음에도 같이 마셔요.”

“또 자러 오라고?”

“뭐 어때요. 오늘 자고 가면 벌써 두 번인데요. 두 번이나 세 번이나.”

“세 번으로 끝날 거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내 투덜거림에 서정연이 부정하지 않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나와 서정연 사이의 분위기가 오늘 하루 중에서 제일 편안하고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소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비워 나갔다. 함께 속도를 맞춰 가며 마시다 보니 각자 석 잔씩 비우자 술병도 슬슬 바닥이 보였다. 시간도 어느새 자정이 다 되어 갔다.

“아쉽네.”

술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아서 이대로 끝내기엔 솔직히 아쉬웠다. 내 한탄을 들은 서정연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물었다.

“다른 과일주가 더 있긴 해요. 그것도 도수가 높진 않은데, 가져올까요?”

술기운이 올라와서 목덜미가 뜨끈뜨끈한 나와 달리 서정연은 멀쩡해 보였다. 저번에 도수 높은 와인을 마시고도 멀쩡한 모습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서정연은 주량이 꽤 강한 게 맞나 보다.

“하지만 내일 아크 행사 가야 하는데.”

“이른 아침에 잡힌 일정도 아닌데 뭐 어때요. 가져올게요.”

미처 거절하기 전에 서정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어쩐지 거절할 틈도 안 주려는 것처럼 보여서, 혹시 서정연도 나와 술을 마시는 지금 이 시간이 마음에 드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서정연이 새 술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우우웅!

테이블에 올려놨던 서정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쉬지 않고 진동하는 걸 봐선 문자나 메시지가 아닌 전화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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