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이걸 정말 믿어도 되나…….’
서정연의 화사한 미소를 마주하자 도리어 더욱 불안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게임사 직원 만나는 일은 제가 잘 해 볼게요. 어차피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일단 칠화검이 경매장에 올라온 게 맞는지부터 확인해 보죠. 그건 도해준 씨한테 맡길게요.”
“으음, 알겠어.”
무기 확인도 중요한 문제였으니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를 끌어 올린 서정연이 동영상을 껐다.
“그리고 상의할 일이 하나 더 있는데요.”
“엉?”
“성하연에 대한 얘기예요. 토요일에 성하연이 저한테 핸드폰 번호 달라고 한 거, 거절하고 끝냈잖아요.”
“아아.”
이런, 생각해 보니까 토요일에 그런 일이 있었지. 바로 다음 날 어나더와 PVP가 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루는 성하연이 난리고, 다음 날은 노퓨쳐랑 사칭범이 난리고. 이 자식들이 아주 번갈아 가면서 사람 귀찮게 만들고 있네.
“새로 산 핸드폰이 오전 중에 개통이 끝나서요. 여기 오기 전에 성하연하고 번호 교환을 했어요.”
“뭐? 진짜?”
“네. 이게 성하연 번호예요.”
서정연이 품에서 처음 보는 핸드폰을 꺼내서 내게 건네줬다. 화면 잠금을 풀자 바로 전화 기록부에 ‘ㅅㅎㅇ’이라고 저장된 번호 하나가 떴다.
성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초성으로 저장된 그 이름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딱 하나 저장된 그 번호를 눈여겨본 나는 서정연에게 물었다.
“이 번호를 이제 검색해 보면 되는 건가?”
“음, 사실 검색도 이미 해 봤어요.”
서정연이 노트북에 떠 있던 동영상을 끄고, 대신 새로운 인터넷 페이지를 켜서 무언가 검색하기 시작했다.
“성하연의 핸드폰 번호와 100%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뒷자리 번호가 일치하는 사람은 있었어요.”
“뒷자리만?”
“네. 뒷자리 번호 네 개만요. 그중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데, 중간 번호는 성하연과 다르더라고요. 여기요.”
노트북에는 어떤 사람의 SNS 페이지가 떠 있었다. 나는 눈가를 좁히고 SNS 주인이 올린 사진을 살펴봤다.
“……여자네.”
심지어 팔로워 숫자가 꽤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사진을 도용해서 여자인 척하는 사람은 아닐까 싶어 업로드된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본인 사진이 확실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뒷자리 번호가 일치해도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는 어렵지 않나?”
“그렇죠. 하지만 성하연과 관련 있는 사람일 가능성은 커요. 보통 뒷자리 숫자 네 개는 가족끼리 맞추니까.”
“이 여자가 그럼 성하연의 가족일 수 있다?”
“뭐… 본인한테 직접 확인해 봐야죠. 제가 SNS는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이런 경우에 개인 쪽지 같은 거 보낼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거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음, 디엠이 열려 있긴 하네. 근데 대부분 디엠 보내도 안 읽는 경우가 많을걸. 특히 여자들한테 디엠 보내는 미친놈들이 워낙 많아서. 낯선 사람이 디엠 보내는 거에 호의적으로 답장 안 할 거야.”
그때였다. 잠자코 나와 서정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진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네가 하면 되겠네, 도해준.”
“나?”
“너도 스타그램 하잖아. 사진도 올리고. 방금 막 계정을 만든 사람이 보내는 디엠보단 네가 보내는 편이 볼 확률이 높겠지.”
유진호의 설명을 들은 서정연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휙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날카로운 눈초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좁히자, 서정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해준 씨, 스타그램 해요?”
“그, 이걸 한다고 해야 할지…….”
“하는 거 맞잖아.”
“아니, 그냥 친구들하고 놀 때 찍은 사진 올리거나 태그 당하거나 그게 다인데.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하지 않나?”
“전 안 하는데요?”
“난 안 하는데?”
“…….”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서정연과 심드렁히 대꾸하는 유진호의 모습에 괜히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치만 보는데, 서정연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말했다.
“도해준 씨 인기 많구나. 이런 SNS도 하고.”
“이게 인기랑 무슨 상관…….”
“저 얼굴을 보세요. 인기가 없게 생겼나.”
“나한테는 스타그램 한다고 말 한번 안 했으면서…….”
“이걸 굳이 말을 왜…….”
“전 도해준 씨가 맨날 게임만 하길래 이런 거 관심 없는 줄 알았죠.”
“……욕이냐?”
“너 한창 사진 올릴 때 여자들한테 디엠 엄청 왔…….”
“아, 그만! 닥쳐!”
탕! 카페 테이블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유진호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며 음료를 마셨다.
아무래도 이 두 놈을 붙여 둔 건 내 실수가 맞다.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둘로 늘어났잖아. 나는 이를 갈며 다시 성하연 얘기로 돌아왔다.
“그게 성하연의 번호가 맞긴 해? 가짜 번호를 주거나, 남의 번호를 줬을 수도 있잖아. 마음먹고 넷카마 짓을 하는 새끼가 자기가 쓰는 번호를 쉽게 넘겨줄 리가 없을 텐데.”
“뭐, 그럴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하죠. 근데 진짜 번호일 가능성이 더 커요.”
“어째서?”
“성하연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성하연은 우리가 요일 길드에서 잠입해 온 유저들인 줄 모르잖아요.”
어깨를 으쓱인 서정연이 말을 이었다.
“아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에, 돈은 펑펑 쓰고, 숫기도 없는 놈. 그게 성하연이 보고 있는 저예요. 새 번호를 만들어서 넘겨줄 만큼 조심해야 할 상대로 보이진 않겠죠.”
“…설마 그렇게 허술하고 멍청할 리가?”
“애초에 성하연은 헛소문 퍼뜨려서 도해준 씨 욕먹게 하는 역할이 다니까요. 딱히 노퓨쳐가 신경 써 주는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노퓨쳐는 사칭범만 신경 쓰긴 하지.”
내 대답을 들은 유진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묘하네. 왜 사칭범만 그렇게 챙겨 주는 거지?”
“우리야 모르지. 친한가?”
“사귀는 걸 수도 있잖아.”
“…둘 다 남자 아니냐?”
“그러니까.”
“……?”
이게 무슨 대화지? 혼란에 빠진 나를 두고 유진호가 서정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괜히 처음 만든 계정으로 디엠 보냈다가 본전도 못 찾지 말고 해준이 시키시죠. 보아하니 그 번호가 진짜인지 아닌지, 저 SNS 주인한테 물어봐야 확실해질 것 같은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하는 말에 서정연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SNS 하는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될 일인데. 도해준 씨한테 시킬 필요는 있을까 싶네요.”
“해준이가 하면 금방 결론이 날 일인데, 왜 다른 사람까지 끼어들게 하면서 처리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가까운 길 놔두고 먼 길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제가 도해준 씨를 좀 아껴서. 아까 도해준 씨 인기 많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도해준 씨가 여자한테 개인 디엠을 보내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하죠.”
“아아. 한마디로 해준이가 여자한테 디엠 보내는 상황이 별로다, 이건가요?”
“네. 그게 뭐 문제라도?”
“허…….”
당당한 서정연의 태도에 유진호가 기가 막힌다는 기색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끝으로 테이블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용히 둘을 지켜보던 나는 긴가민가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둘이 지금 싸우는 거야?”
“…….”
이 새끼는 뭐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유진호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중요한 얘기는 대충 다 한 것 같으니까 난 먼저 일어난다.”
“뭐? 잠깐.”
“휴, 미친놈들…….”
알 수 없는 욕을 중얼거린 유진호는 누가 붙잡을세라 도망치듯 재빨리 카페를 떠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린 유진호의 모습이 어이없었다.
저 정도로 서정연이 싫었던 건가? 그야 1년 동안 싸워 온 라이벌 길드의 길마였으니까 반기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도해준 씨.”
“엉?”
유진호가 가든지 말든지 시선 한번 안 주던 서정연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서정연을 바라보자 그가 턱을 괸 채로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서요?”
“어?”
“스타그램 재밌어요?”
“…….”
아직도 그 얘기에 꽂혀 있는 거냐고. 왜 자꾸 스타그램에 대해서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대답 못 해 줄 부분도 아니라서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진짜 친구들끼리 사진 올리는 용도로 쓰는 게 다야. 그마저도 요즘은 애들 안 만나서 접속 안 한 지 한 달도 넘었어.”
“흐음…….”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서정연이 곧이어 말했다.
“그럼 저도 할래요.”
“뭘. 스타그램을?”
“네. 도해준 씨가 한다니까 저도 갑자기 해 보고 싶어서요.”
“상관없긴 한데, 지금까지 안 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할 필요가 있나?”
“도해준 씨, 친구분들하고 찍은 사진만 올린다면서요. 저도 그렇게 쓰려고요.”
활짝 웃은 서정연이 품에서 또 다른 핸드폰을 꺼냈다. 녀석이 원래부터 쓰던 핸드폰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한 장 찍죠. 저 계정 만들어서 첫 사진 올려야 하니까.”
“지금? 나랑 찍겠다고?”
“저 도해준 씨 외에 다른 친구 없는 거 알잖아요. 빨리 옆자리로 와요. 사진 찍게.”
제 옆자리를 툭툭 치는 서정연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주춤 몸을 일으켰다. 서정연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니까 어쩐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