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게임에서 이런 식으로 비정상적인 플레이가 보인다면 보통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불법 프로그램으로 게임 시스템을 건드리는 경우. 흔히들 말하는 ‘핵을 쓴다’가 이 경우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업데이트 과정에서 생긴 게임 내 버그다. 버그가 없는 게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어찌 보면 불법 프로그램을 쓰는 경우보다 훨씬 가벼워 보이지만… 버그도 버그 나름이다.
알아낸 버그를 게임사에 문의하지 않고 개인의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건 충분히 제재 사유가 될 법한 일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계정이 정지당해도 할 말이 없는 문제기도 했다.
이번 같은 상황은 서정연이 언급한 대로 버그를 ‘악용’한 것이다.
“아무래도 버그는 블레이드 직업에 생긴 모양이에요.”
영상에 찍힌 문제의 부분을 끊임없이 돌려 보던 서정연이 입가를 매만졌다.
“버그가 특정 상황에서만 나타나니까.”
“창술사랑 배틀 메이지, 두 직업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으니까 확실히 블레이드가 문제겠네.”
내 말에 서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은날씨만 당했으면 애매했을 텐데 우리 부길마 씨가 몸소 확인해 주고 영상까지 찍어 준 덕분에 블레이드가 문제라는 게 한눈에 보이네요.”
어딘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서정연을 바라보던 유진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는 빼시죠.”
바로 옆자리라 그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서정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카운터 스킬이 적용되기 직전에 프레임 드랍이 발생하고, 그 직후에 바로 대미지가 들어온다… 그런데 카운터 스킬을 사용한 유저가 아니라 그걸 맞은 블레이드 문제라면…….”
타닥, 서정연이 동영상 재생 설정을 건드려서 한 장면에서 멈췄다. 가짜가 블레이드 전용 스킬을 사용하는 장면이었다. 그걸 본 유진호가 입을 열었다.
“좋은날씨도 저 스킬을 쓸 때 카운터를 써서 당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가짜가 일부러 카운터를 유도한 거였네.”
“솔직히 나쁘지 않아. 카운터로 반격하지 않아도 저 정도 대미지 스킬을 맞으면 손해가 크고, 그렇다고 카운터로 반격하면 버그로 처맞을 테니까.”
말을 하면서도 기분이 더러웠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감각에 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멍청한 사칭범이 떠올릴 만한 계획은 아니고… 노퓨쳐 작품인가.”
“그렇겠지.”
“아뇨, 중요한 건 이 버그가 아니에요.”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던 서정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버그가 아니라… 이 상황 전체가 이상해요.”
“상황 전체?”
“네. 도해준 씨, 아크가 마지막으로 업데이트한 게 언제인 줄 알아요?”
“마지막 업데이트? 솔직히 잘 모르는데.”
버그 픽스나 자잘한 업데이트 내역을 공개하는 건 게임사마다 다르다. 아크는 대체로 공개하는 편이긴 하지만, 사소한 버그 같은 건 굳이 홈페이지에 공지하지 않고 조용히 고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난 솔직히 내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버그를 고치든 말든 관심 없었다. 보상이 좋은 이벤트 업데이트나 새로운 아이템이 나온다는 소식 정도는 돼야 패치 내역을 확인하곤 한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유저들도 그럴 거다.
“그렇죠. 다들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노퓨쳐와 가짜는 저 버그를 어떻게 발견했을까요?”
“발견이라면…….”
“우연히 칠화검이 경매에 올라와서 그걸 샀고, 우연히 블레이드 스킬에 버그가 있다는 걸 알아냈고, 우연히 도해준 씨가 접속하지 않은 타이밍에 시비를 걸어왔다…….”
“…….”
“우연이 너무 많지 않아요?”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나는 무심코 주먹을 꾹 쥐며 서정연이 방금 한 말을 정리했다.
‘하나하나 따로 놓고 보면 말이 안 될 일들은 아니야.’
구하기 어려운 무기가 경매에 올라온 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블레이드 스킬에 숨겨져 있는 버그를 발견한 거? 가짜가 그간 아크를 열심히 해서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하필 내가 서정연을 만나느라 접속 시간이 늦어졌을 때, 어나더 길드가 PVP를 걸어온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이게 한 번에 일어난 거면…….’
더 이상 우연이 될 수 없다. 누군가가 철저하게 세운 계획이겠지. 서정연이 저런 의문을 품을 만했다.
“근데 대체 어떻게?”
나는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은 아까 서정연이 영상을 멈춰 둔 상태 그대로였다. 진짜 흔적과 똑같은 캐릭터가 새파랗게 빛나는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칠화검을 사는 거랑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PVP를 걸어온 건 어찌 가능하다고 해도, 버그는 쉽지 않을 텐데.”
“흠…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도해준 씨. 만약 봉술가 스킬 중에서 버그가 있다고 쳤을 때, 게임 플레이 중에 그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쎄. 어렵지.”
스킬이 많은 것도 있고, 특정 상황에서 발생하는 버그를 찾아내기엔 경우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버그 하나를 게임하면서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맞아요. 찾는다고 해도 정말 희박한 확률에 운 좋게 걸렸을 뿐이겠죠.”
순순히 내 말에 동의한 서정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버그를 찾는 게 일이라면요?”
“뭐?”
“버그를 찾는 게 일이고,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 움직이고, 발견된 버그를 팀끼리 공유한다면요?”
“…….”
“블레이드 스킬에 버그가 있다는 걸 알게 될 확률이 어마어마하게 커지겠죠.”
나는 그제야 서정연이 뭘 의심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노퓨쳐가… 아크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노퓨쳐만 직원일 수도 있고, 사칭범을 포함해서 둘 다 직원일 수 있죠.”
단호한 대답에 머리가 아파졌다. 서정연이 생각한 대로 노퓨쳐나 사칭범, 혹은 둘 다 아크 직원이라면 이 일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해질 테니까.
더 이상 게임 내에서 유저들 간의 길드 싸움을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불법 프로그램을 사서 쓰는 유저였으면 게임사에 신고라도 넣었지, 정작 그 게임사에 소속된 직원이 문제를 일으킨 거라니.
‘이 새끼들은 정신이 나갔나. 게임 회사 직원이면서 버그를 악용해?’
만나서 제정신이냐고 멱살 잡고 흔들면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마를 짚은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 진짜 그런 거라면… 이 영상을 증거로 게임사에 연락이라도 해서…….”
“절대 안 돼.”
유진호가 딱딱한 음성으로 내 말을 끊었다.
“게임사 놈들을 뭘 믿고 이 영상을 넘겨? 절대 안 돼.”
“아니, 나도 딱히 믿는 건 아니긴 한데.”
“영상만 가져가고 별다른 처분 없이 넘어갈 수도 있어.”
“그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커뮤니티 같은 곳에 영상 올려서 공론화라도 해야지. 넘긴다고 영상이 지워지는 것도 아닌데.”
“성가시게 뭐 하러 그래? 처음부터 커뮤에 영상 올려서 공론화하면 되잖아. 게임사 놈들 욕 처먹게 만들어야 처분도 제대로 할 거 아냐?”
“오…….”
신박한데? 아무래도 유진호는 게임사와 논의를 거친다는 방법은 고려해 볼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영상 주인이 유진호이니 녀석이 반대한다면 굳이 밀어붙일 의향은 없지만, 그렇다고 정말 냅다 공론화부터 하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닐 텐데.
“하, 쓸데없이 복잡해졌어.”
그대로 놔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다른 곳에 공개해서 일을 키울 수도 없다.
이걸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해서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서정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도 바로 공론화하는 건 반대예요. 다른 문제가 더 생길 수 있고, 노퓨쳐 쪽에서 어떻게 반응해 올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건 게임사도 마찬가지예요. 신고받고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우리는 모르죠. 양심적으로 처리해 줄 수도 있고, 숨기려 들 수도 있고.”
“하지만 저놈들이 직원이라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고용주인 회사야. 게임사를 무시하고 해결할 수는 없어.”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신고’가 아니라 ‘제안’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안?”
“게임사 쪽에 제안하는 거예요. 그쪽 회사 직원들이 버그를 악용하고, 게임 내 아이템을 멋대로 건드리고 있다고. 뭐, 아이템은 추측이지만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으니까 저 정도는 끼워 넣어도 괜찮겠죠.”
“…….”
활짝 웃으며 말하는 서정연에게서 어쩐지 사기꾼의 냄새가 났다.
“그때 PVP를 목격한 다른 유저들은 좋은날씨와 우리 부길마 씨가 카운터 스킬에 실패한 거로 보였을 테니까, 증거는 이 영상이 유일하잖아요. 그러니 이걸 최대한 써먹어야죠. 아까우니까.”
“난 찬성해.”
유진호가 냉큼 맞장구를 쳤다.
게임사에 지고 들어가는 모양새보단 서정연이 말한 ‘제안’이 더 마음에 드나 보다. 하필 꼬인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그런가,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나는 다시 한번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 좋은데, 제안을 어떤 식으로 하게?”
“그야… 제대로 하려면 게임사 직원들을 직접 만나야겠죠? 이왕이면 직위가 좀 있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이 우리를 쉽게 만나 줄 리가 없잖아.”
“도해준 씨.”
서정연이 나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가는, 신실한 성직자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
그래서 걱정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