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안녕하세요.”
미소와 함께 건네 오는 인사를 들은 유진호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도해준 씨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오랜 친구라면서요?”
“…….”
그 말에 유진호가 고개를 천천히 내 쪽으로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크흠, 이 사람이… 흔적이야.”
“흔적?”
유진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나와 서정연을 번갈아 보던 녀석이 이내 알겠다는 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여기 단골이라고 했던가?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인사하는 유진호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채로 서 있는 서정연 사이의 공기가 어쩐지 서늘했다.
두 사람 다 얼굴에 감정이 보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첫 만남이라 어색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로 불편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껴서 눈치만 보던 나는 일단 알바부터 끝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뒷정리하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네에.”
“그러든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싸우지 말고.”
“싸울 리가요.”
“가기나 해.”
웃으며 대답하는 서정연과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유진호가 영 불안해서 발길이 자꾸만 멈췄다. 두 사람을 힐끔거리다가 겨우 등을 돌리고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역시 오지 못하게 말릴 걸 그랬나.’
옷을 갈아입으며 아까 봤던 서정연과 유진호 사이에 차가운 분위기를 다시 떠올렸다.
솔직히 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서정연과는 몇 개월간 하루가 멀다고 만났지만 누군가를 소개해 준 적은 지금이 처음이고, 유진호에게도 동네 친구가 아닌 사람을 소개해 준 건 처음이었으니까.
두 사람하고 친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니까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바꿔야 할 텐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닌 것 같다…….’
서정연은 당연하고, 유진호도 애가 워낙 성격이 흔들림이 없어서 내가 노력한다고 바뀔 녀석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는 둘 다 나보다 어른스러워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어른스러운 것보다 탑처럼 높은 경계심이 더 큰 문제였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서 매장으로 나오자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서정연과 유진호가 보였다.
서정연은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 있었고, 유진호는 서정연에게 눈길도 안 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 꼴을 보자 머리가 절로 아파졌다.
‘집에 가고 싶다…….’
***
우리는 근처에 있는 다른 카페로 장소를 옮겼다. 예전에 서정연과 함께 부캐를 만들었던 그 카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정연이 노트북을 꺼내 들며 말했다.
“영상 찍은 걸 봐야 한다고 해서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노트북을 챙겨 왔어요.”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잘했지? 칭찬해 줘’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노트북이 있으면 더 큰 화면으로 편하게 볼 수 있긴 한데.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연락하기 전에 이미 출발했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근데 영상 보게 될 건 어떻게 알고…….”
미묘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던 서정연이 곧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주문을 안 했네요. 뭐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
이 자식이.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나한테 이미 출발했다고 연락했던 건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내가 어이없는 심정으로 서정연을 노려보는 사이에 유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콜릿 프라페 라지 사이즈에 헤이즐넛 시럽 두 번 추가해 주세요.”
“뭐? 너 단 거 싫어하잖…….”
“사 준다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래요. 도해준 씨는요?”
“어? 난 그냥 에이드 아무거나…….”
“왜요? 도해준 씨도 이왕 온 거 더 맛있는 거 마셔요. 친구분이랑 같은 초콜릿 프라페 어때요?”
“괜찮긴 한데.”
“주문하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노트북을 놔둔 채로 서정연이 미련 없이 카운터로 갔다. 나는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유진호에게 따지듯 물었다.
“야, 유치하게 왜 이래?”
“뭐가.”
“일부러 비싼 메뉴 시킨 거잖아. 단 거 입에도 안 대는 새끼가 갑자기 뭔 초콜릿 프라페야?”
“재수 없잖아.”
당당하게 욕하는 유진호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도해준. 난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안 잊어.”
“…자랑이다.”
“흔적한테 개처럼 얻어맞고 땅바닥 구른 게 불과 작년인데 마주 앉아서 하하 호호하고 싶겠냐?”
“…….”
지가 실력 딸려서 처맞은 거구만, 무슨…….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유진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더러운 블레이드… 그 개사기 작업 하는 놈들치고 정상적인 놈을 본 적이 없어. 저 자식도 생긴 것만 멀쩡하고 속은 이상할걸. 아니, 너랑 같이 1년 동안 그 난리 친 걸 보면 이상한 게 맞다.”
“뭐 인마?”
“원래 또라이끼리 통하는 게 있다잖아.”
탁, 열 받은 내가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자 유진호가 내 손목을 붙잡아 막았다.
“뭐 해요?”
그리고 그걸 자리로 돌아온 서정연이 목격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싸우기 직전이라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괜히 헛기침하며 유진호의 손을 뿌리쳤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와 유진호를 둘러본 서정연이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놨다.
생크림이 한가득 올려진 초콜릿 프라페 두 잔과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수프가 담긴 접시까지.
“도해준 씨, 일 끝나자마자 왔으니까 배고플 것 같아서 식사 메뉴도 추가했어요. 빈속에 찬 음료 마시지 말고 수프부터 먹어요.”
“어, 어?”
“자요.”
당황하는 내게 손수 수저를 쥐여 준 서정연이 수프 접시를 앞으로 밀어 줬다.
그간 서정연이 날 이렇게 챙길 때가 종종 있어서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 유진호도 같이 있는 탓에 좀 눈치가 보였다.
“허…….”
역시나 턱을 괴고서 나와 서정연을 구경하던 유진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크흠, 잘 먹을게.”
“네.”
서정연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나야 친구 앞에서 애 취급을 받으니 창피할 수밖에 없지만 서정연이 날 챙겨 준 건 사실이니까 고맙게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수프를 떠먹자 서정연이 유진호를 향해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제 영상이나 보자.”
잘들 논다는 표정을 지은 유진호가 핸드폰을 꺼냈다.
영상은 유진호가 따로 담아 온 핸드폰에만 있던 터라, 번거롭지만 서정연의 메일로 영상을 보낸 뒤에 노트북으로 재생하는 방법을 택했다.
“좋은날씨가 찍은 영상은 없긴 한데, 죽은 방식은 동일하니까 내가 찍은 영상만 봐도 충분할 거야.”
영상을 켜자 가짜 흔적과 대치 중인 유진호의 캐릭터가 보였다. 순식간에 수프 한 그릇을 모두 비운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말했다.
“지금은 칠화검이 아니네?”
“중간에 바꿔서 끼더라.”
“사칭범이 무기도 바꿨어요?”
서정연의 질문에 나보다 먼저 유진호가 대답했다.
“풀강 칠화검으로 바꿨습니다.”
“풀강 칠화검이라… 나쁘지 않네요.”
서정연이 가진 천성검보다 성능도 위력도 모두 부족하지만, 저런 가짜가 끼기에는 지나치게 쓸 만한 무기이기도 했다.
“찝찝한데.”
영상 중반쯤, 유진호가 설명한 대로 몇 대 얻어맞은 가짜가 갑자기 무기를 바꾼 채 달려들었다. 그 장면을 보자 궁금해졌다.
“강화를 끝까지 한 칠화검이라면 가격은 둘째치고 구하기 어려운 무기잖아. 어떻게 저걸 사칭범이 들고 있는 거지?”
“흐음…….”
영상을 멈추고 가짜가 들고 있는 무기를 살펴본 서정연이 입을 열었다.
“풀강 칠화검이 경매나 거래 사이트에 올라왔다면 그걸 본 사람들이 있을 텐데, 혹시 알 수 있어요?”
“길드에 있는 장사꾼한테 물어볼게.”
서정연이 꽤 날카로운 부분을 짚어 줬다. 확실히 풀강 칠화검 정도 되는 무기가 경매에 올라왔으면 다른 유저들도 구매하려고 달려들었을 텐데, 그 상황을 장사꾼들이 놓쳤을 리가 없다.
“장사꾼들이 본 게 없다면 풀강이 아닌 평범한 칠화검일 거예요. 근데 그것도 쉽지 않잖아요. 강화하다가 무기가 파괴될 텐데. 지금 서버에 칠화검 물량이 강화를 풀로 할 정도로 많지 않으니까.”
“서정연, 넌 그러면 이 무기가…….”
“네. 무기를 정상적인 루트로 구했을지 의심이 가네요.”
정말로 운이 좋아서 경매장에 올라온 풀강 칠화검을 발견하고 구매했거나, 그보다 더 미친 운으로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풀 강화에 성공했거나, 이 모든 게 아니라면…….
“무기는 장사꾼한테 물어봐서 답변이 어떻게 오냐에 따라 달라지겠네요. 우선 영상부터 마저 보죠.”
탁, 서정연이 키보드를 경쾌하게 두드리자 멈췄던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가짜 흔적이 무기를 갈아 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우리가 기다렸던 장면이 나왔다.
블레이드의 W 스킬과 그걸 받아치는 유진호의 카운터 스킬. 두 캐릭터의 무기가 부딪치자마자 영상이 렉 걸린 것처럼 한순간 뚝 끊겼다가 풀렸고, 유진호의 캐릭터는 공격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유진호가 브리핑해 준 덕분에 일부러 카운터 스킬을 쓰지 않고 가짜를 상대했던 나와 PVP를 참여하지 못한 서정연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눈가를 좁힌 서정연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카운터 스킬이 발동됐다는 효과음까지 들리는데 실패 판정이 떴네요.”
“하필 카운터 스킬이 시전되는 순간에 화면이 멈춘 것도 이상하고.”
서정연이 방금 그 장면을 계속해서 반복 재생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부자연스러운 순간인 건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영상을 여러 번 확인한 서정연이 말했다.
“핵인가 싶지만… 국내 알피지 게임에서 핵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불법 프로그램도 누군가가 만들어야 쓸 수 있는 거니까. 아크에 불법 프로그램이 생겼다면 진작 난리가 났을 거예요.”
“그럼…….”
핵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서정연이 뒷말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보기엔 버그를 악용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