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어제 잘 들어갔어요?”
“…….”
부드러운 목소리에 손끝이 움찔 떨렸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날 보며 빙긋 웃고 있는 서정연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어제, 나는 큰마음 먹고 카페를 찾아온 서정연에게 알바가 끝나면 잠깐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난 토요일에 서정연과 했던 내기 결과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했고, 노퓨쳐가 이렇게 계속 조용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요.
내 제안을 들은 서정연은 흔쾌히 승낙하며 말했다.
-저번처럼 정이랑 다 같이 근처 공원으로 산책 가는 건 어때요? 산책시키면서 얘기하면 되니까.
-조, 좋아.
내심 거절하는 건 아닌지 긴장했던 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함께 정이를 산책시키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따 알바 끝나고 카페 다시 올게요.
-어, 으응.
알바 끝나고 나서 서정연과 정이 산책을 시키고, 밤에는 집에 가서 본캐 접속하면 일정이 딱 맞았다.
그렇게 약속을 잡아 놨었는데…….
“뭐,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죠.”
“…….”
서정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는 걸 보자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약속한 대로 알바가 끝난 후에 서정연을 만나러 간 나는 유진호가 급히 보내온 연락을 받았다.
노퓨쳐와 가짜 흔적이 길드원들을 대동하고 PK를 걸어왔다는 소식에 도저히 한가롭게 서정연과 정이 산책을 시켜 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서정연에게 양해를 구하고 만난 지 5분도 안 돼서 집으로 뛰어가야 했다.
“저도 구경하러 가고 싶었는데 정이 산책시켜 줘야 해서 보러 가지도 못하고.”
“뭐 볼 게 있다고…….”
“정이는 정이대로 도해준 씨가 오자마자 사라지니까 혼란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그건…….”
“정이랑 둘이 공원을 거니는데 얼마나 쓸쓸하던지…….”
“…….”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가 촉촉하게 빛나는 걸 보자 더 이상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아, 알았어! 미안하다고!”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서정연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좋냐? 좋아?
“장난이에요. 어제 다른 애들도 아니고 노퓨쳐랑 사칭범이 나타났다는데 당연히 가 봐야죠. 저도 가능하면 직접 가서 보고 싶었는데, 정이를 공원까지 데려가 놓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좀…….”
“좀 그렇지…….”
“그래서, 어땠어요?”
서정연이 카드를 내밀며 물었다.
“이겼다는 건 어제 도해준 씨가 문자 보낸 거 봐서 아는데, 단순한 PVP로 끝날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눈치 빠르네.”
“칭찬이죠?”
눈꼬리를 살짝 접은 서정연이 이어 말했다.
“저번 길전 이후로 한참 동안 조용하던 두 명이 대뜸 나서서 PK를 걸어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음, 맞아. 근데…….”
나는 어제 가짜 흔적과 싸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진호에게 귓속말로 들었던 브리핑도.
“정확히 따지자면 나랑 싸울 때는 평범했어. 아니, 내가 일부러 가짜의 헛짓거리에 말려들지 않은 거야. 실제로 겪은 건 내가 아니라 부길마와 좋은날씨거든.”
계산을 마친 뒤에 카드를 돌려주자 순순히 건네받은 서정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PVP 이후에 두 사람한테 뭐 더 들은 얘기는 없고요?”
“있긴 한데,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부길마가 사칭범하고 싸웠을 때 영상을 찍어 놨다고 하니까 직접 보면서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아.”
어제 있었던 가짜 흔적과의 싸움에서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던 건 유진호 덕분이었다. 유진호가 가짜 흔적과 직접 싸운 영상이 제일 중요했으니, 그걸 봐야 진전이 있을 거다.
“그럼 부길마랑 만나야 해요?”
“웬만하면 그럴 거긴 한데, 아직 몰라. 그 녀석이 일정 정리하는 대로 연락한다고 해서.”
“흐음.”
묘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진 서정연이 물었다.
“도해준 씨, 혹시 부길마 만나게 되면 저한테도 알려 줄 수 있어요? 언제 만나는지?”
“그래.”
서정연은 엄연히 관계자였으니까 당연히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유진호의 짐작이 맞으면 서정연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될 테니까.
“정말요?”
그 정도는 당연히 알려 줘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대답을 들은 서정연이 더 어리둥절해 보였다.
“정말 알려 줄 거예요?”
“그렇다니까. 부길마랑 얘기한 다음에 결론이 어떻게 나는지 궁금한 거 아니야?”
“뭐어… 네. 그 이유도 있긴 하죠.”
“……?”
저 애매한 반응은 뭐지? 찝찝해진 내가 조용히 노려보자 서정연이 냉큼 진동벨을 챙기며 말했다.
“그럼 오늘도 커피 잘 부탁해요.”
“허?”
마치 도망치듯 카운터를 떠나가는 서정연의 뒷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끔 저렇게 이해 못 할 행동을 한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커피 머신 앞으로 걸어갔다.
***
월요일은 카페에 손님이 유독 많은 요일 중 하나였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서정연은 낮에 잠깐 들렀다가 일을 마치고 저녁에 다시 돌아온다고 했고, 나는 나대로 오늘따라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커피를 만드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저녁이 찾아왔다. 퇴근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그때, 생각지도 못한 녀석이 카페를 찾아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미친놈…….”
뻔뻔하게 들이미는 카드를 낚아채며 욕설을 중얼거리자 상대가 입매를 비틀었다.
“알바 주제에 손님한테 욕을 하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살짝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로 걸쳐진 검은 뿔테 안경.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정 봐서 연락한다며? 왜 여기까지 쳐오고 난리야?”
“마침 오늘 시간이 비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계산해서 카드를 돌려줬다. 카드를 받은 유진호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어차피 곧 알바 끝날 시간이잖아.”
“야, 너만 바쁘냐? 나도 일정이라는 게 있는 놈이거든?”
“지랄 말고 끝나면 말해.”
가차 없이 대꾸한 유진호가 진동벨을 챙겨 주기도 전에 몸을 획 돌렸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서정연한테 말해야겠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서정연은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카페에 찾아오곤 했다.
‘어제 못다 한 대화를 좀 할 수 있나 했더니.’
어제 정이를 버리고 갔으니까 오늘이야말로 같이 산책이나 할까 했더니. 서정연한테 소원도 말해야 하는데.
유진호가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다 물 건너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서정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가 또 올거야?
나 일이 좀 생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