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87)화 (89/132)

87.

좋은날씨가 졌다고? 그것도 가짜 흔적한테?

눈앞에서 벌어진 승패에 유진호가 눈가를 좁혔다.

좋은날씨가 누군가. 요일 길드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이자 도해준이 인정한 근딜 유저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창술사 직업이 사기적인 대미지와 뛰어난 유틸성을 가진 건 맞지만, 결국 그걸 소화하고 활용할 줄 아는 건 개인의 실력이었다.

PVP에서 보여 주는 빠른 상황 판단과 그걸 뒤받치는 컨트롤 실력. 무엇보다 근거리 딜러가 해 줘야 할 플레이인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좋은날씨는 기가 막히게 잘 알았다. 도해준과 마찬가지로 게임 센스가 뛰어나고 흐름을 읽을 줄 안다는 뜻이었다.

직업별 랭킹전이 있었으면 좋은날씨는 분명 상위 자리에 들 만큼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런 놈이니, 자기한테 달려든 가짜 흔적을 상대할 때도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건 유진호의 의견도 같았다.

‘그런데 졌다고?’

왜?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물론 좋은날씨가 답지 않게 실수했을 수도 있다. 그게 하필 치명적인 실수라서 제대로 반격 한번 못 해 보고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는데.’

유진호는 아까 도해준에게 보낸 메시지 상태를 확인했다. 읽음 표시가 떠 있는 걸 보면 자신이 예상한 대로 도해준은 메시지를 받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헐레벌떡 접속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버티는 동안 유진호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깔아 둔 영상 녹화 프로그램을 켠 유진호가 가짜 흔적의 앞을 막아섰다. 원거리 딜러인 자신이 탱커나 근거리 딜러 없이 적과 이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건 좋지 않았다.

제 캐릭터와 마주 보고 서 있는 가짜는 지긋지긋하게 봐 온 흔적과 똑같았지만 단 하나, 들고 있는 무기만 달랐다. 강화는 최종 단계까지 마쳤는지 푸른빛이 선명하게 넘실거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짜와 위력이 비교될 리가 없었다.

진짜 흔적은 서버에 단 하나밖에 없는 블레이드 종결 무기를 갖고 있었으니까. 그 무기와 싸웠으면 자신이 아무리 집중한다 해도 3분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저 정도 스펙의 무기라면 해 볼 만해.’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한다. 그래야 좋은날씨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아낼 수 있겠지.

길드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만 유진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단순히 버티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가짜를 상대해서 원인을 발견하는 것, 그게 제가 해야 할 몫이었다. 어차피 가짜를 죽여 버리는 건 곧 도착할 제 친구가 해 줄 테니까.

탓, 유진호의 스태프에서 스킬 이펙트가 생겨나는 걸 본 가짜가 먼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유진호도 그 행동을 놓치지 않고 우선 실드를 켰다.

‘최소한 원딜을 상대할 때 무조건 붙는 게 이득이라는 건 알고 있네.’

카앙!

가짜가 들고 있는 장검이 새파란 실드에 부딪혔다.

실드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돌진기를 뒤로 써서 가짜와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린 유진호가 시전 속도가 빠른 스킬을 사용했다.

【아키로!】

유진호의 캐릭터가 마법을 시전하자 새하얗고 날카로운 얼음이 파도처럼 가짜를 덮쳤다.

맞으면 0.5초간 경직이 있고, 그 직후는 1초간 슬로우가 걸리는 CC기 스킬이었다. 고작 1.5초지만 유진호 입장에서는 가짜와 더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그걸 가짜도 알고 있는 듯이 망설임 없이 회피기를 사용해서 공격을 피했다. 유진호는 그것까지 예상했다.

【피닉스!】

유진호의 캐릭터가 스태프를 하늘을 향해 번쩍 들자 불로 만들어진 새가 나타나 가짜가 있는 곳으로 정확히 날아갔다. 처음에 얼음 마법을 쓴 순간부터 가짜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두 파악한 유진호의 연계 공격이었다.

쿠우웅!

가짜를 덮친 불새가 크게 폭발했다. 불길이 치솟으며 화면이 뒤흔들렸다.

연기 사이로 드러난 가짜의 체력이 40%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걸 본 유진호는 입매를 비틀었다.

유진호가 가짜와 싸워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가짜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훤히 보였다.

방금 그 공격은 원거리 딜러라면 한 번쯤 고려해 볼 법한 연계 공격이었다. 원거리 딜러보다 체력도 높고 공격 속도, 스킬 속도도 훨씬 빠른 근거리 딜러가 한번 붙기 시작하면 원거리 딜러는 도망칠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원거리 딜러는 CC기가 있는 스킬을 먼저 써서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 딜러 간에 약점을 가짜도 이해하고 있다면 방금 유진호의 공격을 아주 쉽게 꿰뚫어 보고 피했을 거다. 하지만 가짜는 그러지 못했다.

또, 아무리 시전 속도가 빠른 스킬을 골라 썼다지만 메이지 직업 특성상 스킬마다 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닉스 스킬을 카운터 스킬로 쳐 내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뜻이다.

‘진짜 흔적보다, 아니. 흔적까지 가지도 못해. 웬만한 유저들보다 못한다.’

게임 이해도도 딸려, 컨트롤 실력도 딸려, 노퓨쳐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걸 보면 결단력도 없어 보이고.

‘저놈은 정말 허수아비구나.’

그럼 좋은날씨는 대체 왜 가짜에게 진 거지? 그저 방심해서?

쯧, 혀를 찬 유진호가 다음 스킬을 준비했다. 이대로면 가짜가 금방 죽어 버릴 것 같으니 적당히 조절하기 위해 대미지가 조금 약한 스킬을 시전하려던 그때였다.

후웅!

새하얀 연기를 뚫고 가짜가 쏘아진 화살처럼 순식간에 날아왔다. 블레이드가 가진 돌진기였다.

거기까지는 유진호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스킬을 맞고 뒤로 밀려난 만큼 다시 거리를 좁히려면 돌진기 정도는 써 줘야 할 테니까.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뭐……!”

유진호에게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무기는 방금까지와는 달랐다.

블레이드 직업이 드는 장검은 워낙 화려하게 생겨서, 무기마다 구분이 굉장히 쉬웠다. 그러니 당황한 와중에도 가짜가 무기를 교체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겨우 실드를 켠 유진호가 가짜의 공격을 다시 막아 냈다.

카앙! 둥글게 생겨난 방어막을 건드린 가짜의 검은 아까처럼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지만, 손잡이에 달린 문양과 장식은 판이했다.

‘이거… 칠화검?’

일곱 개의 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해서 칠화검이라는 이름이 붙은 블레이드 전용 무기였다. 진짜 흔적이 쓰는 천성검보다는 하위 무기였지만, 칠화검도 서버에 몇 개 없는 구하기 어려운 무기인 건 맞았다.

저 무기를 어떻게 구했는지 의문은 뒤로하고 유진호는 우선 실드가 사라지자마자 오른쪽으로 회피기를 사용했다. 가짜가 놓칠세라 회피기를 써서 바짝 쫓아왔다.

근딜이 한번 붙으면 떼어 내는 건 어려웠다. 눈가를 찌푸린 유진호는 차라리 공격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스킬을 썼다.

콰앙!

유진호의 마법 스킬과 가짜의 스킬 공격이 서로에게 동시에 들어갔다. CC기가 없는 스킬이라 맞은 채로 버틴 가짜와 달리 유진호의 캐릭터는 바닥을 굴렀다.

“하, 딜 미쳤네…….”

제 체력 상태를 확인한 유진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체력이 절반으로 뚝 떨어진 걸 보자 역시 블레이드는 개사기 직업이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무기를 바꿔서 장착한 가짜는 공격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대미지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러니까 유저들이 눈 뒤집고 비싼 무기 끼려고 하는 거다.

키이잉!

가짜가 새로운 버프 스킬을 사용했는지 귀를 찌르는 소음과 함께 검날에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실드도, 회피기도 모두 사용한 유진호는 마지막 남은 카운터 스킬을 시전했다.

횡으로 길게 휘둘러지는 가짜의 검과 정면으로 뻗은 유진호의 스태프가 교차했다. 우웅, 챙! 카운터 스킬이 제대로 들어갔을 때 들리는 효과음에 유진호가 한숨 돌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지직!

마치 렉이 걸린 것처럼 화면이 뚝 멈췄다가 풀려나자 자신의 캐릭터가 허공을 붕 날아 땅에 처박혔다. 이내 화면이 회색빛으로 물들며 사망했다는 메시지가 화면 중앙에 떠올랐다.

“이게 무슨…….”

그 어이없는 광경에 유진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카운터 스킬이 씹혔다고? 수없이 카운터 스킬을 써 본 만큼 이번에도 타이밍은 완벽했다. 본능에 가까운 그 감각을 착각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방금 그 렉은 뭐지? 왜 하필 카운터 스킬을 썼을 때 렉이 걸리는 건지, 그거 때문에 화면이 멈춰서 제대로 된 확인이 어려운…….

‘…잠깐, 카운터 스킬을 썼을 때 렉이 걸렸다고?’

이거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유진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만약 자신이 떠올린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건 결코 게임 내 길드 문제로 끝날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방금 싸움을 모두 영상으로 녹화해 뒀다는 거다. 영상이 제대로 저장됐는지 확인하려던 유진호는 낯익은 닉네임이 채팅창에 나타난 걸 발견했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이 ****

[전체] 오늘은일요일: 뒤지려고 환장했지?

[전체] 오늘은일요일: *같은 **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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