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네?”
“당연히 안 되지.”
단호하게 나온 대답에 서정연의 얼굴이 묘해졌다. 어딘가 기대감에 차오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한 채로 말을 이었다.
“너 번호 노퓨쳐가 알고 있잖아.”
“아.”
“근데 성하연한테 어떻게 알려 줘? 둘이 하는 꼴 보면 분명 연락하는 사이일 텐데. 핸드폰 번호 대조하다가 뭐라도 알아채면 어떡하려고?”
“…….”
서정연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그래서 알려 주지 말라고요?”
“어.”
“이유가… 그게 다예요?”
“그럼?”
왜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하는지 모르겠다.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자, 그런 나를 본 서정연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또…….”
“뭐가. 불만 있으면 제대로 말해.”
“아니에요.”
대답은 아니라고 하면서 표정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잖아. 치솟는 의심에 눈가가 절로 좁혀졌다.
“설마… 번호를 주고 싶은 거야? 성하연한테?”
“아뇨, 아뇨. 그건 진짜 아니고요.”
“그럼 뭔데.”
어색하게 웃은 서정연이 어쩐지 주제를 돌리듯이 변명했다.
“아깝잖아요. 여기서 거절하면 이번에 겨우 좁혀 둔 거리가 다시 벌어질 텐데. 성하연의 입장에서는 나름 자기가 먼저 한 걸음 다가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건… 그렇긴 하네.”
우리의 목적은 성하연과 친해져서 개인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다.
이번에 핸드폰 번호를 물어 온 건 어쩌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순순히 동의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박을 걸 수는 없어.”
“흠…….”
“아쉬운 건 이해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괜히 번호 줬다가 노퓨쳐한테 꼬리를 잡히면 지금까지 해 온 거 다 말아먹게 생겼는데.”
조용히 내 말을 듣던 서정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도박 없이 번호를 줄 수 있으면요?”
“뭐?”
“어쨌든 결론은 번호를 주면 된다는 거잖아요. 아무 문제 없는 번호로.”
“그, 그렇지?”
이상하게 당당한 서정연의 태도에 괜히 내가 불안해졌다.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서정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려울 거 없죠. 번호를 새로 만들면 되니까.”
“번호를… 새로?”
“네. 핸드폰을 하나 더 사서 개통하는 건 금방 돼요.”
아, 그런 방법이. 진심으로 깜짝 놀란 내게 서정연이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사람 관계에서는 밀당이라는 게 중요하잖아요? 예전에 노퓨쳐가 길드 들어오라고 했을 때, 한 번 거절했던 것처럼요.”
“으음.”
밀당이라.
하긴, 그때 당시에는 길드로 들어오라는 노퓨쳐의 제안을 깔끔하게 쳐 낸 서정연의 모습에 기겁했지만… 결국 큰 문제 없이 어나더 길드로 들어오게 되지 않았나.
“새 번호를 바로 구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은 고민해 보겠다고 거절하고 개통이 된 후에 번호를 알려 주면 충분할 것 같아요.”
방금 떠올린 것치고는 깔끔하고 완벽한 계획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니, 그야 그렇게 해 주면 좋긴 한데. 정말 괜찮겠어?”
“뭐가요?”
“성하연 때문에 핸드폰을 새로 사는 것도 그렇고… 번호를 준 다음에는 성하연이나 저놈들이랑 계속 연락해야 하는 거잖아.”
나는 성격상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랑 연락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가시고 불편하고 귀찮으니까. 그래서 아무리 계획 때문이라지만 성하연에게 핸드폰 번호를 주고 연락을 해야 하는 서정연의 상황이 영 신경 쓰였다.
‘심지어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애초에 노퓨쳐와 성하연이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눈 돌아간 상대는 요일 길마인 나였다. 처음 시작이야 서정연이 길드로 잠입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온 천지에 적이 있는 건 나였다.
며칠 전, 서제현과의 대화에서 서정연이 밝힌 바로는 애당초 잠입이라는 번거로운 계획을 선택한 이유도 어나더 길드를 해체해서 더 이상 요일 길드를 건들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성하연 몫까지 서정연이 감당하겠다고 하니까 나는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서정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번거롭긴 하겠죠. 근데 번거로운 거 따지면 사칭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엄연히 따지면 성하연은 사칭 문제랑 별 상관없잖아.”
“왜 상관없어요? 다 쓰레기 같은 한통속인데.”
서정연이 입매를 비틀며 노퓨쳐와 성하연을 비웃었다.
“도해준 씨, 생각해 봐요. 번호는 나만 주는 게 아니에요.”
“엉?”
“성하연의 번호를 받으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예요. 핸드폰 번호는 개인 정보 중에서도 제법 쓸 만하니까.”
“어…… 어?”
당황하는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린 서정연이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인한테서 직접 받은 핸드폰 번호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는 건 불법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해서 뭔가 걸려들면 우리야 이득이고. 그렇죠?”
“으응……?”
“벌써 기대되네요. 성하연의 핸드폰 번호가 우리한테 무슨 선물을 안겨 줄지.”
“…….”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서정연에게서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서정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이 자식이랑 적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하는 나를 두고 서정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런데요, 도해준 씨. 말 나와서 묻는 건데. 혹시 노퓨쳐가 뭐 하고 다니는지 소식 들려온 거 있어요?”
“아니.”
방금까지 부캐로 레이드를 돈 우리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노퓨쳐가 워낙 길드 채팅도 하지 않고 모습을 보인 적도 없어서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 길드 접속 인원을 확인해 봤을 때, 노퓨쳐도 로그인해 있었으니까 아크를 하는 건 맞는데…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저렇게 조용한 거지?
“이상하네요. 저번 길드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내 생각도 그래.”
우리가 놓친 건 함께 부캐로 들어온 좋은날씨나 여여랑이 봐 줬을 텐데, 그 두 사람도 별소리 없는 거 보면 노퓨쳐가 아무런 활동을 안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수도 있고.
‘…불안한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겉모습만큼은 흔적을 완벽하게 따라 하던 사칭범과 노퓨쳐를 떠올린 나는 불길한 예감에 눈가를 좁혔다.
***
일요일, 레이드 던전 입구 앞에 도착한 유진호는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도해준: 1시간 내로 감ㅇㅇ」
이십 분 전쯤에 도착한 메시지였으니 앞으로 삼사십 분 뒤면 접속할 거다.
‘하여간 성가시게 한다니까.’
핸드폰을 다시 내려 둔 유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해준이 어나더 길드에 잠입하려고 길드원들을 데리고 부캐를 키운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매번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아서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지난번 길드 전쟁으로 얻은 게 아주 없진 않았으니 부캐 키우는 건 이해해 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본업… 아니, 본캐를 내팽개쳐 놓고 부캐만 주야장천 키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부길마인 자신이 빈자리를 채워 주고는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요일 길드는 시작이 도해준이었고, 길드 내에서 도해준이 가진 영향력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싸움질 좋아하는 유저들이 잔뜩 모여 있는 길드라 그중에서 가장 실력 좋은 도해준이 중심을 잡아 줘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호가 귀찮더라도 도해준한테 연락해서 본캐 접속을 종용한 거였다. 도해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받아들인 거고.
[길드] 류페: 오늘 ㄹㅇ일욜님 오심?!?
[길드] 마하: ㅇㅇ
[길드] 아스타로트: 일욜님 근데 요즘 진짜 뭐하세요?
[길드] 아스타로트: 겁나 바빠보이든데
[길드] 불좀켜줄래: 아 개강때매?
[길드] rxrx78: ㄴㄴ일욜님 내년 복학이라고 하지않음?
[길드] 영화별론가: 여친 생기셧나
[길드] 저6천원있어요: 헐........
[길드] sky004: 죽여버려.....
[길드] 야옹이라옹: 서우내 ㅠㅅㅠ
[길드] 여여랑: ㅋㅋㅋㅋㅋ
[길드] 좋은날씨: 죽이기까지??
[길드] sky004: 여친때매 접률 낮아진거면 죽여야지;;;;
[길드] 불좀켜줄래: 솔로의 저 애끓는 억울함.....
[길드] 아스타로트: 애끓는 질투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