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우주 저편으로 날아갈 뻔한 정신을 황급히 붙잡고서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러니까… 네가 지금 화난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라 방금 같이 레이드를 돌았던… 저 녀석들 때문이라고?”
“네.”
“어…… 왜?”
담담하게 나온 대답에 나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정연이 이토록 화가 난 이유는 분명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을 제멋대로 바꾼 거로 모자라 사고까지 제대로 쳤으니까.
“왜긴요. 재수 없잖아요.”
오히려 서정연은 내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도해준 씨한테 화낼 이유가 있어요?”
“그야…….”
이번 일로 우리는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여론전에 쓸 만한 영상 하나를 얻었지만, 정작 본래 목적인 성하연의 호감은 얻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게 됐다.
‘서정연이 나를 따라서 파티에 나올 때 그러지 말라고 말릴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 둘 다 제 발로 나왔으니 이제 와서 서정연만 다시 보내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그래서 난 서정연이 나한테 화가 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서정연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성하연에 대한 문제는 이번 한 번으로 해결되지 않잖아요. 레이드 그만한다고 했을 때 반응 보면 효과 자체가 없는 건 절대 아니고… 오늘처럼 몇 번 더 하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거예요.”
“그렇긴 한데.”
“도해준 씨 계획은 좋았어요. 다만 다른 놈들 반응이…….”
설명하던 서정연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방금과는 확연하게 바뀌었다.
화를 내는 서정연이 무서워서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서제현의 서글픈 변명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만큼 서정연은 웃고 있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컸다.
“좆같잖아요.”
“…….”
거침없이 나온 욕설에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좆같다니. 아니, 물론 나 자신도 욕을 적게 하는 편은 아니긴 한데. 설마 서정연이 이렇게 욕을 거리낌 없이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각해 보면 나랑 한창 싸우던 시절에도 욕을 하긴 했지.’
실제로 듣게 되니까 어색한 건 분명 있었지만, 흔적이었던 시절까지 포함하면 서정연이 욕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나한테는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간혹 했었고, 그 후로는 주로 비매너 유저들한테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어나더 길드원들이 내게 보였던 태도들은 서정연이 예전부터 굉장히 싫어하는 행동이긴 했다.
서정연이 왜 이렇게 불쾌해하는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넌 저런 놈들 싫어하니까.”
“음… 싫어하긴 하는데 그거 때문에 화난 건 아니에요.”
“다른 이유가 더 있다고? 뭔데?”
궁금해하는 나를 복잡한 눈을 하고서 잠시간 응시하던 서정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어요.”
눈가에 힘이 들어간 걸 알아챈 서정연이 자신의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덧붙였다.
“저 화병 나서 뒤로 쓰러질 것 같으니까.”
……그렇게까지?
정작 비난받은 나는 괜찮은데 서정연이 저렇게 화를 내 주니까 기분이 묘했다. 어쩐지 가슴 속이 간지럽기도 했다.
방금 저 상황에서 비난받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서정연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저 허접한 새끼들이 서정연한테 존나 못한다, 답답하다, 이딴 소리 늘어놓으면서 꼽 주고 난리 친다면…….
‘좆같은데?’
아까 서정연이 했던 감상이 똑같이 떠올랐다.
단순히 저놈들한테 눈치받은 거로 짜증 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계획이 있었으니 일부러 못하는 척을 한 거지만, 실제 실력은 서정연의 발끝에도 못 미칠 놈들이 꼴에 뉴비가 좀 헤맨다고 저딴 식으로 비꼬고 눈치 주는 게 같잖았다. 그리고 저런 취급을 서정연이 받았다고 상상하면 나 같아도 복장 터진다.
‘서정연이 왜 저런 말을 한 건지 알겠네…….’
게임을 못 하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이건 뭐, 게임도 못 하는 놈들이 하는 거라고는 레이드에서 쩔쩔매는 뉴비 꼽 주기라니.
만약 내가 진짜로 뉴비였으면… 이번 일은 거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였다. 실제로 레이드에 공포감을 갖고 어려워하는 유저들은 꽤 많았으니까.
레이드류 게임을 처음 시작했으면 어려워하고 헤매는 건 당연한 건데. 그런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빨리 게임에 적응하라고 도와주는 존재가 바로 길드였다. 그런데 길드원끼리 파티 맺어서 간 레이드에서 저럴 정도면 공팟에서는 얼마나 개판이라는 건지.
‘쓰레기 같은 놈들인 건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하네.’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서정연의 어깨를 붙잡고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어차피 나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거든.”
눈치 주는 거 거슬려서 일부러 클리어가 늦어지도록 많이 죽는 거로 복수하긴 했지만, 원래 이런 일은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게 아니라 당한 것보다 몇 배로 갚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감히 나보고 게임 못한다고 지랄해?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서정연이 기분 나쁘다니까 어쩔 수 없지.
“사칭 문제 해결한 다음에 저놈들 패러 가자. 본캐로!”
이로써 사칭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내 외침을 들은 서정연도 굳었던 표정을 풀고 픽 웃었다.
“패는 건 제가 할 테니까 도해준 씨는 뒤에서 구경해요.”
“당한 건 난데 왜 네가 패?”
“원래 이런 건 친구가 때려 줘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런가? 근데 이거랑 친구랑 무슨 상관인 거지?
긴가민가한 내가 눈동자만 굴리던 그때였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이 서정연의 컴퓨터에서 들려왔다.
“뭐야?”
“잠시만요.”
몸을 돌린 서정연이 잠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알림음의 정체는 디코 메시지였다.
[성하연] 똑똑
[성하연] 해월님ㅎㅎ
[성하연] 계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