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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80)화 (82/132)

80.

이왕 게임 얘기가 나온 거, 내친김에 나는 서제현에게 사칭범을 잡아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대충 설명해 줬다.

당장 토요일에 성하연 파티와 레이드도 가야 하고, 길드 전쟁에서 패배한 노퓨쳐가 어떻게 행동할지 계속 지켜봐야 했다. 그래서 서제현이 이렇게 자꾸 방해하면 일만 복잡해진다.

“이 개새끼들이 감히 누구를 사칭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정연의 사칭 문제이니 서제현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대로 서제현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분노했다.

“형, 당장 고소하자! 내가 김 변호사한테 연락할게!”

“…….”

분노 표출이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자기가 사칭당한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서제현을 바라보며 서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로 고소해.”

“당연히 사칭이지! 심지어 온라인 사칭이잖아. 그거 범죄 아냐?”

“날 사칭해서 금전적 이득을 취하거나 내 명예를 훼손하지도 않았는데 뭐로 고소하냐고.”

“어? 그, 그건…….”

“그리고 게임 닉네임은 사칭이 목적인지, 본인이 하고 싶은 닉네임을 했는데 우연히 겹쳤는지 입증하기 까다로워.”

“…변호사들이 알아서 해 주는 거 아니었어?”

“변호사들이 그런 증거를 어떻게 찾아서 다 해 줘. 기업 변호사들한테 게임시킬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는 조금 놀랐다.

서정연이 저런 부분까지 다 계획해 놓고 있었다니. 사실 나도 궁금했다. 왜 노퓨쳐와 가짜 흔적을 고소하지 않았는지.

‘나한테 길드에 들어가자고 제안한 건 그냥 가벼운 마음일 줄 알았는데.’

서정연은 사칭을 해결하기보단 노퓨쳐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길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더 큰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증거를 찾기 위해서 잠입한 거였구나.

“이런 사건은 사칭이 아니라 사기죄나 명예훼손으로 가는 게 나아. 그러려면 증거를 찾아야 하고.”

이어지는 서정연의 말에 나도 입가를 매만지며 상황을 정리했다.

서정연이 얘기한 것처럼 온라인상에서, 그것도 게임에서 사칭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서정연의 경우는 개인 정보를 딱히 밝히지 않았으니 더욱 그렇겠지. 연락처도 부길마인 노퓨쳐하고만 교환했으니까.

물론 고소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정연이 게임 내에서 본캐로 사칭범을 공론화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나더 길드와 요일 길드 간의 분쟁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런 경우는 아직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노퓨쳐의 뻔뻔함을 감안하면 사칭이 밝혀져도 길드를 해체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우리한테 시비 거는 것도 여전할 거고.

하지만 우리가 증거를 찾아서 법적으로 해결한다면 노퓨쳐와 사칭범은 더 이상 현 계정으로 게임 플레이하지 못할 것이다. 길마와 부길마가 사라지면 어나더 길드도 자연스럽게 해체될 거고. 결국, 요일 길드의 평화까지 고려하면 서정연의 계획대로 하는 편이 이득이었다.

‘설마 우리 길드까지 생각해 준 건가…?’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서정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제현에게 말하고 있는 서정연에게서 어쩐지 광채가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사람 써서 누군지 알아 올까?”

으음, 음, 한참을 고민하던 서제현이 밝게 외치자 서정연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헛소리 말고 공부나 해. 윤 비서님 차 타고 가도 오전 수업 다 날려 먹게 생겼는데 뭘 잘했다고 웃어, 웃기를.”

“윽…….”

“성적 잘 나오는 건 바라지도 않아. 최소한 출석 일수는 채워야지. 네가 아직도 중학생이야? 다른 학생들은 내신 챙기느라 정신없는데 넌 뭐 그리 잘났다고 지각이나 하고 앉아 있어.”

“아, 알았다고! 잔소리 좀 그만해!”

또 혼나네. 씨익거리는 서제현을 구경하다가 서정연에게 물었다.

“사칭범이나 노퓨쳐가 누군지 알아보는 게 정말 돼?”

호기심 가득한 내 질문에 서정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요즘 세상은 돈이면 다 되잖아요. 불법일 뿐이지.”

“오…….”

그럼 서정연은 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캐로 길드에 잠입하는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건가? 돈으로 사람 찾는 건 불법이니까?

‘좀 멋있는데?’

못해서 안 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 못하는 건 달랐다.

아무리 친하진 않더라도 1년간 호흡을 맞춰 온 부길마가 계정 삭제를 당한 사이에 사칭범을 데려와 길마 자리에 앉혔으니, 괘씸해서라도 누군지 알아보고 싶었을 텐데.

불법적인 방식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은 서정연이 이상하게 멋있어 보였다.

***

[너 뭐 하는 새끼야?]

“…….”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5일 전 접속? 길마가? 심지어 5일 전에도 1시간도 안 하고 꺼 놓고 양심 있냐?]

“아니, 그…….”

[수요일에 알바 쉬는 날이라고 해서 그땐 들어오나 했더니 아주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수요일에는 서정연의 집에서 노느라고 게임은커녕 컴퓨터를 만지지도 못했다.

[부캐했나 싶어서 좋은날씨한테 물어봤는데 부캐도 안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

[너 뒤지고 싶냐?]

단단히 빡친 유진호의 협박에 식은땀을 흘렸다.

확실히 시간이 없어서 본캐를 도통 하질 못했다. 요즘이라고 해 봤자 며칠 안 됐지만, 유진호의 말처럼 길드 전쟁이 끝난 후에 접속을 한 번도 못 한 건 사실이었다.

솔직히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알바에, 부캐 키우기에, 임소희가 맡긴 수정 요청도 곧 마감일이라 하루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 외에 남는 시간은 서정연과 만나야 했고.

‘장난 아니게 바쁘다고…….’

하지만 이걸 그대로 설명해 봤자 이미 화난 유진호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당당하게 외쳤다.

“미안!”

[하, 시발…….]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본캐 접속률을 높이려면 하루빨리 어나더 길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지랄 말고 오늘 당장 들어와.]

“오늘?”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힐끔 뒤를 확인했다. 거실에서 강아지 간식을 들고 있는 서정연과 그 앞에 입맛을 다시며 얌전히 앉아 있는 정이가 보였다.

“오늘은 안 돼.”

하필 성하연과 레이드에 가기로 한 토요일이었다. 그래서 알바가 끝나는 대로 서정연의 집에 온 참이었다.

머쓱하게 거절하자 유진호가 더욱 낮아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따위로 할 거면 차라리 날 길마를 시키든가.]

“어, 그럴래?”

반색하며 대답하자 곧장 어마어마한 욕설이 줄줄이 이어졌다.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유진호의 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 짐작보다 더 빡쳤네. 슬슬 한 번 달래 주는 게 낫겠다.

“농담이지, 농담. 내일은 본캐 접속할게. 오늘은 진짜로 부캐 레이드 선약이 있어. 넷카마 증거 잡아야 한다고.”

[좋은날씨랑 여여랑은 그런 소리 없던데?]

켁, 그건 또 언제 확인했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털어놨다.

“흔적이랑 나만 가는 거야.”

[흔적이랑 너만? 너 흔적이랑 진짜 뭐 있지?]

“있긴 뭐가 있어? 오해야.”

[뭔 오해.]

“…아무튼 내일 들어갈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유진호가 인사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하여간 성질하고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혀를 쯧쯧 차는 내게 서정연이 다가왔다.

“통화 끝났어요?”

“어. 내일은 본캐 좀 해야겠다.”

“부길마가 들어오래요?”

“내일도 안 들어가면 빡쳐서 카페로 찾아올지도 몰라.”

전화로 듣는 닦달을 현실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묘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던 서정연이 슬쩍 내 손을 잡아 왔다.

“그건 안 되죠. 내일은 꼭 본캐해요.”

“엉? 어.”

“이제 레이드 하러 가요. 시간 다 됐어요.”

“어어.”

왜 안 되는지 묻기도 전에 서정연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향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서정연의 등을 보다가 시선을 내리자 녀석에게 잡힌 내 손이 보였다.

손목이 아니라 손을 잡았다. 내 손을… 체격이 커서 그런가, 손도 나보다 살짝 더 컸다. 뼈가 도드라진 나와 달리 서정연의 손은 새하얗고 손가락도 길고 예쁘고…….

‘미친, 나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서정연의 손을 샅샅이 훑어본 나 자신이 엄청나게 변태 같았다. 방금 전 내 모습이 창피해서 얼굴에 열이 절로 올랐다.

“도해준 씨 오기 전에 미리 컴퓨터 다 켜 놨어요. 저번에 앉았던 자리가 편하죠? 설정해 둔 그대로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변태 같은 나를 두고 서정연은 오늘따라 의욕이 넘쳐 보였다. 누가 봐도 그렇고 그런 건 한 치도 떠올리지 않은, 순수하고 화사한 얼굴을 마주하자 나 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졌다.

“하고 있어요. 마실 거 갖다 줄게요. 저번처럼 아이스티 마실래요?”

“그, 그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자 서정연이 잡고 있던 손을 놔주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올라오기 전에 말하지. 같이 가져오면 됐을 텐데.

컴퓨터 방에 혼자 남겨진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괜히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서정연이 잡았던 손이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서정연처럼 자연스럽게 스킨십 못할 텐데. 이런 일에도 잔뜩 의식하는 나와 달리 서정연은 뭐든 참 쉬운 것 같았다.

조금 전에는 기분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 서정연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어쩐지 우울해졌다. 무슨 사춘기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괜히 이마를 긁적이다가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게임이나 하자. 운 좋으면 성하연이 남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레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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