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79)화 (81/132)

79.

내 눈빛이 점점 싸늘해지자 서정연이 급히 덧붙였다.

“근데 둘 다 오래전에 한 거고, 요즘은 정이 산책시키면서 조깅하고 헬스장 가끔 들르는 게 다예요.”

“어쨌든 허약한 건 아니라는 거잖아.”

“운동해도… 허약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이 자식이 또 헛소리하네. 서정연을 좋아하는 서제현도 이번만큼은 실드 쳐 주기 어려운지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주방에 내려앉은 어색한 공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침이나 먹자.”

***

서정연이 준비해 준 아침은 샌드위치와 샐러드였다. 녀석이 혼자 먹기엔 꽤 많은 양이었는데, 물어보니까 혹시 내가 자고 갈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해 뒀다고 한다.

‘어제 술 마시자고 한 것도 다 계획이었을지 몰라…….’

어쩐지 뭔가 찝찝하더라니. 꼬시는 거에 넘어가면 안 되는 건데.

이마를 짚은 채로 어제 일을 후회하는 나를 두고 서정연이 서제현에게 말했다.

“넌 그거 먹고 학교 가. 윤 비서님 불렀으니까.”

“뭐야! 형이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

한창 먹을 나이답게 벌써 샌드위치를 세 개째 해치운 서제현이 충격받은 얼굴로 소리치다가 곧 나를 노려봤다.

“설마 이 사람 때문에?”

“넌 윤 비서님이 데려다줘도 되잖아.”

직접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서정연이 나를 돌아봤다.

“도해준 씨, 일 가기 전에 집에 잠깐 들르는 게 낫죠? 데려다줄게요.”

“나도 데려다줘! 왜 이 사람만 데려다주는데? 나도 형 차 타고 싶다고!”

“이미 윤 비서님 불렀어.”

“윤 비서님은 왜 형 말만 들어? 내 말은 무시만 하고!”

“글쎄. 그걸 모르는 게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해 봤어?”

또 시작이군. 그래도 저 둘의 말싸움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샌드위치를 열심히 먹었다. 샌드위치 엄청 맛있네. 이거 설마 서정연이 만든 건 아니겠지?

“애초에 이 사람하고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진 건데? 형 주변에 이런 사람 없었잖아.”

끼어들지 않고 샌드위치를 먹는 나를 서제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별다른 반응하지 않고 샐러드만 먹자 서정연이 대신 화를 냈다.

“예의 제대로 지키라고 했을 텐데, 서제현. 윤 비서님 오기 전에 쫓겨나고 싶어?”

“아니, 궁금하잖아. 형 이제까지 누구 집에 초대한 적도 없고 나 말고 딴사람 재운 적도 없으면서…….”

서정연 친구 없다는 소리를 길게도 말하네. 아무래도 논쟁이 계속될 것 같아서 서정연 대신 입을 열었다.

“게임에서 만났어요.”

“뭐… 뭐? 뭐라고? 게, 게임? 게이임?”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찌르며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서제현이 식탁을 탕, 내리치며 외쳤다. 경악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웃겼다.

“게임이라니. 형, 설마… 매번 하던… 그, 그 게임?”

“맞아.”

“와씨, 형 진짜 미쳤어? 어, 어떻게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직접 만나고 집에 데려와? 재워 주기까지 하고! 진짜 이해 안 돼.”

오, 꼰대 같은 발언. 설마 저 소리를 17살 현직 고등학생한테 들을 줄은 몰랐는데. 격한 반응이 좀 의아해서 서정연에게 물었다.

“동생은 게임 안 하나 봐?”

“재능이 없어요. 성질 급해서 실수도 잦고. 본인이 못하니까 남들이 왜 즐겨하는지 이해를 못 하네요.”

“아니야! 나 잘해!”

“요즘 남고딩들은 게임 안 하면 친구 사귀기 어렵지 않나?”

“그래서 없어요.”

“나 친구 있거든? 사진도 찍어서 보내 줬잖아!”

“그게 무슨 친구야. 네 집안 보고 비위 맞춰 주는 애들이지.”

서정연의 신랄한 말에 서제현이 반박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얄미운 놈이지만 슬슬 안쓰러워서 서정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정연도 적당히 해야겠다고 판단했는지 주제를 돌렸다.

“도해준 씨하고는 몇 년 전부터 같이 게임 하던 사이인데, 너 때문에 계정 삭제돼서 내가 따로 연락하다가 만나게 된 거야. 우연히 자주 들르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기도 했고.”

샐러드를 뒤적이며 서정연의 설명을 듣던 나는 계정 삭제 부분에서 고개를 들었다.

“잠깐, 다시 말해 봐.”

“네? 도해준 씨가 카페에서 일하는 거요?”

“아니, 그 앞에… 계정 삭제가 누구 때문이라고?”

“아. 그러고 보니 설명해 주는 걸 깜빡했네요.”

잔을 내려 둔 서정연이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곧 입을 열었다.

“길드 전쟁이 끝나고 며칠 뒤에 본가에서 호출이 있었어요. 지금은 대표직에서 물러나신 할아버님 생신이라 집안사람들이 다 모이는 중요한 날이어서요.”

서정연이 말하는 길드 전쟁은 본캐로 했던 마지막 길드 전쟁일 거다. 서정연이 계정을 삭제하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아마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지. 갑자기 어나더 길마가 노퓨쳐로 바뀌고, 흔적에 대한 기록이 모두 사라져서 난리가 났었다.

“본가로 가기 전에 서제현하고 윤 비서님이 집에 찾아왔어요. 전 그때 1층에서 노트북으로 아크를 하고 있던 터라 우선 게임을 껐어요.”

“…뭔가 벌써 불안한데.”

설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서제현은 찔리는 게 있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해준 씨도 잘 알지만, 아크는 보통 홈페이지에서 로그인한 뒤에 게임을 켜잖아요? 그때 전 게임만 꺼 두고 홈페이지 로그인은 그대로 두고서 윤 비서님과 잠깐 대화를 나눴어요.”

“저기, 형.”

“근데 그사이에 서제현이 제 허락 없이 노트북을 만졌더라고요?”

서정연의 싸늘한 미소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제현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서제현이 제 노트북을 건드려도 기껏해야 인터넷이나 좀 보고 말았을 줄 알았지, 설마 제 계정을 탈퇴해 놨을 줄은 몰랐어요.”

“그, 그건…….”

“전 노트북을 바로 끄고 본가로 갔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돌아왔어요. 그러고 나서 아크에 접속하려고 했는데 탈퇴한 계정이라고 떴고, 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죠.”

“일주일이라니, 그 정도 시간이 지난 거면 복구해 준 게 신기할 정도네.”

거기까지 들은 나는 뭔가 빠진 부분을 알아채고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아무리 로그인이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해도 탈퇴 같은 중요한 건 비밀번호를 한 번 더 확인하지 않냐?”

“맞아요.”

입술을 비틀어 웃은 서정연이 시무룩해진 서제현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도 비밀번호 두세 개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해요. 서제현이 저번에 자기 마음먹고 공부 시작하겠다고 해서 옛날에 쓰던 회화 강의 계정을 빌려줬는데, 하필 그 계정 비밀번호가…….”

“아크랑 똑같았구나…….”

“네. 서제현은 계정 빌려 가 놓고 공부는커녕 남의 게임 아이디나 탈퇴시키고. 어찌나 배신감이 느껴지던지.”

서정연이 상처받은 것처럼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어른한테 혼나는 아이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앉아 있던 서제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내, 내가 그래서 사과도 하고…! 그 회사에 연락해서 복구해 달라고 했잖아!”

“난 하라고 시킨 적 없어. 조용히 하고 앉아.”

“씨이…….”

잔뜩 서럽게 웅얼거리는 서제현은 퍽 억울한 기색이었다. 게임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서제현의 입장에선 그깟 게임 계정 하나로 자기를 혼내는 서정연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중요한 건 게임 계정이 아니라 남의 걸 멋대로 건드린 게 문제일 텐데.’

그야 제멋대로인 성격에 나이도 어리니까 서러운 감정이 우선이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말이 고등학생이지, 17살이면 중학교 졸업한 지 1년도 안 된 나이니까.

“난 그 일 때문에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헉.”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서제현의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일렁거렸다.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릴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때린 거야?’

아무리 게이머한테 계정을 삭제한 일이 용서 못할 사건이라지만 그렇다고 어린 동생을 때린 건 조금… 그것도 태권도 4단, 합기도 2단을 딴 놈이…….

서정연을 쓰레기처럼 보자 내 시선을 알아챈 녀석이 불만스럽게 눈가를 좁히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뒤 자르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내가 너 때려서 입원시켰어? 혼자서 멋대로 겁먹고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구른 거잖아.”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오해했네.

“형이 막 노려보고 욕하고 그랬잖아! 무, 무서운데 어떡해?”

욕을 했다고? 서정연이? 그건 나도 좀 궁금하네.

“그러게 혼날 짓을 왜 해. 행동하기 전에 생각 한 번 더 해 보라고 몇 번을 말했어?”

“복구됐다고 했잖아… 나 지금 왜 또 혼나…….”

턱을 괸 채로 서정연과 서제현의 대화를 지켜보며 나는 어제부터 해 온 내 짐작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친하다더니, 이렇게 보니까 둘이 엄청 친하네.’

서정연 나름의 사고 치는 동생을 예뻐하는 방식인 거겠지. 잔소리하는 것도 들어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그보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설마 서제현일 줄이야. 서제현의 평소 행동을 보면 계정을 탈퇴한 이유는 서정연이 자기랑 안 놀아 주고 게임에만 집중하니까 질투 나서 그런 건가?

‘그래도 서제현 덕분에 아주 외롭지는 않았겠네.’

서정연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형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서제현과 함께 있을 때는 서정연도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서제현이 꽤 귀엽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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