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욕실에서 씻은 뒤에 서정연이 빌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행히 속옷도 사이즈가 얼추 맞아서 별문제 없이 입을 수 있었다.
거실로 나오자 소파 앞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음식과 와인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진 뒤였다. 정리하는 거 도와줄걸. 같이 먹어 놓고 서정연만 치우게 했네.
‘와인…….’
테이블을 보고 있자 서정연과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미 술은 다 깼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두통이 밀려와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서정연의 장난에 넘어가서 그런 짓을 하려고 하다니. 그때 서제현이 오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나… 혹시 남자도 되는 거였나?’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남자를 상대로 키스를 시도한 건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랑만 해 왔고, 나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물론 술 취해서 생긴 일이니, 확신하기엔 아직 이르다. 하지만 만약 남자도 된다면…….
“도해준 씨.”
이어 가던 생각이 날 부르는 목소리에 뚝 끊겼다. 고개를 들자 남색 이불을 든 서정연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소파에서 자도 괜찮겠어요?”
“괜찮다니까. 소파가 좁은 것도 아니고, 과장 좀 보태서 내 자취방 침대만 한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소파는 딱 봐도 고급품이었다. 내 체격이 결코 작은 편이 아닌데도 누워도 남을 정도로 컸고.
“미안해서 그러죠. 내가 자고 가라고 붙잡았는데.”
“이불이나 줘.”
“흠…….”
손을 뻗자 서정연이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불을 건네주며 고개를 숙였다.
“제 침실은 드레스룸 맞은편이에요.”
비밀 이야기하듯, 서정연이 내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옅은 숨결이 귀를 간지럽혔다.
“혹시 자다가 무섭거나 외로우면 언제든 괜찮으니까 와요.”
“…필요 없어, 미친놈아.”
간신히 사그라들었던 열기가 다시금 훅 올라왔다. 가까이 붙어 선 녀석의 어깨를 황급히 밀치자 서정연이 순순히 밀리며 빙긋 웃었다.
“잘 자요, 도해준 씨.”
내 까칠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남긴 서정연이 거실을 떠나갔다. 따듯한 이불을 든 채로 넋이 나가 있던 나는 서정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쓰러지듯 소파에 걸터앉았다.
‘저 얼굴이 문제인 거 같아.’
남자고 여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얼굴! 혹시 난 저 얼굴에 홀린 게 아닐까? 저 정도로 생겼으면 성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아, 진짜…….”
가슴에 손을 올리자 쿵, 쿵, 빠른 박자로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목덜미도 뜨끈뜨끈한 게, 보지 않아도 엄청나게 붉어진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숨길 수 없는 변화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역시 이 집에 다신 오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정이를 쓰다듬던 그때, 각오했던 대로 서정연의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집에 올 만큼 친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근데… 그게 가능한가?’
서정연의 집에 다시 온 건 길드 전쟁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서정연과 계속 연락하고 만난 건 어나더 길드를 막고 사칭범을 잡기 위해서였고.
한마디로 나는 서정연이 함께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자는 제안을 받은 그 순간부터 녀석과 단단하게 엮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 간단하고 쉬운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
끄으응, 끄웅.
뺨을 핥아 오는 축축한 혀에 천천히 눈을 떴다. 예상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와 코, 뾰족하게 솟은 갈색 두 귀가 보였다.
므웅.
“정아…….”
꼬리를 휙휙 흔들며 품으로 파고드는 정이를 잠결에 안아 주자 따끈한 체온이 번져 나갔다. 아, 행복해.
“정아, 주인 어디 갔어.”
비몽사몽 한 채로 묻자 정이가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이 있는지 품 안에서 열심히 꿍얼거렸다. 흠,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눈을 감고서 감각에 집중하자 저 멀리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정연과 서제현은 먼저 일어난 것 같은데…….
‘잠깐만, 근데 나 거실에서 잠들지 않았나?’
중간마다 그릇이 부딪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걸 봐선 주방인 것 같은데, 주방은 거실과 이어져 있으니까 저렇게 멀리 들리는 건 이상하잖아.
온몸을 덮쳐 오는 위화감에 재빨리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푹신한 매트리스가 손바닥에 닿아 오며 낯선 방 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헥헥, 침대 위에 올라와 내 주변을 맴도는 정이가 밟고 있는 이불도 내가 자기 전에 덮었던 남색 이불이 아닌, 옅은 회색의 낯선 이불이었다.
“미치겠다…….”
내가 잠든 사이에 침실로 옮긴 거냐고. 친하지도 않은 서제현이 그럴 리가 없으니 범인은 분명 서정연일 거다.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뒤늦게 잠든 탓에 옮기는 것도 몰랐나 보다. 거기다가 17살짜리도 일어났는데, 나만 늦잠이라니.
급히 정이를 안고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섰다. 소리가 들려오는 주방으로 향하자 냉장고를 뒤지는 서제현과 핸드폰을 보고 있는 서정연이 보였다.
“벌써 일어났어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용케 내가 온 걸 바로 알아챈 서정연이 핸드폰을 내려 두며 냉큼 내게로 걸어왔다.
“낮에 알바 가니까 일부러 안 깨운 건데. 잘 잤어요?”
“어. 혹시 나 자는 사이에 침대로 옮겼어?”
그 물음에 서정연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그래도 침대가 훨씬 편하긴 하죠?”
역시 그렇군. 언제 옮긴 건진 모르겠지만, 아침이 밝기 전에 날 침대로 옮기고 서정연 본인이 소파에서 잤다면 나중에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온 서제현이 그 모습을 봤을 거다.
그래서인지 서정연의 어깨 너머에서 서제현이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넌 대체 누구길래 우리 형이랑 이렇게 친한 거야, 라고 묻는 듯한 질투의 눈빛에 좀 난감해졌다. 나도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는데.
“무거웠을 텐데. 안 그래도 허약하면서.”
“뭐?”
서정연의 뒤에서 투덜거리며 물을 마시던 서제현이 내 말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해 왔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허약하다고? 형이?”
“조용히 해.”
“누가 누구보고 허약하대? 우리 형이 얼마나 센데! 무려 태권도 4단에 합기도… 으읍!”
커다란 손이 서제현의 얼굴 절반을 콱 틀어막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서정연의 새까만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조용히 하라고.”
“으읍, 읍!”
서제현의 입을 막은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손아귀 힘이 꽤 강한지 붙잡힌 서제현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태권도? 합기도?”
저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되묻자 어깨를 움찔 떤 서정연이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변명했다.
“서제현이 헛소리 한 거예요.”
“아니, 형 지금, 으읍!”
“헛소리라기엔 너무 세세하지 않냐?”
“하하, 요즘 누가 태권도를 해요.”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지?”
“솔직한데… 저 약한 거 맞아요…….”
“…….”
약한 사람이 건장한 청소년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저렇게 평온할 수가 있다고? 안 되겠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안고 있던 정이를 바닥에 내려 주고 서정연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봐.”
“네에.”
“푸하아!”
그제야 서제현을 놔준 서정연이 얌전히 다가왔다. 숨넘어가기 직전에 겨우 풀려난 서제현은 정신을 못 차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우선 서정연의 팔부터 살폈다. 입고 있는 상의가 긴팔이라서 옷 위로 팔을 만져야 했다.
‘반팔 티셔츠를 입었을 때 보니까 팔 근육에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애가 워낙 모델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 체형이라 은연중에 근육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실제로 만지게 된 서정연의 팔은 굉장히 단단하고 튀어나온 근육으로 굴곡이 져 있었다.
“음, 도해준 씨?”
“가만히 있어.”
서정연이 정말로 나를 들어서 침실로 옮겼다면 팔 근육만 좋을 리가 없었다. 내친김에 복부 주위로 꾹꾹 눌러 보자 여기도 팔과 마찬가지로 단단한 근육이 꽉 차 있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만지면 저 좀 부끄러운데. 앗…….”
“와…….”
내 손을 쳐 내지는 않으면서 부끄러운 척은 있는 대로 하는 서정연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여러 번 녀석의 배를 더듬거렸다.
옷 위에서 만지는데도 복근이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기가 막히고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사기꾼이라뇨.”
“양심 있냐? 이 몸을 하고 허약하니 뭐니 하면?”
“허약하다고 한 건 도해준 씨가 먼저 했잖아요. 제 몸을 있는 대로 만져 놓고… 저 너무 슬퍼요.”
“으아악! 형 진짜 미쳤어?”
잔뜩 억울하고 서러워하는 서정연의 모습에 서제현이 귀신을 본 낯을 하고선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하려는 말을 대신해 줘서 참 고맙네.
나는 가증스러운 서정연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태권도 4단 말고 또 뭐 있어.”
더는 거짓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서정연이 시무룩한 기색으로 진실을 털어놨다.
“…합기도 2단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