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77)화 (79/132)

77.

“자, 잠깐.”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건 둔한 머리로도 한 번에 알았다. 황급히 상체를 반대편으로 물리며 서정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야?”

“네? 뭐가요?”

“왜, 왜 옆에 왔어?”

“도해준 씨 취한 거 같아서요. 혹시 술 쏟을까 봐 잡아 주려고.”

있는 대로 당황한 나와 달리 서정연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도리어 고개를 숙이며 내가 물러선 만큼 몸을 기울여 왔다.

“잔 치웠으니까… 이제 떨어져.”

“붙으면 안 돼요?”

“굳이… 붙을 이유가…….”

“우리밖에 없는데 뭐 어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서정연은 계속해서 내 쪽으로 상체를 붙여 왔다.

그걸 피하다 보니 내 팔꿈치가 바닥에 닿았다. 어정쩡한 자세가 된 나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 서정연이 픽 웃었다.

“이러다 눕겠네.”

“그러니까 좀, 비키라고.”

“대놓고 피하니까 자꾸 건드리고 싶잖아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고개를 들자마자 검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이런 미친.’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강하게 뛰어올랐다. 얼굴에 확 치솟는 열기의 원인은 술기운이 아니었다.

차마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새하얀 목과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 다리 사이에 앉아서 몸을 붙여 오는 서정연의 행동은 가뜩이나 술기운으로 이성이 흐려진 나를 자꾸만 부추겼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피하듯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서정연의 숨결이 입술을 스쳐 왔다. 혹시라도 그가 원치 않으면 언제든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게 내 입술과 서정연의 입술이 맞닿기 직전,

콰앙!

“……!”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내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서정연도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나와 서정연 사이에 공기가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쾅, 쾅!

소음이 들려오는 곳은 바로 현관이었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계속해서 거칠게 두드렸다. 그 소리에 소파 위에서 얌전히 자고 있던 정이도 깨고 말았다.

망, 왕! 왕!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의 등장에 경계 모드로 들어간 정이가 현관을 향해 힘차게 짖기 시작했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와 정이 짖는 소리가 번갈아 들리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개판이 됐다.

“하…….”

미간을 찌푸린 서정연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재빨리 일어나서 잔뜩 예민해진 정이를 품에 안고 현관으로 가는 서정연의 뒤를 따라갔다.

“혀엉! 형, 나야! 열어 줘!”

현관문 가까이 다가가자 쾅쾅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웬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목소리에, 서정연을 형이라고 부르는 상대라면…….

“서제현. 너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두꺼운 현관문 너머에서 서정연의 말을 용케 들은 서제현이 더욱 신나게 문을 두드렸다.

“택시 타고 왔지, 어떻게 왔겠어? 문 열어 줘. 나 추워!”

아직 겨울도 아닌데 춥다며 칭얼거리는 서제현의 행동에 서정연이 피곤한 티를 내며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는 날 돌아봤다.

“미안해요, 도해준 씨.”

“어? 아냐. 난 괜찮으니까 어서 문 열어 줘.”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겉으로는 다 커 보여도 17살밖에 안 된 어린애인데, 문도 안 열어 주고 돌려보내는 건 좋지 않았다. 밤늦게 형의 집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서정연이 문을 열자 서제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들어왔다. 당연하겠지만 정이와도 아는 사이인지 내게 안겨 있던 정이도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왜 빨리 안 열어 줘? 나 교복만 입어서 진짜 추웠단…….”

들어오자마자 투덜거리던 서제현이 나를 발견하고 입을 딱 다물었다. 난 잘못한 거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머쓱해져서 시선을 피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뭐야? 저 사람이 여기 어떻게… 형이 불렀어?”

“지금 여기서 내가 안 부른 사람은 너밖에 없어, 제현아.”

열린 현관문을 닫으며 서정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가 혼나는 게 아닌데도 등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었다. 서제현도 그걸 느꼈는지 나와 서정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아니이, 난 형 혼자 있는 줄 알고…….”

“그럼 뭐가 달라?”

“친구랑 노는 줄 알았으면 다음에 왔지…….”

단번에 시무룩해진 서제현이 웅얼거리며 변명을 해 왔다. 그게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진짜 강아지는 내 품에 안겨 있는데.

잔뜩 처량한 모습에 서정연도 마음이 조금은 약해졌는지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허락했다.

“들어가. 가방은 소파에 내려 두고. 어머니께 연락은 했어?”

“할게. 이따가.”

“지금 당장 해.”

서제현에게 턱짓으로 집 안쪽을 가리킨 서정연이 멀뚱히 서 있는 내게도 얘기했다.

“도해준 씨, 자고 갈래요? 술 마셔서 피곤할 텐데. 저도 같이 마셔서 운전하기도 어려우니까.”

자고 가라니.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건 조금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던 그때였다.

“뭐? 뭘 자고 가? 택시 부르면 되잖아! 내가 불러 줘?”

내가 말문을 열기도 전에 서제현이 벌컥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서제현은 내가 굉장히 불편한 모양이다. 적나라한 반대에 날 보며 애써 웃던 서정연의 얼굴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입 다물어.”

이를 악물고 경고를 읊조리는 서정연을 보며 결정을 내렸다. 나는 일부러 보란 듯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자고 갈게.”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다니, 이러면 나도 순순히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잖아.

대답을 들은 서정연은 반색했고 서제현은 표정을 구겼다. 상반된 감정을 보여 주는 형제들을 향해 이어 말했다.

“옷 빌려줘.”

***

서제현을 2층 욕실로 쫓아낸 서정연은 나를 드레스룸으로 데려왔다.

“속옷은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줄게요.”

검은 티셔츠와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넘겨준 서정연이 포장지를 뜯지 않은 속옷까지 챙겨 줬다. 속옷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맞으면 바지만 입지, 뭐.”

“…….”

그 말에 뒤돌아서 있던 서정연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맞으면… 알려 주세요.”

“어째서?”

“아니면 사이즈를 말해 줄래요? 제가 사 둘게요.”

“필요 없어.”

하루만 자고 갈 건데 내 속옷을 뭐 하러 사 두겠다는 건지. 아쉬운 것처럼 혀를 찬 서정연이 곧이어 뭔가를 떠올리고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왜 저래.

“그런데요, 도해준 씨.”

“어.”

“침대가 있는 방은 제가 자는 침실이랑 손님방밖에 없거든요.”

“그래?”

“어떡할래요?”

어떡하냐니… 방을 고르라는 건가? 사람은 세 명인데 침대는 두 개니까 한 명은 침대를 못 쓴다는 건데.

‘아무리 버릇없다고 해도 17살짜리를 소파에서 재울 수는 없고. 서정연은 집주인이니까…….’

서정연의 질문 의도를 빠르게 파악한 나는 자신 있게 답했다.

“내가 소파에서 잘게.”

“네? 그게 아니라…….”

“아니라고?”

“형, 나 다 씻었어!”

어리둥절한 나와 당황하는 서정연의 뒤로 서제현이 후다닥 뛰어왔다. 나와의 대화가 또 끊기자 서정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제현, 손님방 네가 써. 도해준 씨는…….”

잠시 머뭇거린 서정연이 이어 말했다.

“저랑 같이 자죠.”

그 충격적인 발언에 역시나 이번에도 내가 대답하기 전에 서제현이 기겁하며 끼어들었다.

“뭐? 뭐라고? 형이랑 누가 같이 잔다고? 왜? 왜 형이 저 사람이랑 자?”

“침대가 두 개밖에 없잖아.”

“차라리 손님방을 줘! 내가 형이랑 자면 되잖아!”

“미안한데 내가 싫어.”

서정연이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하자 서제현이 씨익,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잔뜩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싫어? 어릴 때는 옆에서 재워 줬으면서, 나 이제 컸다고…!”

“네가 크긴 뭐가 커. 예전에 재워 준 것도 네가 하도 떼써서 어쩔 수 없이 재워 준 거고.”

“아무튼 재워 줬잖아. 당연히 가족인 내가 형이랑 자야지, 저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같이 자?”

“말조심해, 서제현.”

자연스럽게 싸우기 시작하는 두 형제 때문에 피곤이 몰려왔다. 이러다가 날 새겠네.

이렇게 보니까 의외로 둘이 닮았단 말이지. 가족은 가족이구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서정연과 같은 침대를 쓰고 싶진 않았으니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소파에서 잘게.”

“도해준 씨…….”

“그게 나도 편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소파에서 재워요. 그럼 제 침대에서 자요.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됐어. 자꾸 그러면 난 그냥 택시 불러서 집에 간다.”

그 말에 이번엔 서정연이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애처로운 눈동자로 날 쳐다봐서 가슴이 아팠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대놓고 날 내쫓으려는 서제현이 얄미워서 맞대응하긴 했는데, 침대까지 차지하는 건 오버였으니까.

‘누구 심장 터질 일 있냐.’

갑작스럽게 서정연의 집에서 자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서정연의 침대에 같이 눕게 된다면 분명 잠을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겠지.

‘미안한데 나도 잠만큼은 편하게 자고 싶거든.’

그리고 아까… 서제현이 오기 직전에 있었던 일로 아직 서정연이 조금 불편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나란히 자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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