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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74)화 (75/132)

74화.

“해준아, 거기 서서 뭐 해?”

“……!”

그렇게 얼마 동안 멍하니 서 있었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들자 자리를 비웠던 사장님이 날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손에 서류 파일이 들려 있는 걸 보니 외출했다가 방금 막 돌아온 모양이다. 타이밍 좋게 나타난 사장님에게 더는 참지 못하고 냅다 외쳤다.

“사장님. 저 10분, 아니, 5분만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어? 어, 그럼. 당연히 괜찮지.”

“감사합니다.”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버려 둔 채로 급히 카페를 나섰다. 아까 서정연과 남자가 갔던 건물 바로 옆 골목길로 곧장 걸음을 옮기자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벽에 몸을 붙이고 고개만 빼꼼 내밀자 서정연과 남자가 마주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정연은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와 달리 남자는 얼굴이 살짝 붉은 게 흥분 상태로 보였다.

“이 카페는 어떻게 알았어.”

“지금 그게 중요해?”

서정연의 질문에 남자가 잔뜩 억울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형이 틈만 나면 여기 오는 거 원래 알았거든? 나도 여기까지 찾아오고 싶지 않았어. 근데 형이 내 병문안도 안 오고, 어제도 나 오기 전에 먼저 가 버렸잖아.”

어디로 보나 서정연이 자길 만나 주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목소리였다. 그걸 깨닫자 어쩐지 가슴 부근에서 따끔한 통증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을 들은 서정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는 일 때문에 먼저 일어난 거야. 너 얼굴 안 보려고 내가 그런 성가신 짓을 왜 해.”

“몰라! 형이 나 피하는 게 하루 이틀이야? 연락도 맨날 내가 먼저 하고, 형은 읽씹하면서!”

“쓸데없는 거 자꾸 보내니까 씹는 거지.”

“뭐가 쓸데없는 거야?”

“네 친구랑 술 처먹고 노는 걸 나보고 뭐 어쩌라고 보내? 앞으로도 그런 메시지는 다 무시할 거니까 다신 보내지 마.”

얘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점 난감해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서정연을 도와주려고 온 거였는데, 도리어 둘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양심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서정연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보내면 어때서? 형도 뭐 하고 노는지 사진 찍어서 보내 주면 되잖아.”

“…됐다, 그만하자.”

남자의 대답에 머리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서정연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 윤 비서님 부를 테니까 더 소란 피우지 말고 돌아가.”

헉, 이런.

하필 서정연이 핸드폰을 보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어떡하지? 이러다가 들키겠어.’

몸을 숨기기 위해 움직이려던 그때, 나는 서정연의 뒤에서 부들부들 떨던 남자가 서정연을 향해 양손을 뻗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괴한이 선량한 시민을 덮치는 듯한 광경을 목격하자 생각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힘차게 뛰어가서 남자와 서정연 사이로 확 끼어들었다.

“도해준 씨?”

서정연의 손목을 붙잡아 내 등 뒤로 보내자 녀석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서정연에게 양손을 뻗던 남자도 갑자기 나타난 날 보고 놀라서 미간을 구겼다.

“뭐야, 넌?”

“그쪽이야말로 뭐야.”

여긴 더 이상 카페가 아니고, 눈앞에 남자도 손님이 아니었다. 그러니 반말해도 상관없었다.

“왜 사람을 뒤에서 함부로 붙잡으려고 해? 그러다가 사람 다치면 어쩌려고?”

내가 먼저 선수 쳐서 따져 묻자 남자가 크게 당황하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난 형이 전화하려고 하니까… 그냥 그거 막으려고 한 거야!”

“그걸 어떻게 믿어? 그쪽, 아까부터 카페에 몰래 숨어서 이 사람 오는 거 기다렸잖아. 하는 행동이 다 수상한데?”

“아, 아니… 그러는 넌 누군데 끼어들어서 이 지랄을…….”

“도해준 씨.”

남자의 말을 뚝 잘라 낸 서정연이 내게 잡힌 손목을 살살 흔들었다. 한창 중요한 순간인데 왜 부르고 난리야. 뒤를 돌아보자 서정연이 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나 찾아다녔어요?”

“커피 갖다 준다고 했잖아. 트레이에 담아서 자리에 갔는데 네가 없어서…….”

“찾아다녔구나. 방금은요? 나 걱정했어요?”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서장연 겉껍데기만 보면 키도 크고 멀쩡해서 모르겠지만, 사실 저놈은 하루에 10시간씩 자야 할 정도로 체력이 부족한 놈이었다. 거기다가 이 작은 얼굴과 허약한 몸뚱이에 때릴 곳이 어딨다고 맞게 놔둔단 말인가.

얼렁뚱땅 끼어들고 말았지만, 서정연의 태도로 보아 내가 몰래 엿듣고 있었다는 건 눈치 못 챈 거 같으니 다행이었다.

“당연한 거…….”

내가 한 말을 중얼거리며 따라 한 서정연이 곧이어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이 반응은 뭐지?

“그럼 도해준 씨가 방금 나 구해 준 거네요?”

“아니, 구해 줬다느니 그런 거창한 건…….”

“저 지금 너무 설레요.”

“…….”

내 시선을 피하며 수줍게 웃는 서정연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내가 멀뚱히 서 있는데, 남자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경악하며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발, 뭐야?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둘이 아는 사이야?”

“아, 진짜 눈치 없게… 휴우.”

또다시 한숨을 포옥 내쉰 서정연이 남자를 무시한 채로 내게 말했다.

“일단 카페로 돌아갈까요? 상황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니까.”

***

“정말? 단골손님이랑 아는 사이였어?”

“그, 네.”

“진작 말하지. 인연이 참 신기하다.”

더는 아닌 척할 수 없어서 사장님께 서정연과 예전에 알바하던 곳에서 알게 된 친한 형이라고 둘러댔다. 머쓱하게 웃는 내 어깨를 사장님이 호탕하게 두어 번 두드렸다.

“아무튼 알겠어. 지금은 손님도 적으니까 조금만 쉬고 와.”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히 괜찮지.”

환하게 웃은 사장님이 길게 이어진 영수증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이만큼 시켰으면 보내 줘야지, 어쩌겠어? 나도 양심이 있단다.”

“…….”

영수증에는 아까 서정연이 나를 빌려 가는 대신에 주문한 디저트 목록이 주르륵 이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덜 번거롭도록 직접 만들어야 하는 음료수는 제외하고, 이미 만들어진 디저트만 골라서 주문한 것이다. 이상한 부분에서 섬세하다니까.

사장님의 배려를 고맙게 받고 서정연이 있는 자리로 가자 턱을 괸 채로 나를 지켜보는 서정연이 보였다. 그 맞은편에는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불만 가득한 남자의 얼굴은 미간이 잔뜩 구겨진 상태였다.

“왔어요? 사장님이 괜찮대요?”

“어. 30분 정도는 시간 될 것 같아.”

사실 제대로 따지면 내 30분 몸값보다 서정연이 주문하는 데에 쓴 금액이 훨씬 많았지만. 어쩐지 현타가 몰려왔다.

“그럼 서로 소개부터 할까요? 일단 이쪽은 서제현. 나이는 도해준 씨보다 한참 어려요. 이제 17살이라.”

“씨, 나이 얘기는 왜 해!”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우리를 노려보던 남자, 서제현이 덧붙인 말에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듯 짜증을 부렸다. 17살이라고? 저 덩치에? 아니, 그보다 이름이 서제현이면…….

“설마…?”

“네, 맞아요. 제 동생이에요.”

이런 미친.

충격을 금치 못한 나는 입을 떡 벌리며 황급히 얼굴을 비교했다. 형제라니? 무슨 형제가 이렇게 하나도 안 닮았어?

“정확히는 이복형제예요.”

내 턱을 밀어서 손수 입을 다물게 해 준 서정연이 담백하게 덧붙였다. 반대로 나는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복형제라고? 드라마에 나오는 그 이복형제? 아니, 물론 현실에서도 당연히 있겠지만…….

넋이 나간 나를 두고 서정연이 이번에는 서제현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긴 형이랑 친한 친구야. 이름은 도해준이고. 형이라고 부르고, 존댓말 제대로 해. 그리고 팔짱 풀어.”

“아, 알았다고!”

내 소개와 잔소리가 함께 나왔다. 서정연의 엄한 태도에 입을 삐죽인 서제현이 팔짱을 풀고 삐딱하게 기울인 상체도 바로 세웠다.

화려한 머리 색에 피어싱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었지만, 반듯하게 앉는 것만으로도 방금과는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서제현입니다.”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는 서정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제대로 꺾인 서제현이 시무룩한 태도로 내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해 왔다. 아무래도 서정연한테 군기가 꽉 잡혀 있는 모양이다.

“…아, 예. 도해준 입니다.”

17살의 인사를 무시하는 것도 몹쓸 짓이라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서정연이 날 향해 웃으며 한마디 했다.

“도해준 씨는 반말해도 돼요.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나는데 뭐 하러 존댓말을 써 줘요.”

“아니야. 난 괜찮아.”

“뭐야? 8살 차이? 그럼 이쪽…이 형보다 어려?”

나와 서정연의 대화를 듣던 서제현이 냉큼 끼어들었다. 날 노려보는 눈동자에는 뜨거운 열기가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나랑 8살 차이면 25살? 형보다 4살이나 어리잖아.”

“그래서?”

“근데 왜 이 사람…은 형한테 반말해? 반대로 형은 왜 존댓말을 쓰고?”

예리한 지적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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