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녀석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잠깐, 방금 그거 무슨 뜻이야?”
“뭐가요?”
“형이라고 부르라는 거. 너 처음에 나이 얘기했을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 난 그래서 상관없는 줄 알았…….”
묘한 눈을 하고서 내 변명을 듣던 서정연이 불쑥 손을 뻗었다. 얼굴로 확 가까워지는 새하얀 손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 좁히자 녀석이 내 모자를 벗겨 냈다.
“농담한 거예요. 거슬렸으면 진작 말했겠죠. 제가 그런 거 눈치 볼 성격도 아니고.”
“알긴 하냐?”
푸스스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눈가를 찌푸리자 서정연이 큭큭 웃으며 품에 안고 있던 정이를 내게 넘겨줬다.
“밥부터 먹죠. 손 씻고 와서 정이랑 잠깐 놀고 있을래요? 준비하려면 좀 걸리니까.”
“안 도와줘도 돼?”
“네. 해준이 형은 정이랑 놀아요.”
무심코 정이를 안아 들자마자 서정연이 또 장난을 쳐 왔다. 방심하고 있던 탓에 심장이 다시 펄떡 뛰어올랐다.
“그거 하지 말라고!”
망!
이를 갈며 소리치자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정이가 꼬리를 마구 흔들며 나를 따라 소리 높여 울었다.
“정이 놀라니까 그렇게 소리치면 안 돼요. 자, 이것도 가져가요.”
“이건 또 뭔데.”
“정이 간식이요. 둘이 친해져야죠. 그럼 이따 부를게요.”
내 손에 야무지게 강아지 간식까지 쥐여 준 서정연이 날 거실로 밀어 넣고는 주방으로 떠나 버렸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이뤄졌다.
나는 간식 냄새를 맡고 안달 난 정이가 턱을 핥아 올 때까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
식사를 마친 우리는 본래 목적인 아크로드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거실을 지나쳐 2층으로 나를 안내한 서정연이 부드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노트북보다는 데스크톱이 편하죠?”
계단을 올라와서 바로 보이는 방문을 열자 커튼이 쳐진 깔끔한 방이 나타났다.
일자 형태로 놓인 책상에는 데스크톱이 설치되어 있었고, 컴퓨터마다 적당한 크기의 모니터가 두 대씩 연결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게임을 즐기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여기가 컴퓨터 방이에요.”
“부럽다.”
개인 주차장이나 넓은 마당, 2층짜리 집을 봐도 역시 부잣집 도련님이었군, 하고 넘겼는데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부럽다는 감상평이 절로 나왔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단박에 튀어나온 부럽다는 말에 서정연이 눈을 깜빡이더니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올라온 김에 다른 방도 구경할래요?”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방 구경 정도는 해도 되겠지. 순순히 따라나서는 나를 바로 옆방으로 데려간 서정연이 미소 띤 얼굴로 설명했다.
“이 방은 보통 작업실로 이용해요.”
“책 엄청 많네.”
한쪽 벽에 세워진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정면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노트북과 여러 서류, 책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작업실이라고 소개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니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일도 소설 번역이라고 했고. 언어도 공부했다던가. 글을 좋아해서 직업도 이쪽으로 잡은 모양이다.
다른 생각에 빠진 내 어깨를 잡아끈 서정연은 계속해서 이 방, 저 방을 열어 주며 구경시켜 줬다.
“그리고 여긴 드레스룸. 아래층에도 하나 더 있어요.”
“오.”
“여긴 2층 욕실. 1층 내려갈 필요 없이 여기 쓰면 돼요.”
“편하네.”
“이 방은 손님방이에요. 있을 거 다 있죠?”
“그래. 침대도 좋아 보인다.”
복도 가장 끝, 마지막 방을 소개해 주는 서정연에게 적당히 대답해 주자 나를 힐끔거리던 녀석이 눈 끝을 아래로 축 내렸다.
“그게 끝이에요?”
“……?”
끝이냐고? 뭔가 더 반응을 해 줘야 하는 건가? 고심 끝에 재차 입을 열었다.
“부자는 집에 손님방도 따로 있구나. 처음 알았어.”
“그리고요?”
“어… 음, 청소하기 힘들겠다?”
“됐어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은 서정연이 손님방 문을 닫고 나를 다시 컴퓨터 방으로 잡아끌었다. 뭐야, 왜 저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서정연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던 나는 컴퓨터 방에 들어서면서 본체에 시선을 빼앗겼다.
‘와, 미쳤다. 본체 케이스도 엄청 비싼 거로 해 놨잖아?’
본체 한 대당 못해도 250만 원은 들어갔겠는데. 역시 돈 많은 놈은 컴퓨터도 비싸게 맞추는구나. 보니까 내부 부품도 좋은 것만 박아 둔 것 같다. 이 컴퓨터로 게임하면 풀 옵션으로 돌려도 멀쩡하겠군.
눈을 빛내며 본체를 이리저리 살피는 나를 지켜보던 서정연이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한테 들리도록 대놓고 중얼거렸다.
“해준이 형은 게임을 너무 좋아해.”
“…왜 또 난리야? 그리고 그딴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앉아서 천천히 살펴봐요. 하면서 마실 거라도 가져올게요.”
내 등을 밀어서 의자에 앉힌 서정연이 방을 나갔다. 내 손에 익숙하게 세팅해 둘 필요가 있었으니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컴퓨터를 켜자 바탕화면에 깔린 아크로드 아이콘이 보였다. 원래부터 깔린 건지, 내가 온다고 깔아 둔 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쓸데없는 시간 소모는 없겠다.
일단 본캐로 접속해서 설정을 이리저리 건드리는데, 갑자기 차가운 무언가가 뺨에 닿아 왔다.
“아이스티 괜찮죠?”
서정연이 내 뺨에 갖다 댄 잔을 건네줬다. 달그락, 투명한 잔 안에는 얼음과 함께 복숭아 아이스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고마워.”
“뭘요. 게임은 잘 돌아가나 보네요. 어제 깔아 두긴 했는데 켜 보진 않았거든요.”
“잘돼. 설정만 좀 건드리면 길드 전쟁도 문제없겠어.”
비록 이번에는 노퓨쳐와 흔적 사칭범을 내가 직접 패진 못하겠지만, 우리 계획대로 잘만 하면 노퓨쳐가 원하는 걸 제대로 깨부술 수 있을 거다.
앞으로 길드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약이 잔뜩 오를 노퓨쳐를 떠올리며 팔짱을 낀 채로 히죽거리던 나는 뒤에서부터 확 풍겨 오는 짙은 체향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이거 설정 건드린 상태인 거예요? 마우스 감도 엄청 높게 해 놓고 쓰네요.”
서정연이 뒤에서 양팔을 뻗어 책상을 짚었다. 녀석이 상체를 수그리자 내 몸과 바싹 맞닿았다.
등에서 퍼져 나가는 따듯한 체온과 향수가 섞인 체향에 목덜미로 열기가 치솟았다. 동시에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야 화면이 빨리 돌아가니까. 무거우니까 비켜.”
“뭐 어때요. 잠깐 구경하는 건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서정연이 보란 듯이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놨다. 그 행동에 가뜩이나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쿵쾅거렸다.
‘미치겠네…….’
전화나 디코 통화할 때는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서정연 앞이었다.
이 정도로 심장이 뛰고 목덜미에서 열기가 느껴지면 분명 얼굴이 엄청 빨개졌을 텐데,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서정연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딸각, 딸각.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서정연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만 간간이 울려 퍼졌다.
‘어떡하지?’
어깨를 바싹 굳힌 채로 식은땀만 뻘뻘 흘리던 그때였다. 끼익, 반쯤 닫혀 있던 문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활기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망, 왕! 내게 간식을 얻어먹고 거실 바닥에 늘어져라 누워 있던 정이가 꼬리를 흔들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아!”
“억……!”
서정연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의 등장에 내가 반색하며 벌떡 일어나자 턱을 강하게 얻어맞은 서정연이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급히 정이에게 달려가서 아이를 냅다 끌어안았다. 내게 안긴 정이의 헥헥거리는 소리와 뺨에 닿는 보드라운 털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 줬다.
“정이랑 많이 친해졌나 봐요?”
따끈따끈한 정이를 품에 안고서 심호흡을 하는 내게 서정연이 어딘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직 얼굴에 열기가 남아 있던 탓에 서정연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나는 괜히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으럼, 아까 간식도 주고 계속 놀아 줬잖아. 이 정도면 완전 친해졌지.”
“아, 그래요? 내 턱을 이렇게 매정하게 때리고 갈 만큼?”
“…….”
모른 척하려던 나는 그 말에 양심에 찔렸다. 결국 삐그덕 고개를 돌려서 서정연과 시선을 마주했다.
“…많이 아프냐?”
“엄청요. 피 나는 거 같아.”
“뭔… 내 머리가 뭐 얼마나 뾰족하다고 피가 나? 봐 봐.”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좀 걱정스러웠다. 슬금슬금 다가가서 서정연의 턱을 확인했다.
“어때요? 막 빨갛게 부었죠? 이거 멍들면 어떡해요?”
“멍은 무슨. 완전 멀쩡하거든? 비켜, 설정 마저 하게.”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꾀병이었다. 재수 없게 실실 웃는 서정연의 가슴팍을 밀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게 안긴 정이를 데려간 서정연이 입을 열었다.
“요일 길드원들은 다 들어와 있나요?”
“대부분은. 이제 2시간도 안 남았으니까 슬슬 남은 사람들도 다 들어올 거야.”
“저도 켜서 어나더 길드 상황이 어떤지 봐야겠네요. 참, 마이크는 저기 옆에 있는 헤드셋을 쓰면 돼요.”
“그래. 아, 그리고 부탁할 게 있는데. 이따가 길전 시작하면…….”
“영상 녹화해 달라고요?”
서정연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향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어나더 길드 디코 통화 목소리까지 들리도록 녹화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설명이 필요 없는 관계. 그걸 새삼 다시 느끼며 나도 서정연을 따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