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길드 전쟁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지금, 나는 부캐를 키우는 틈틈이 본캐로 접속해서 길드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과한 분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관리했다.
준비가 순조롭게 이뤄졌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우리 둘이 디코를 안 하는 건… 좀 그렇지?”
[하긴 해야죠.]
나는 평소에 길드 전쟁 때는 길드원들과 다 같이 디코로 통화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나더 길드원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서정연과도 실시간으로 통화하며 정보를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마이크 소리가 겹치게 된다.
서정연은 미리 어나더 길드 측에 마이크가 없어서 듣기만 하겠다고 말해 놨으니, 어나더와 통화 중에 나와 얘기를 나눠도 상관없었지만… 나는 길마로서 오더를 해 줘야 하는 위치라 마이크를 써야 했다.
호흡을 맞춰야 하는 길드원들을 외면하기도 어렵고, 정보를 주고받아야 하는 서정연을 포기할 수도 없다.
‘좋은 방법 없나?’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나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뱉어 봤다.
“너랑 내가 디코가 아닌 다른 음성 통화 프로그램을 사용한다든지?”
[그럼 저한테 하는 말이 길드원들한테 들리잖아요. 전투 중에 번갈아 가면서 마이크 온오프를 누를 수도 없고.]
“그건… 그렇지. 아, 너랑 나는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건 어때? 스피커 모드로 해 놓고 책상에 두면 될 것 같은데.”
[흠… 지금 바로 해 보죠.]
나와 서정연은 시험 삼아 헤드셋을 벗고 핸드폰 통화로 변경했다.
하지만 이 방법도 막상 해 보니 그리 좋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핸드폰을 놔두다 보니까 내 목소리보다 키보드나 마우스 누르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린 탓이었다.
[이 방법도 애매하네요. 키보드 칠 때는 키보드 소리에 목소리가 묻혀요.]
“그러게.”
겨우 떠올린 방법이 모두 실패하자 기운이 쭉 빠졌다.
길드 전쟁이 당장 내일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애초에 노퓨쳐와 사칭범의 반응을 보려고 시작한 전쟁인데, 그걸 확인해 줄 서정연과의 연락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방법이 있어?”
[네. 도해준 씨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요.]
“동시에 할 수만 있다면 다 좋아. 뭔데?”
[우리 집으로 와요.]
“……엉?”
기대감을 가득 안고 물어본 나는 돌아온 대답에 당황했다. 집? 갑자기 집을 왜?
[저번에 왔을 때 방 구경 다 못했죠? 2층 방에 컴퓨터 두 대 있거든요. 여기 와서 하면 길드원들이랑 디코 통화하다가 마이크 껐을 땐 저랑 대화할 수 있어요.]
“그,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에 게임하러 가는 건 조금…….”
[남이라뇨. 제가 남이에요?]
남이지 뭐야. 얘 또 이상한 소리 하네.
“다른 방법 없어?”
[없어요. 왜 무시해요? 제가 남이냐고 물어봤잖아요.]
“남이지, 그럼 가족이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짓자 서정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들시들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너무하네요. 집에 초대해서 같이 밥까지 먹은 사이인데 남이라니… 저 너무 상처예요.]
“넌 집에 초대해서 같이 밥 먹으면 그때부터 남이 아닌가 보다?”
어쩐지 이유 모를 짜증이 밀려왔다. 왜 짜증이 나는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눈치 빠른 서정연이 그 변화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녀석은 느긋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저 집에 초대해 본 사람이 도해준 씨밖에 없어서, 이번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요.]
“무, 무슨……!”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말에 얼굴에 후끈한 열이 확 치솟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은 나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야, 넌, 진짜, 그… 그런 소리 하면 안 쪽팔리냐?”
[별로?]
“나는… 네가 처음 만났을 때도 집에 오라고 하길래 그냥…….”
[아무나 다 집에 데려가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요. 저 성격 까다로운 거 알면서.]
이젠 얼굴만이 아니라 목까지 뜨거웠다. 뜨듯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서정연한테 안 쪽팔리냐고 물었지만, 사실 쪽팔린 건 나였다. 지레짐작해서 짜증 내고 놀라서 부끄러워하고. 아주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했네. 쪽팔려 죽겠다.
[도해준 씨.]
쪽팔림에 조용히 몸부림을 치는데, 덜그럭거리던 서정연이 나를 불렀다.
“어.”
[잘 들어 봐요.]
“……?”
[므웅, 망! 왕!]
헤드셋 너머에서 낑낑거리는 소리와 애교가 가득 담긴 강아지 짖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정아, 해준이 형 집에 놀러 오라고 졸라 봐.]
“……!”
[왕! 헥헥, 왕, 왕!]
서정연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이어서 정이가 신나게 짖었다.
그리고 나는 ‘해준이 형’과 정이의 귀여운 울음소리에 더 버티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미치겠다, 진짜…….’
일부러 저러는 건가? 괜히 귀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난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해준이 형, 우리 집 놀러 와요. 응? 옳지.]
[왕! 끄웅, 망!]
“……갈게.”
[네? 뭐라고요?]
“간다고!”
[진짜요? 역시 정이 데려와서 조르길 잘했네요. 정아, 해준이 형 내일 놀러 온대. 신난다, 그치?]
서정연의 말에 화답하듯 정이가 또 왕왕거리고 짖었다.
나는 이마를 짚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서정연과 같이 뭔가를 할 때마다 항상 내가 짐작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서정연이 제안한 방법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
당장 내일이 길드 전쟁이고, 이번 일은 현 상황에서 아주 중요했다. 서정연이 말한 방법이 두 곳과 모두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깔끔한 방법이었으니, 일단은 따르는 게 나았다.
어쩔 수 없지. 딱 한 번만 더 가자.
어차피 저번에 간 거 또 간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이런 일로 서정연의 집에 들락거리게 되는 건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이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아 가파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애써 외면하며 생각을 다잡았다.
***
오늘을 위해 미리 알바를 빼 둔 나는 오래간만에 한가롭게 외출 준비했다.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 마지막으로 검은 모자. 좋아. 현관문을 열기 전 거울로 차림새를 점검한 후에 자취방을 나섰다.
골목길을 지나 대로변으로 나와서 서정연에게 연락하자 근처를 돌고 있던 차가 금세 다가와 멈춰 섰다.
“점심 먹었어요, 도해준 씨?”
조수석에 올라타는 내게 서정연이 인사 대신 곧장 식사 체크부터 해 왔다. 어이없어서 안전벨트를 매며 눈가를 찌푸렸다.
“넌 무슨 보자마자 밥 먹었냐는 말부터 물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으려고요.”
“…안 먹었어.”
일어나자마자 준비하고 나온 참이었다. 내 대답에 서정연이 픽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제 새벽 늦게까지 게임했잖아요.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왔을 줄 알았어요.”
“그러는 넌 왜 안 먹었는데.”
“저도 똑같아요. 늦잠 자서 바로 나오느라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절반쯤 연 차창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모자를 살짝 치켜올리며 밖을 구경하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네가 늦잠을 잤다고?”
“당연하죠. 제가 잠이 좀 많은 편이라서. 근데 그게 놀랄 일이에요?”
“뭔가 이미지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깅할 느낌이라서.”
솔직하게 얘기하자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운전하던 서정연이 하하,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거.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정이가 안 깨우면 10시간도 잘 수 있어요.”
“10시간? 사람이 중간에 안 깨고 10시간을 계속 잘 수 있다고?”
“그럼요.”
서정연의 말에도 믿기가 어려웠다. 혹시 이 녀석… 보기보다 허약한 거 아냐?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놈이 체력은 많이 부족한가 보네.’
기본 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면 10시간씩 잘 리가 없었다. 그걸 깨닫자 서정연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녀석의 매끈한 턱선이 요 며칠 새 더 날렵해진 것 같기도 하고.
부캐를 키우고 길드 전쟁 준비까지 하느라 새벽 늦게까지 붙잡아 두곤 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꽤 힘들었나 보다.
‘저번에 일도 밀렸었다고 하고. 이번 길전이 잘 마무리되면 쉴 시간을 좀 줘야겠다.’
협력자인 내가 챙겨 줘야지, 어쩌겠어. 이만큼 배려해 주는 협력자는 세상에 없을 거다.
내 자취방과 가까운 거리라 차는 얼마 안 가 서정연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이가 거실 안쪽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신나서 달려오던 정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하더니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 왔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내가 아직 어색한 모양이다.
“정이, 이리 와. 해준이 형이랑 인사하자.”
서정연이 다가온 정이를 품에 안으며 날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어제부터 자꾸…….”
“무슨 소리요?”
“해준이 형이라고 하는 거. 어차피 정이는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왜 자꾸 해?”
머쓱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깜빡인 서정연이 곧 짙은 미소를 지었다.
“싫어요.”
“뭐?”
“도해준 씨는 저한테 형이라고 안 불러 주잖아요. 저도 하고 싶은 대로 할래요.”
“…….”
서정연이 몸을 휙 돌리더니 나를 버려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새침한 작태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서정연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