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서정연이 강아지의 턱 아래를 살살 긁어 주며 날 향해 웃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가까이 안 가고 까칠할 텐데,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금방 친해질 거예요. 정이 많아서 이름도 ‘정이’거든요.”
“귀엽네. 잘생겼고.”
“그렇죠?”
마지막으로 강아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서정연이 몸을 일으켰다.
“배고플 테니까 식사부터 하죠. 도해준 씨만 괜찮으면 집밥으로 먹을까 하는데. 마침 어제 아주머니가 다녀가셔서 냉장고가 꽉 차 있어요.”
“아, 그래…?”
저 아주머니라는 사람은 고용인이겠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난 집밥도 상관없어.”
“그럼 준비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안 도와줘도 되는 건가? 집주인이 기다리라고 했으니 굳이 나서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욕실은 어디야?”
“정면에서 오른편이에요.”
손이나 씻고 와야겠다. 서정연이 말해 준 곳으로 가자 생각보다 더 넓은 욕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집이 이만큼 넓은데 욕실도 당연히 넓겠지. 그보단 과연 이 집에 욕실이 몇 개나 있을지 그게 더 궁금했다.
손을 씻고 욕실 문을 열자 발 근처에서 끄웅,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니 방금까지만 해도 서정연 근처를 맴돌던 강아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이 정이라고 했었지. 날 응시하는 새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를 보자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를 살짝씩 흔들며 날 올려다보던 정이가 이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낯설면서도 궁금한 모양이다. 귀엽긴 한데, 살면서 강아지와 영 인연이 없던 나는 이걸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함부로 움직였다가 혹여 강아지를 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었더니 서정연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정아, 그러면 안 돼.”
가까이 걸어와 강아지를 들어 안은 서정연이 의외라는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개가 무서우면 말해요, 도해준 씨. 잠깐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되니까.”
“아니, 무서운 건 아니고. 괜히 다치게 할까 봐.”
“도해준 씨가 움직이는 거로는 절대 안 다치니까 걱정 말아요.”
서정연이 자길 안아 주니까 기분 좋아진 정이가 헥헥거리며 꼬리를 폭풍같이 흔들었다. 무심코 정이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서정연이 픽 웃었다.
“귀엽죠?”
“어.”
“도해준 씨 닮았어요.”
“어… 어? 뭐라고?”
“이쪽으로 와요. 식사 준비 다 했어요.”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홀린 듯이 서정연의 뒤를 따라가자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이 나타났다.
찌개부터 고기찜, 반찬까지. 각 접시에 정갈히 담긴 음식들이 마치 고급 한정식 식당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워낙 놀라움의 연속이라 배고픈 걸 몰랐는데 막상 잘 차려진 음식을 보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잘 먹을게.”
“그래요.”
서정연과 나란히 마주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어쩌다 보니 서정연과 벌써 세 번째 식사를 함께하게 됐다.
음식은 놀랄 만큼 내 입에 딱 맞았다. 제일 가까운 반찬을 입에 넣고서 눈을 반짝 빛내는 나를 본 서정연도 식사를 시작했다.
녀석은 오늘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다. 나도 어디 가서 식사 예절이 좋다고 칭찬 듣고는 하는데, 서정연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요, 도해준 씨.”
식사를 어느 정도 했을 때쯤, 서정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제 만난 성하연이라는 유저랑 소문 말이에요. 혹시 해결책으로 쓸 만한 방법을 떠올린 게 있어요?”
“아니. 뭐 정보가 있어야 방법도 생각해 볼 텐데 아무것도 없잖아.”
“저도 계속 고민해 봤는데, 성하연이라는 유저에 대해서 아는 게 워낙 없다 보니 계획을 세우기가 애매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길드에 들어가서 노퓨쳐에 대해서 알아봐야 하잖아. 금방 끝날 일이 아니니까 그동안 성하연이라는 유저도 천천히 알아보자고.”
“그럼 우선 이렇게 할까요?”
물을 마신 서정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미소 지었다.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 보는 거예요.”
“어그로?”
“저한테 시선을 집중시켜야 친해질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친해져야 디코를 하든, 사적인 얘기를 나누든 하겠죠. 그럼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인도 할 수 있을 거고.”
“뭐 어떻게 어그로를 끌게?”
“그건 비밀이에요.”
“헛소리 말고.”
“내일 보면 알아요.”
이 자식이 또 이러네. 그냥 지금 설명해 주면 될걸, 꼭 직접 보라고 난리다.
짜증 나서 눈가를 좁히고 노려봤지만 서정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멈췄던 식사를 이어 갔다. 불안해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
“도해준 씨는 절 너무 못 믿어요.”
“너 같으면 믿겠냐?”
그 말에 서정연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녀석도 본인 같은 놈이 나타나면 믿을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웃기네.
“수습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일 테니까 너무 그렇게 보지 마요. 저 체하겠어요.”
“…그 말 지켜라.”
어쨌든 어나더 길드에 들어오기까지 서정연의 역할이 컸던 건 사실이었기에 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우선은 서정연의 말을 따라야겠다.
***
식사를 마친 후 뒷정리까지 끝낸 나는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채비라고 해 봤자 현관 근처에 내려 둔 가방을 메는 게 다였지만.
“벌써 가게요?”
“내가 여기서 더 할 게 뭐 있다고. 밥 맛있게 잘 먹었다.”
“기다려요. 데려다줄게요.”
“됐어. 그냥 택시나 불러 줘. 딱 봐도 근처에 버스정류장은 없어 보이니까.”
“아직 비 많이 와서 택시 불러도 한참 걸릴 거예요. 먼 거리도 아닌데 제가 바래다줄게요.”
내가 거절하기 전에 차 키를 챙겨 현관으로 따라온 서정연이 또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억지 부려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당연히 책임지고 데려다줘야죠. 이것도 불편해요?”
“그놈의 불편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냐?”
“제 차 타고 갈 거죠?”
“타고 갈 테니까 그만하라고!”
결국 참다 못 한 내가 질색하며 동의하자 서정연이 애처로운 표정을 싹 지웠다. 저저, 연기하는 꼴 봐. 누가 보면 배우인 줄 알겠다.
왕!
거실 한가운데에서 뼈다귀 모양 인형을 갖고 놀던 정이가 헐레벌떡 현관으로 쫓아왔다. 제 주인이 또 나가려고 하니까 많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왕, 왕! 우리를 향해 정이가 당당하게 짖으며 꼬리를 휙휙 흔들었다. 개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도 정이가 지금 불만 가득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그냥 집에 있어라. 난 택시 타고 갈게.”
“아니에요. 얘 어리광 부리는 거예요. 일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이러거든요.”
정이의 새까만 눈을 보자 마음이 약해지는 나와 달리 서정연은 냉정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저 조그마한 애가 낑낑거리면서 붙잡는데 어리광이라고 안아 주지도 않다니.
정이를 향해 미련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내 모습에 서정연이 물었다.
“쓰다듬어 볼래요?”
“…싫어할 것 같은데.”
“천천히 하면 괜찮아요. 저 따라서 앉아 봐요.”
무릎을 굽혀 앉은 서정연이 손짓했다. 녀석을 따라서 무릎을 굽히자 정이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자, 일단 손을 내밀고.”
“……!”
차가운 손길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낯선 감촉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이자 내 손목을 잡은 새하얗고 커다란 손이 보였다.
“주먹을 가볍게 쥐어 봐요.”
내게 몸을 바싹 붙인 서정연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쩐지 목이 마른 느낌에 마른침을 삼키며 붙잡힌 손을 천천히 쥐었다.
서정연이 내 주먹을 정이의 코끝으로 천천히 갖다 댔다. 나와 서정연을 번갈아 보던 정이가 제 앞에 들이밀어진 내 주먹을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요.”
신중하게 냄새를 맡던 정이가 드디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주먹에 자신의 머리를 툭 갖다 댔다. 서정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 주먹을 손으로 직접 펼쳐 주었다.
“이제 쓰다듬어도 돼요.”
그걸 끝으로 서정연이 내게서 손을 뗐다. 드디어 정이의 머리를 쓰다듬게 되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서정연의 손끝만 자꾸 떠올랐다.
멍하니 정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나를 구경하던 서정연이 턱을 괴며 말했다.
“다음에도 또 놀러 와요, 도해준 씨.”
“…….”
아니, 못 올 것 같아. 네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 이상해. 서정연에게는 죽어도 하지 못할 말을 삼켜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제대로 거절할 걸 그랬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치겠다…….’
웃으면서 내게 쓰다듬을 받는 정이와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서정연. 이상한 건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