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투둑, 툭.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매장 창문 너머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리가 보였다. 빗줄기가 굵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아까부터 흐리다 했더니 결국 쏟아지는구나. 미리 가져다 둔 우산이 있었으니 비가 와도 문제는 없었지만, 퇴근 후에 잡힌 약속은 조금 걱정됐다.
‘비가 많이 쏟아지면 돌아다니기 번거로울 텐데.’
그냥 내일 만나자고 말하는 게 나으려나. 컵의 물기를 닦으며 이따 만날 서정연을 떠올리던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눈가를 찌푸렸다.
아니, 뭘 자연스럽게 서정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비오는 게 번거로우면 어련히 먼저 연락하겠지.
“…….”
그렇게 마음 먹었는데도 어쩐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컵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넣어 놨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서정연: 오늘 일이 있어서 오후에 카페 못 들릴 것 같아요」
「서정연: 그래도 퇴근 시간에는 맞춰서 갈게요」
「서정연: 저녁으로 먹고싶은거 있으면 말해줘요」
아까 서정연이 보내온 메시지였다. 여태 답장을 보내지 못한 상태였다.
퇴근까지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 약속을 취소하고 싶으면 슬슬 연락을 했을 텐데. 그런 게 아니면 비가 와도 상관 없다는 거겠지.
‘…잠깐, 나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 거야?’
급히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
비는 그 뒤로 내가 퇴근할 때까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오히려 갈수록 양이 많아져서 도저히 밖에 돌아다닐 수준이 아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잔뜩 젖은 매장 바닥을 대걸레로 닦으며 창밖을 바라보자 먹구름 가득 낀 어둑한 하늘에서 쿠르릉, 천둥이 울렸다.
“해준아.”
“네?”
내가 청소하는 사이에 카운터를 보던 사장님이 미소 띤 낯으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먼저 가. 나머지는 내가 마무리할게.”
“예? 하지만…….”
“오늘 중요한 약속 있는 거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 확인하고 안절부절못했잖아. 괜찮으니까 먼저 퇴근해.”
“…….”
중요한 약속이라뇨. 그리고 제가 언제 안절부절못했나요. 핸드폰은… 평소보다 자주 확인한 건 맞지만. 혹시 서정연이 약속을 취소하는 연락을 보내면 바로 확인하려고 그런 건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장님께 이런 사정을 구구절절 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서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거리가 나를 반겼다. 이거 우산을 쓰는 의미가 있는 건가?
심란한 마음에 가만히 서 있는데, 들고 있는 핸드폰이 바르르 진동했다. 놀랍게도 서정연이 걸어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벌써 끝났어요?]
“뭐야. 어떻게 알아.”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서정연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서정연은 나를 보고 있는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사실 저도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예요.]
서정연의 말이 끝난 동시에 빠앙 하며 클랙슨 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바로 거리에 서 있는 검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
조수석 차창이 내려가면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서정연이 나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와서 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설마 차를 가져올 줄이야. 빗속에서 어떻게 돌아다닐지 고민한 나는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우산을 펴는 대신에 차를 향해 뛰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라서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충분했다.
“좋은 저녁이네요.”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핸들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서정연이 인사를 보내왔다. 나는 뺨에 떨어진 빗방울을 손으로 닦으며 눈가를 좁혔다.
“먼저 도착했으면 연락을 하지.”
“일하고 있는데 뭐 하러 그래요. 차 갖고 왔으니까 그냥 기다린 거지.”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서정연이 차를 출발시켰다. 비에 젖은 앞 유리를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며 닦아 냈다.
“원래는 20분 정도 기다려야 해서 근처 주차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도해준 씨가 밖으로 나오더라고요. 타이밍이 좋네요.”
“…사장님께서 오늘 일찍 끝내 주셨어.”
약속 있는 티를 팍팍 내서 얻어 낸 이른 퇴근이라고 설명하기엔 영 쪽팔렸으니 최대한 간략하게 대답했다.
“잘됐네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로 내 얘기를 듣던 서정연이 픽 웃었다. 이 평범한 대답이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다.
“먹고 싶은 건 정했어요? 차 갖고 나왔으니까 멀리 나가도 상관없어요.”
“아무거나 상관없어. 너무 멀리 가지만 마. 번거로워.”
“흠, 아무거나라…….”
때마침 신호가 바뀌면서 차가 멈춰 섰다. 핸들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고민하던 서정연이 나를 돌아봤다.
“간단하게 먹어도 괜찮은 거면 좋은 곳이 있긴 해요.”
“어딘데?”
“우리 집이요.”
“뭐?”
뭔 집? 서정연의 집? 황당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집을 왜 가?”
“이런 상황이니까 가죠. 비 때문에 어딜 들어가도 사람이 많을 텐데. 조용하고 편하게 먹으려면 집이 딱이잖아요. 도해준 씨도 번거로운 건 싫다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집을 가는 건 조금…….”
“저 혼자 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엄청 신경 쓰인다. 한숨을 내쉬며 재차 거절하려는데, 서정연이 갑자기 슬픈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이것도 부담스러워요?”
“아, 아니. 잠깐만.”
“역시 도해준 씨는 저를 친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나 봐요. 다른 건 참겠는데 식사 대접을 거절하니까… 솔직히 좀 섭섭하네요.”
“…….”
서정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씁쓸하게 속삭였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어깨가 절로 흠칫 떨리며 어제처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어딘가 축축한 공기, 그 속에서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는 서정연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그러니까… 얼굴 좀… 치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힘겹게 말하자 서정연이 슬픈 표정을 싹 지워 버리고는 기다란 눈매를 살짝 접어 웃었다.
“정말요? 나중에 투덜거리면 안 돼요.”
“안 그럴 테니까 출발이나 해. 신호 바뀌었어.”
어쩐지 서정연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한마디 하자 차가 다시 움직였다.
카페에서 가까운 거리라고 하더니 차는 얼마 안 가 단독 주택 단지로 들어섰다.
‘미친…….’
날이 저문 데다 비까지 쏟아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규모가 큰 단독 주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주차장까지 있었다.
“도착했어요. 내려요.”
정원과 주차장이 딸린 단독 주택에 넋이 나간 나를 두고 서정연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탁, 차 문 닫히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급히 따라 내리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서정연이 건물의 문을 열며 말했다.
“이쪽이에요.”
문을 열자 외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끝은 주택 현관과 이어져 있었다.
이쯤 되면 놀랍다 못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행동에서 풍기는 여유나 평소 입고 다니는 옷차림, 오늘 끌고 나온 차까지. 돈이 제법 있는 놈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정원 딸린 단독 주택에서 혼자 살 정도로 많았다니.
‘재벌집 아 들이라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재벌은 아니겠지. 실소를 흘리며 서정연의 뒤를 쫓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참, 깜빡했네. 도해준 씨.”
“엉?”
역시나 집 안도 넓고 화려하긴 마찬가지였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과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는 내게 서정연이 물었다.
“혹시 개털 알레르기 있어요?”
“어, 뭐? 알레르기?”
“네.”
“딱히 없는데.”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기울인 그때였다. 챱챱챱, 집 구석진 곳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차 키를 근처 테이블에 던져둔 서정연이 눈썹 끝을 아래로 내리며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미리 설명해 줬어야 하는데. 사실 동거하는 친구가 있거든요.”
“친구?”
왕!
내 물음과 동시에 활기찬 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리자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갈색의 무언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엇…….”
중형견보다 살짝 작은 체구의 고동색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집을 찾아온 손님이 낯선지,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힐끔거리던 강아지가 왕, 하고 한 번 더 짖었다.
“제가 키우는 아이예요. 이름은 정이. 귀엽죠?”
“존나 귀여워.”
내가 입을 틀어막고 감격하자 서정연이 강아지를 불렀다.
“정아, 이리 와.”
자길 부르는 소리를 들은 강아지가 귀를 쫑긋하더니 쫄래쫄래 걸어 나왔다. 강아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챱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정연이 몸을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꼬리가 붕붕 움직였다. 가까이에서 본 강아지는 코끝은 새까맣고 양 앞발은 새하얀 털로 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