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티 나냐?”
[글쎄. 우리 길드 애들도 모르긴 하던데.]
그럼 일단은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너야 날 워낙 오래 봐 왔으니까 알아챈 거겠지. 흔적도 1년간 수십 번 봤고. 그래도 앞으로 더 조심하긴 해야겠다.”
[괜히 중간에 들켜서 죽 쑤지 말고 조심해서 해. 아무튼 난 왜 부른 건데?]
나는 유진호에게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추려서 설명해 줬다. 그리고 우리 길드가 한 번쯤 나서서 노퓨쳐에게 긴장감을 줄 필요가 있다는 말 또한.
잠자코 내 설명을 들은 유진호가 입을 열었다.
[노퓨쳐가 이 정도로 멍청하고 눈치 없는 놈일 줄은 몰랐네. 가짜 데려다가 길마 자리에 앉힐 때부터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너도 노퓨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딱히 없지?”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마주친 적도 없는데 알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그 부분도 이상해. 노퓨쳐가 1년 동안 어나더 부길마로 활동했는데, 전쟁할 때 빼고는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게. 너무 부자연스럽잖아.”
[만렙까지 키우고 나서 무슨 콘텐츠를 즐길지는 자기 선택이니까. 노퓨쳐는 레이드고 뭐고 다 안 했나 본데.]
“그게 가능한가? 그럼 게임을 무슨 재미로 하는 거야?”
아크로드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 규모는 PVP와 레이드가 가장 컸다. 거의 양대 산맥 수준이었다.
섬마다 돌아다니며 수집 퀘스트를 하거나 농장을 키우거나 하는 생활과 밀접한 콘텐츠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저가 즐기는 건 단연 레이드였다. 일단 장비를 강화하거나 플레이할 때 필요한 재료가 주로 레이드에서 나오기 때문에 안 하기는 어려웠다.
‘게임을 하면서 필요한 모든 아이템을 다 경매장에서 사들인다면 레이드를 굳이 뛸 필요는 없긴 하지만…….’
그러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질 텐데. 노퓨쳐의 장비가 어땠더라? 어나더의 부길마고 전쟁에 꼬박꼬박 참여한 만큼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본인은 재밌나 보지. 어쨌든 나도 전쟁 때 말고는 만난 적 없어서 잘 몰라. 길드원한테도 물어봐?]
“어. 한번 알아봐 줘. 김정수 들어오면 걔한테도 물어보고.”
‘템파는김정수’는 여러 부캐를 갖고서 다양한 길드와 유저들과 교류하는 장사꾼이니 노퓨쳐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김정수 요즘 바쁜 것 같던데. 연락도 잘 안 받고. 일단 보내 놓고 답장 오면 전달할게.]
“그 정도면 충분해.”
[부캐 파티에 찾아가는 건 언제면 되는데?]
“내일 저녁에. 노퓨쳐가 우리한테 붙여 둔 어나더 길드원이 같이 있을 때 오면 더 좋고.”
[그럼 그때 맞춰서 문자 보내 놔. 확인하고 찾아갈 테니까.]
“그래. 그리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어 말했다.
“나의라임나무라는 유저, 넌 알고 있냐?”
[나의라임나무?]
“노퓨쳐가 우리한테 붙인 어나더 길드원이야. 근데 2년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고, 나랑 직접 친추도 했었대. 직업은 팔라딘인데, 기억나는 거 있어?”
[흐음…….]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유진호가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사람 기대하게 해 놓고 모른다고 하네…….”
[너랑 친추한 사람을 일일이 내가 어떻게 알아, 미친놈아. 그걸 다 알고 있으면 그게 더 소름 끼치는 거지.]
“그건 그렇네.”
[비슷한 닉네임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네가 말하는 유저인지는 모르겠다. 2년 전 쯤에 나무 어쩌고 하는 닉네임이 봤던 것 같거든.]
“나무?”
유진호의 말을 들어도 나는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나무’가 들어간 닉네임이 한두 개도 아니고.
[나도 확실치는 않아. 근데 상관없지 않냐? 그 사람이 예전에 만난 유저든 말든 어나더 길드 처리하는 거랑 관련 없잖아.]
“그것도… 그렇지.”
[만렙 탱커로 쩔도 해 준다며? 개이득 아냐? 적당히 상대해 주면서 내버려 둬.]
아니, 찝찝해서 그렇지. 그 자식이 흔적이 아니라 내가 싫다고 한 탓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는 유진호한테 절대 안 할 거지만.
[이상한 놈 신경 쓰지 말고. 흔적이랑은 어떠냐?]
“어, 어떠냐니… 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유진호는 당연히 게임 속 상황을 묻는 걸 텐데, 내 머릿속은 현실의 서정연이 떠올랐다. 다른 약속을 갔다가도 내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카페 앞으로 와서 기다리거나, 같이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예상치 못하게 불쑥 떠오른 기억들이라 나조차도 너무 놀라고 경악스러워서 빠르게 수습이 안 됐다. 다급히 헛기침하며 자꾸만 퐁퐁 떠오르는 기억을 구석으로 밀어 내려고 애썼다.
[좀 친해졌냐고.]
“친…해지긴 어떻게 친해져? 너라면 가능하겠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흔적인데?”
[왜 나랑 비교해? 카페 단골손님이라며. 그럼 현실에서도 계속 마주쳤을 거고, 일주일 내내 같이 부캐 키웠을 텐데. 전보다 당연히 친해져야지.]
“그냥… 딱히 달라진 건 없는데…….”
[잘 좀 해 봐.]
“왜 자꾸 친해지라고 강요하냐. 이번 일 끝나면 예전처럼 전쟁이나 하는 라이벌 길드 길마가 될 텐데. 그게 아니면 흔적이 아크를 접을 수도 있고.”
[그거야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일단 당장은 친해져서 흔적이 가진 진짜 계정을 최대한 써먹어야 할 거 아냐.]
“…아, 내가 알아서 할게!”
조여 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냅다 소리를 쳤다.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유진호에게 그간 겪은 일을 숨김없이 다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야, 그래도 양반은 안 되나 보다.]
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은 유진호는 내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다른 말을 했다.
[딱 들어오네.]
“뭐?”
[흔적.]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뒤늦게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일휘일비가 접속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길드] 일휘일비: 오일님~^^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
[길드] 불좀켜줄래: 헏;
[길드] 저6천원있어요: 히익
[길드] 아스타로트: 아직도 오일이라고 부르네ㅋㅋㅋㅋㅋ
[길드] rxrx78: ..?
[길드] rxrx78: 일욜님 들오니까 일비님도 들어오는거 뭐임
[길드] sky004: 그니깐;
[길드] 류페: ㄹㅇ저만 이상한거 아니죠? 흠;;
[길드] 저6천원있어요: 해명 바랍니다ㅡㅡ
[길드] 마하: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