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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그만두겠습니다 (44)화 (45/132)

44화.

그 뒤로 우리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갔다. 중간마다 잠깐씩 침묵이 찾아오긴 했지만, 딱히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든 나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나타난 서울 야경을 바라봤다.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비싼 레스토랑에 서정연과 단둘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신기하긴 하네…….’

지난 두 달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묘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알았던 어나더 길드와의 전쟁이 흔적의 계삭으로 인해서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그렇게 한 달 뒤, 우연히 필드에서 만난 일휘일비에게 시달렸고, 얼마 안 가 흔적 사칭범이 나타났다. 지겹도록 봐 온 카페 단골손님이 사실은 흔적이자 일휘일비였다.

‘어디 가서 절대 말 못하겠다. 말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나를 오래 알아 온 유진호조차 술 취해서 헛소리하냐고 욕했을 정도니까, 뭐.

헛웃음을 지으며 야경을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정연이 마지막 남은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곤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날까요?”

귀족 뺨치게 깔끔한 모양새로 식사를 마친 서정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따라 일어서면서 확신했다.

서정연이 제법 있는 집 아들이라는걸. 저 재수 없는 놈은 심지어 집에 돈도 많냐.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꺼내 든 나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계산을 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졌다. 뭔 레스토랑에 카운터가 없냐.

멀뚱히 선 나를 뒤늦게 발견한 서정연은 다시 돌아와선 내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여긴 예약제라서 따로 계산하는 공간이 없어요.”

“뭐? 그럼…….”

“제가 이미 계산 끝냈으니까 바로 나가면 돼요.”

계산을 했다고? 서정연이 잡아끄는 대로 멍하니 레스토랑을 나선 나는 바깥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가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 그럼 날 여기 왜 데려온 거야?”

“같이 밥 먹으려고 데려왔죠?”

“나는… 네가 나한테 밥 사라는 건 줄 알았는데.”

“네?”

내 말을 들은 서정연이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이었다. 눈가를 찌푸리고서 입꼬리는 억지로 끌어 올린 서정연이 말했다.

“제가 그렇게 쓰레기처럼 보여요, 도해준 씨?”

“그런 게 아니라… 내기에서 졌으니까 그럴 거라고 착각을 좀 한 거지.”

“아까는 길거리에서 춤추는 거 시킬 거라고 생각하질 않나.”

“그건…….”

“도해준 씨가 절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알 것 같네요.”

팔짱을 낀 서정연이 입매를 비틀며 이죽거렸다. 매사 능청스럽고 가벼운 서정연이 이 정도로 기분 나빠 할 줄은 몰랐던 터라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졸지에 비싼 밥을 사 준 사람을 쓰레기로 만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아닌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잘못한 건 맞고…….

“야, 화났냐?”

서정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녀석이 내게서 고개를 휙 돌렸다.

“아뇨. 화낼 일도 아니고.”

“…화난 거 맞잖아.”

“아니라니까요. 이제 집에 가죠.”

끝까지 아니라고 대답한 서정연이 나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아니, 저렇게 온몸으로 티 내면서 끝까지 화 안 났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야, 대체!

저 자식, 하필 키도 커서 이동하는 속도도 장난 아니게 빨랐다. 나도 어디 가서 키로 뒤쳐지진 않는데 짜증 나 죽겠네. 서정연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가며 외쳤다.

“아, 미안하다고!”

“…….”

“네가 나한테 했던 또라이 짓 업보 돌려받았다고 생각 안 하냐? 그래도 덕분에 비싸고 맛있는 거 잘 먹었다, 이 양심 없는 놈아!”

뒤도 안 돌아보고 앞서 걷던 서정연이 이어지는 내 외침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뭐, 뭐야. 설마 우는 거 아니지? 후다닥 뛰어가서 살폈지만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야, 너 괜찮냐?”

“푸, 흐…….”

어깨를 바들바들 떨던 서정연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드디어 미친 건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마자 서정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하하! 아, 진짜… 하하!”

아예 배까지 움켜잡고 크게 웃던 서정연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나를 돌아본 서정연이 눈가를 훔쳤다.

그걸 깨닫자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미친놈이 감히 날 속여?

“도해준 씨 진짜 너무 귀엽… 어어, 그 주먹 뭐예요? 설마 저 치려고요?”

“아니? 죽여 버릴 건데?”

“잠깐만요, 잠깐.”

주먹을 꾹 쥐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서정연이 급히 도망쳤다. 저 개자식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계속 웃었다.

“미안해요. 근데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아니, 저도 아깐 화났었어요!”

“구라 치지 마.”

“진짠데… 지금 표정 너무 무서워요, 도해준 씨.”

“당장 이리 와. 이리 안 와?”

서정연이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놓칠 줄 알아? 나도 녀석을 쫓아 있는 힘껏 뛰었다.

“당장 이리 오라고!”

“무서워요!”

빌어먹게 서정연은 달리기도 잘했다. 저 재수 없는 놈은 대체 못 하는 게 뭐란 말인가. 결국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서정연을 쫓아서 뛰어야 했다.

마카롱이 어땠는지 후기를 부탁해야 한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다.

***

거의 기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겨우 씻은 뒤에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달리기를 실컷 한 탓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죽겠다…….”

알바에, 디자인 일에, 부캐 키우는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서정연까지 상대하려니까 체력이 버티질 못했다. 아까 서정연이 말한 대로 오늘은 본캐로 접속해 길드 관리 좀 하고 유진호랑 얘기를 나눈 다음에 바로 자는 게 낫겠다.

아크로드를 켠 나는 ‘Z10N’이 아닌 ‘오늘은일요일’로 접속했다. 게임에 들어가자마자 부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알림이 화면 가득 차올랐다.

[길드] 아스타로트: 오 일욜님~

[길드] rxrx78: ㅎㅇㅎㅇ

[길드] 영화별론가: 일욜님 어서오세용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일욜님 하이

[길드] 저6천원있어요: 요즘 왤케 뜸햇서요ㅠ

[길드] 류페: ㅎㅇㅎㅇㅎㅇ!!

[길드] 불좀켜줄래: 헐 일욜님 오셧네

[길드] 오늘은일요일: 하이

[길드] 오늘은일요일: ㅈㅅㅈㅅ

[길드] 오늘은일요일: 좀 바빴음ㅠㅠ

[길드] sky004: 일욜님 올만~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누가보면 한 몇개월 안들어온줄ㅋㅋㅋㅋㅋ

[길드] rxrx78: ㄹㅇ 일주일 안들어온건데ㅋㅋㅋㅋㅋ

[길드] 아스타로트: 일욜님 없는 일주일이 그만큼 길게 느껴졌다는거지~

[길드] 오늘은일요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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