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뻐근한 두 눈을 꾹 누르며 하품을 참아 냈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이 오늘따라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임소희가 맡긴 일이 늦게 끝난 탓에 잠을 별로 못 자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커피라도 만들어 마셔야 하나. 커피보단 에이드나 티가 취향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한 잔 정도는 마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 정도로 피곤하면 일이 제대로 안 되기도 하고.
‘이따 집에 가서 어제 못한 부캐 키우기도 계속해야 하는데, 큰일 났네.’
새벽까지 게임하려면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그런 고민을 한참 하던 그때였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리면서 서정연이 카페로 들어섰다.
“좋은 오후네요.”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온 서정연이 날 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멀끔하게 생긴 얼굴에서 후광이 번쩍 비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 네. 어서 오세요.”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힘겹게 올리며 마주 인사하자 서정연이 기다란 눈매를 사르륵 접곤 고개를 기울였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일이 좀 있어서요.”
매끈한 피부에 피로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환한 얼굴의 서정연과 달리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친 상태였다.
새벽 내내 기어코 끝까지 내 뒤를 따라다니며 함께 퀘스트를 하는 서정연 때문에 미리 알아봐 둔 히든 퀘스트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결국 히든 퀘스트고 뭐고 새벽 늦게까지 서정연을 데리고 다니면서 스토리 퀘스트나 깨야 했다.
게임을 끄고 나서는 임소희가 맡긴 일을 하고 자느라 수면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다. 누군 계획도 망치고 일까지 두 배로 하느라 잠도 못 잤는데, 서정연은 왜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거야? 진짜 짜증 난다.
‘분명 일부러 그런 걸 거야…….’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커피를 고르는 서정연을 몰래 노려봤다.
생각해 보면 갑자기 먼저 만렙을 찍자면서 내기를 건 것도 이상했다. 나를 엿 먹이려고 그런 거였다니.
“그렇게 열렬히 쳐다보면 좀 설레는데.”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주문이나 하시죠.”
서정연이 내뱉는 개소리를 냉정하게 쳐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킥킥거리던 서정연이 이어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모카 조각 케이크 하나요.”
언제나와 같은 주문이었다. 포스기를 두드리다가 힐끔 서정연의 눈치를 살폈다.
단골손님이라서 커피만 시켜도 나쁘게 생각 안 할 텐데. 아니면 단 음식이라고 다 싫어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만들어 준 슈크림 망고 프라푸치노는 먹었으니까.
“준비되면 진동 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내가 간섭할 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계산을 마치고 카드와 함께 진동 벨을 넘겨주자 서정연도 별말 없이 받아 갔다.
케이크는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아메리카노만 만들면 된다. 잔을 꺼내서 얼음을 넣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근데 솔직히 좀 궁금할 만하지 않나?’
군대를 다녀왔다고 해도 29살이면 보통 취직할 나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낮에 카페에 와서 노트북만 보는데,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
혹시 취준생인 건가? 맨날 카페에 와서 노트북을 하는 이유도 취직 준비나 공부 때문에?
“…….”
트레이에 다 만든 커피와 케이크를 올려 두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번 궁금해지니까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진동 벨을 울리자 자리에서 노트북을 보던 서정연이 카운터로 걸어와 트레이를 들고 돌아갔다. 멀어지는 녀석의 등을 보며 고민하다가 행주를 들고 카운터 밖으로 슬쩍 나갔다.
‘어차피 청소는 해야 하니까.’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혼자서 속으로 변명을 중얼거리며 서정연이 앉아 있는 자리 근처를 맴돌았다.
괜히 다른 테이블을 닦고, 창틀도 닦고, 바닥에 떨어진 작은 쓰레기를 주우며 시간을 끌다가 사장님이 주방 안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서정연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크흠, 야.”
“네.”
내가 다가올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것처럼 서정연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뭐야, 이 재수 없는 태도는. 짜증 났지만 용건이 있으니 일단 넘어가자.
“너… 여기에는 일을 하러 오는 거야?”
“그렇죠.”
“그 노트북으로?”
“네.”
“하는 일이 뭔데?”
“도해준 씨.”
잠자코 질문을 듣던 서정연이 잔을 내려놓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오늘따라 저한테 관심이 많네요. 혹시 한가해요?”
“아니? 존나 바쁜데? 지금도 청소 중인 거 안 보이냐?”
“흠, 그래요? 근데 도해준 씨. 오늘도 8시 넘어서 퇴근하나요?”
퇴근?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지? 의아하면서도 딱히 숨길 내용은 아니라 순순히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쉽네요.”“내 퇴근 시간은 왜 묻는 건데.”
눈꼬리를 아래로 내린 서정연이 돌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전 두 시간 정도 뒤면 일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그럼 제가 적어도 네 시간은 일찍 아크를 할 텐데. 부캐 레벨 차이도 그만큼 벌어지겠죠?”
“뭐야?”
“저보다 먼저 만렙을 찍으신다면서 이런 속도면…….”
거기까지 말한 서정연이 날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도해준 씨가 질 것 같네요?”
“무슨 헛소리야, 이……!”
명백하게 날 도발하는 서정연의 모습에 울컥해서 소리 지르려던 나는 지금 서 있는 장소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손으로 막았다. 다행히 사장님은 아직 주방에 들어가 있었고 다른 손님들도 저마다 떠드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목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겨우 삼켜 내며 테이블에 손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너 솔직하게 얘기해. 백수지? 괜히 하는 일 없으면서 일하는 척하는 거잖아.”
“글쎄요. 편한 대로 생각해요.”
서정연이 나를 도발한 것처럼 나도 일부러 심기를 건드려 본 건데, 녀석은 허무할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여유 가득한 태도에 이가 절로 갈렸다.
“어떡할까요?”
그런 나를 잠자코 응시하던 서정연이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물었다.
“기다릴까요?”
“뭐?”
“도해준 씨 퇴근할 때까지 저도 기다릴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카페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퇴근할 때까지면…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게 가능하겠냐. 나는 서정연을 대놓고 비웃었다.
“여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네가 퍽이나 할 수 있겠다.”
“물론 여섯 시간을 모조리 기다리는 데 쓸 수는 없죠. 어차피 5시쯤에 누구를 좀 만나야 하거든요. 약속 갔다가 다시 오면 얼추 7시쯤 될 거고… 그럼 1시간만 기다리면 되겠네요.”
“…정말 나랑 같이 퇴근하겠다고?”
“그러죠, 뭐. 도해준 씨 일하는 동안 부캐 렙업하면 반칙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맞아! 그건 반칙이지. 내기를 걸었으면 똑같이 해야 공정하잖아.”
웬일로 서정연이 옳은 소리를 했다. 내가 반색하며 맞장구를 치자 서정연이 미소 띤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릴게요? 이따가 8시에 같이 집에 가서 부캐 렙업하는 거예요?”
“좋아! 도망치지 말고 딱 기다려. 알겠냐?"
“도망치긴요. 이따가 약속 갔다가 꼭 다시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혹여나 서정연이 마음을 바꿀까 봐 신신당부를 해 둔 뒤에 몸을 돌렸다. 이거로 서정연이 나보다 먼저 부캐 레벨을 올리는 불상사는 막게 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온 나는 행주를 빨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상한데?’
나보다 먼저 집에 가서 부캐를 키운다면서 5시에 약속이 있다고?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게다가 처음 목적이었던 서정연이 무슨 일이 하는지도 결국 듣지 못했다.
“서정연 이 개자식이…….”
그제야 서정연에게 제대로 휘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정보는 쏙 숨기고서 원하는 대답만 얻어 간 서정연이 너무나도 짜증 났다.
분노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행주를 꾸아악 쥐어짜 구석에 던져두고서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온 그때였다.
“도해준 씨.”
“헉, 깜짝아!”
속으로 잘근잘근 씹던 대상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기겁하는 내게 들고 있던 트레이를 넘겨 준 서정연이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약속이 당겨진 탓에 지금 나가 봐야 해서요. 퇴근 시간 맞춰서 다시 올 테니까 기다려요.”
“엇, 뭐?”
“그럼 이따 봐요. 오늘도 힘내요.”
상큼하게 인사를 날린 서정연이 얼빠진 날 두고 유유히 카페를 떠나갔다. 딸랑,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마치 나를 놀리듯이 몇 번이고 울렸다.
“응? 해준아. 주방 앞에서 트레이 들고 뭐 해?”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반 정도 남은 아메리카노 잔과 손도 안 댄 케이크가 트레이 위에 담긴 채로 내 손과 함께 덜덜 흔들렸다. 어금니를 악물고 사장님에게 애써 웃음을 보인 나는 트레이를 갖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