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한 말을 정리해 보자면.]
“어.”
[네가 알바하는 카페를 자주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알고 보니 흔적이었고.]
“어.”
[사실 흔적은 계정 삭제를 당한 게 아니라 멀쩡히 잘 있는 상태고. 그런 와중에 사칭이 나타난 거고. 일휘일비로 상황을 지켜보던 흔적이 너한테 도움을 청했다?]
“그래.”
[왜냐면 흔적은 카페 알바를 하는 네가 ‘오늘은일요일’인 걸 진작부터 알고 있어서?]
“맞아.”
[…도해준.]
잠시 텀을 두고 나를 부른 마하, 유진호가 진지하게 물었다.
[술 처먹었냐?]
“시발, 아니야.”
[나 바쁘니까 이딴 장난 전화 걸지 마라.]
“아니, 진짜라고!”
억울한 마음에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내 외침을 들은 유진호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말이 되냐. 알바하는 카페의 단골손님이 흔적이라는 거부터가 존나 어이없는데. 너 자다가 꿈꾼 거 아냐?]
“믿기 어려운 거 아는데, 사실이야.”
[그 단골손님이 너한테 처음에 뭐라고 했는데?]
유진호의 질문에 나는 며칠 전, 서정연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핸드폰 번호 달라고.”
[단골손님이라는 사람도 미친 건 맞네.]
“내가 아까 직접 만나서 확인도 해 봤어. 정말로 흔적이 맞는지. 노트북으로 아크로드에 접속해서 다 보여 주더라.”
[하… 너네 그 정도면 세상에 다시 없을 천생연분인데,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게 어때.]
“나 오늘 많은 일이 있어서 피곤하니까 열받게 하지 마.”
[네가 먼저 나 정신 공격해 놓고 양심이 없네. 아무튼, 이 얘기는 왜 하는 건데?]
나는 이어서 서정연의 계획도 유진호에게 설명해 줬다. 다른 길드원들은 몰라도, 유진호는 내가 본캐와 부캐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길드를 도맡아서 관리해 줄 사람이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해 놓는 편이 안전했으니까.
설명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던 유진호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마디 뱉어 냈다.
[야, 그 단골손님 흔적 맞네. 생각하는 꼬라지가 딱 흔적이야. 존나 또라이 같아.]
“동의해.”
[하던 대로 일휘일비나 키우든가, 아니면 무시하고 아크를 접으면 되는데 뭐 하러 거길 기어들어 가겠다는 거지? 할 일이 그렇게 없나? 혹시 백수냐?]
“나한테 물어보면 그걸 내가 알겠냐고요.”
내가 서정연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얼굴과 핸드폰 번호, 나이밖에 없었다. 그 이상의 신상 정보는 알고 싶지 않았고.
[그 제안을 받은 너도 제정신 아닌 건 마찬가진데 뭘 신나서 맞장구치고 있어?]
“그럼 어떡하냐. 어나더 길드가 계속 지랄하는데. 저거 내버려 두면 우리만 손해야.”
이미 다른 유저들에겐 우리 길드가 가해자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증거 영상을 찍어 놨으니 조만간 여론을 뒤집긴 할거지만, 레이드 파티나 무분별한 PK 행위 등 우리 길드원들이 받는 피해도 무시 못 할 문제였다.
“게임사에서 문제를 도와주지 않으니 뭐라도 해 봐야지. 흔적도 뭔가 생각하는 게 더 있어 보이고.”
[환장하겠다, 진짜.]
“그러니까 그동안 네가 길드에 신경 좀 써 줘.”
[그건 알겠는데. 너도 그럼 다른 대비책을 들어 놓는 게 좋지 않겠냐?]
“대비책?”
[흔적 본캐 멀쩡히 살아 있다며.]
유진호가 무심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거 나중에 제대로 써먹으면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유진호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만약 길드에 들어가서 증거를 찾고, 어나더 길드를 해체하는 게 실패하면 흔적의 본캐를 이용해서 최대한 헤집어 놔야 했다.
흔적의 캐릭터가 복구된 건 우리에게 굉장히 좋은 조커 카드였다. 계획했던 게 다 망하더라도 최소한 지금 어나더 길마가 사칭이라는 건 밝힐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서정연의 협조인데.’
재밌을 것 같다는, 고작 그런 가벼운 이유로 부캐를 키워서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서정연이 과연 순순히 협조해 줄지 모르겠다.
수틀리면 그냥 게임 접겠다고 하고 사라지는 거 아냐? 서정연은 아크로드는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키운 계정에도 큰 미련이 없어 보여서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흔적 본캐를 써먹을 수 있게 잘 설득해 놓으라는 거야. 좀 친해져 보라고.]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냐…….”
[노력이라도 해 봐. 어차피 같이 부캐 키우고 길드까지 들어가서 히히덕거려야 하는데, 겸사겸사 친해지면 좋잖아. 천생연분이라니까?]
이 자식이 남 일이라고 말 쉽게 하네. 흔적이랑 친해지라고 시키면 자기도 질색할 거면서.
[그리고 길드원 데려갈 거면 한 명이 아니라 두세 명 데려가라.]
“그래도 되나?”
[한 명보단 두세 명 데려가야 혹시 생길 여론전에도 편하지.]
“그건 그래.”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귀찮아 죽겠다는 감정이 잔뜩 묻어 있는지, 유진호가 꼴좋다는 듯이 나를 비웃었다.
[처음 얘기 들었을 때는 어이없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존나 웃기긴 하다. 너 진짜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냐? 어쩌다 저런 또라이한테 발목 잡혀서.]
“닥쳐…….”
[뭐, 이왕 하는 거 성공하면 좋겠네. 나도 레이드 들어갈 때마다 잡음 생기는 거 슬슬 좆같았거든.]
“이걸 지금 응원이라고 하는 거야?”
[이 정도면 됐지. 다른 용건 더 없으면 끊는다. 레이드 가야 해.]
“…….”
유진호가 미련 없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진짜 너무하네. 이 자식이 정말 나랑 같이 길드를 운영하는 부길마가 맞나 싶다.
***
유진호와 전화를 끝낸 나는 곧장 아크로드에 접속해서 미리 생각해 둔 길드원들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 좋은날씨부터.
좋은날씨: 헐
좋은날씨: 그럼 그 뉴비가 ㄹㅇ흔적이엇던거에여???
오늘은일요일: ㅇㅇ
좋은날씨: 와미친......
좋은날씨: 와.....
좋은날씨: 흔적 ㄹㅇ개또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