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단가는 제대로 쳐 줄 테니까 부탁 좀 할게. 요즘 이런 PC 제품 홍보 디자인이나 제품 컷 잘 뽑아내는 디자이너 찾기 힘든 거 알잖아.”
“음, 받을 수는 있는데요. 작업하는 데에 시간이 좀…….”
마감 기한을 넉넉하게 받으려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만, 지금은 흔적이 없잖아?’
이제는 밤새 가면서 길드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시간도 그만큼 넉넉하겠는데. 기껏 해 봐야 일휘일비를 데리고 다니면서 놀리는 일 정도만 있는 거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바꿔서 대답했다.
“다음 달 중반까지 괜찮아요?”
“어, 정말? 나야 당연히 괜찮지. 너 바쁜 줄 알고 더 오래 걸릴 거라고 각오했는데.”
“복잡한 일 하나가 정리됐거든요.”
“잘됐다.”
“자료 조금만 더 볼게요. 이 파일 말고 더 있죠?”
“응. 바탕화면 보면 중앙에 폴더 하나 있을 거야. 거기에 자료 다 넣어 놨어. 편하게 봐. 나중에 메일로도 보내 줄게.”
임소희가 알려 준 폴더를 켜서 자료들을 살펴봤다. 임소희도 디자인을 전공해서 그런지, 준비된 자료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그사이, 주문했던 음료와 디저트가 준비됐는지 사장님께서 직접 서빙을 해 줬다. 노트북을 테이블 구석으로 밀어 두고 음료 두 잔과 케이크를 내려놓는데,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던 임소희가 입을 열었다.
“근데 도해준, 너 요즘도 그 게임 해? 아크로드?”
“하죠.”
PC 제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하는 만큼 임소희도 게임에 관심이 많았다. 다만 아크로드를 하는 나와 달리 더 인기 많은 ‘제노리스’라는 게임을 하고 있다.
“나도 아크나 시작해 볼까.”
“굳이 더 망겜으로 내려오시는 이유가 뭐예요.”
“네가 안 해 봐서 모르나 본데, 제노도 장난 아니게 망겜이야. 난 너처럼 길마도 아니니까 이것저것 좀 해 볼 수도 있지.”
덜컹, 임소희의 말이 끝난 동시에 뒤에서 테이블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머리를 살짝 숙인 단골손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저래?’
케이크 먹다가 혀라도 잘못 씹었나. 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뭐, 저도 접을까 고민했었는데, 요 며칠 또 재밌더라고요. 길마 자리 아니었으면 재미없었을 때 바로 접고 다른 게임으로 넘어갔을 것 같긴 해요.”
“너 길드 서버 1위 아냐? 서버 1위 길마도 게임이 재미없을 수가 있구나. 길드 이름이 뭐랬지?”
“요일이요.”
길드 이름을 무난한 거로 정해서 다행이다. 그래도 바깥에서 게임이 이러니저러니 수다를 떨고 싶진 않아서 슬슬 대화 주제를 다시 디자인 일로 돌리려는데,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덜그럭, 채앵!
귀를 찌르는 소음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바닥으로 쏟아진 아메리카노와 케이크용 포크가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단골손님이 시선을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당황했는지 살짝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황급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잔을 쳐서요.”
“잠시만요. 건들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
나는 이미 퇴근한 상태였지만 이 난장판을 보고 외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서 아직 상황을 모르는 사장님께 설명하고 대걸레를 들고나왔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네.”
그래도 잔이 깨지거나 하진 않아서 뒤처리가 쉬웠다. 빠르게 청소를 끝낸 뒤 떨어진 잔을 주우며 임소희에게 말했다.
“선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어. 나는 상관하지 말고 편하게 다녀와.”
나와 단골손님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던 임소희가 재빨리 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커피를 닦은 대걸레는 한쪽으로 치워 두고 빈 잔은 싱크대에 넣어 놓은 뒤 손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다른 잔을 꺼내서 아메리카노를 새로 만들었다. 금방 만든 아메리카노와 새 포크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요.”
가져온 것들을 전해 주자 남자가 길게 이어진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네요, 제가 실수한 건데.”
“뭐, 단골이신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적당한 대답을 던져 주자 앉은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었다. 이거로 내가 쓸데없이 남자한테 쿠키나 쥐여 주는 놈이라는 오해가 좀 풀렸으면 좋겠는데.
***
“그럼 오늘 내로 자료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줄게. 나중에 확인해 봐.”
“네. 조심해서 가세요.”
이야기를 얼추 끝낸 임소희는 다음 일정이 있다며 먼저 카페를 떠났다. 나는 아까 사용한 대걸레를 빨고 개인 사물함에 넣어 둔 가방도 챙겨야 했기 때문에 같이 나가는 대신 문 앞에서 임소희를 배웅했다.
어느새 밖은 꽤 어두워져 있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대걸레를 놔둔 직원용 화장실로 가려던 그때였다.
“저, 도해준 씨?”
“……?”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단골손님이 옅은 웃음을 짓고서 나를 응시한 채 서 있었다.
지금 날 부른 거 맞지?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찝찝함에 눈가를 좁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아뇨, 전 여기 직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일하던 중이 아니라 지인분하고 대화하시던 것 같았는데.”
“예, 뭐. 그렇긴 한데. 괜찮습니다.”
적당히 대꾸하고 다시 갈 길 가려던 나를 상대가 재차 붙잡았다.
“그래도 너무 감사해서요.”
“아니, 그러니까…….”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시겠어요?”
“……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번호 주세요.”
“…….”
이 사람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매장 한복판에 서서 얘기를 나누는 우리를 은근슬쩍 훔쳐보던 가게 손님들이 번호 달라는 말을 듣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카운터에서 구경하던 사장님도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로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친…….’
이거 당장 수습하지 않으면 앞으로 알바하면서 고생 장난 아니게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거절했다.
“죄송한데 그건 좀.”
“왜요? 그냥 핸드폰 번호인데.”
“음료 쏟은 건 그쪽 말고도 흔히들 하는 실수니까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
단호하게 설명하자 잠시 고민하듯 입가를 매만진 상대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말했다.
“제가 중간 과정을 좀 생략했네요. 고마운 건 맞지만, 꼭 그 이유만으로 번호 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무슨…….”
“솔직히 말하자면 친해지고 싶어서요. 전부터 생각했거든요. 카페 올 때마다 친절하게 응대해 주시고, 성격도 좋아 보이고. 저한테 쿠키도 주셨잖아요?”
이런 시발, 쿠키 얘기를 지금 왜 해.
기가 막혀서 말문이 턱 막힌 나를 두고 주변에 있는 구경꾼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수군거렸다.
“쿠키는 그때도 말했듯이 서비스, 입니다. 제가 드린 게 아니라 사장님이 드리라고 했던 거고…….”
“그 부분은 일단 번호 주고 마저 얘기하는 건 어때요?”
“…….”
말이 안 통하네. 하아, 한숨을 숨김없이 뱉어 내며 몸을 돌렸다.
“지, 아니, 이상한 소리 마시고. 할 얘기 더 없으면 이만 가 봅니다.”
무심코 뱉을 뻔한 욕설을 겨우 삼켜 내고 원래 목적이었던 직원 화장실로 향했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가 나를 붙잡지 않았다.
이를 갈며 대걸레를 빤 뒤 탈수기에 넣고 힘줘서 꽈아악 짜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단골손님을 탈수기에 넣고 짜 버리고 싶었다.
‘설마 게이인가?’
나는 물기를 쫙 뺀 대걸레를 정리함에 넣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여자도 아니고, 쏟은 커피 치워 주고 서비스로 쿠키 좀 줬다고 대뜸 번호를 물어보는 게 말이 되냐고. 같은 남자끼리.
‘근데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나?’
대걸레가 들어간 정리함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두통이 밀려오는 느낌에 이마를 짚었다.
됐다, 그만하자. 그 사람이 게이든 말든 나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애초에 남의 성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직원용 휴게실로 가서 개인 사물함에 넣어 둔 가방까지 챙겨 든 나는 이번에야말로 퇴근하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히죽히죽 웃으며 인사하는 사장님의 표정이 짜증 났지만, 카페에 더 있을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딸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노란 가로등 불빛이 켜진 거리가 나타났다. 오늘따라 유독 피곤한 기분에 지친 숨을 길게 내쉬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늦게 나오셨네요.”
“…….”
가로등 불빛에 절반 정도 비친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내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질색하는데도 단골손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까 대화가 애매하게 끝나서 기다린 것뿐인데, 너무 싫어하시는 거 아닌가요?”
“하…….”
너무 힘을 줘서 뻐근해지기 시작한 미간을 손으로 가리며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최대한 내리눌렀다.
“대화가 애매하게 끝나긴 뭐가 애매하게 끝났다고 그럽니까? 제대로 확실히 끝난 거지. 번호 안 준다고요.”
“저에 대해서 오해를 좀 하시는 것 같아서요.”
“오해는 제가 쿠키 줬을 때, 그쪽이 멋대로 생각한 게 오해고.”
“왜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진심으로 궁금한지, 남자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