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10/10)

Chapter 9 

몇 분이나 흘렀을까. 천장에선 빗소리가 들려왔다. 두꺼운 콘크리트를 가르는 가여운 자연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춰 아델의 심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지는 소리와 어느새 잠재워진 여자들의 목소리. 아델은 회의실의 의자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제 마음이,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신경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리는 아델의 코트에 덮어진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델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쥐고 있던 의자 손잡이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내려놓았다. 험악하고 처참한 환경이었다. 아델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겪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어미 제니가 죽었을 때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만약 카일이 죽는다면……. 아델은 생각을 멈추었다. 세상 모든 불행을 견주어도 리가 아픈 것을 능가할 순 없었다. 

카일이 당부했던 ‘알고 있던 공포’와 ‘예상하지 못했던 공포’. 그것이 무엇인지 절망과 함께 배웠다. 

아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저히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델의 긴 다리가 볼품없이 늘어졌다. 카일이 리를 강간하던 그때처럼.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애초에 제니가 죽고 카일을 따라나서지 말았어야 했을까. 생에 처음 생긴 아버지에 설레면 안 되는 거였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태어난 게 잘못이었을까. 

아델은 쓰리게 조소했다. 리에게 자신이 백마 탄 왕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는 제 모습이 치가 떨렸기 때문이었다. 펍에서 리에게 했던 짓들을 떠올렸다. 약에 취해 리를 범하고 수차례 무례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자괴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밑바닥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리가 아니었더라면 그 남자는. 펍 속의 남자는 자신에게 강간을 당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게 리였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졌다. 만약 리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남자를 괴롭히며 괴물이 되어갔을 것이다.

자신도 카일처럼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자신이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었다면 리에게 그런 행동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델은 깨달았다. 자신은 결국 카일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는 아버지랑 같을지도 몰라요.”

아델의 목울대가 떨려왔다. 한마디 한마디가 목구멍에 아프게 자리 잡았다. 결국 토해내지도 삼킬 수도 없는 고통이 이어졌다. 카일을 탓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쌍한 리에게는 자신도 카일도 같은 존재일 텐데 말이다.

리는 처져있던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아델의 어깨를 제 품에 끌어안고 그날처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뼈만 남은 리의 손이 까슬거렸다. 시체에게 몸을 맡긴 기분이었다. 아델의 등 사이로 작은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델의 영혼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아델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제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 그리고 거울처럼 리에게 저지른 잘못.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널 어릴 때부터 봐왔는데 넌 카일과 달라.”

리는 당황함에 반말과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주 어린 시절, 아델이 소년이었을 때를 떠올렸다. 깨끗하고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맑은 눈망울. 어깨가 스치면 파르르 떨던 풀꽃 같은 시절이었다. 아델에게 자신이 섞일까 봐, 불순하고 탁한 마음이 섞일까 봐 두려웠었다. 아델은 아델대로 아델답게 빛나기를 원했었다. 그것이 리가 아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한테 미안해요?”

아델은 눈물이 차오른 얼굴로 끄덕거렸다. 리의 몸과 영혼을 상하게 만들었던 과거를 지울 수 없어 마음이 무너졌다. 리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리고 리는 얼마나 살고 싶지 않았을까. 아델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자괴감이 느껴졌다.

“미안하다고 느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어른들도 많으니까. 여전히 아델은 착하고…….”

리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아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델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의 여린 살이 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는 아델의 입꼬리를 따라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작고 병든 손으로 아델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졌다. 감각 없는 그곳이 해머로 맞은 듯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요. 이런 일 한 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도 그렇고… 예전에도 이런 일 많았어요.”

아델은 절망했다. 리의 생존 방법은 합리화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는 자학을 했다. 감정의 종말이 오도록 스스로를 끌어내렸다. 아델은 끔찍한 회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는 카일을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거나 하물며 리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안조차 탓하지 않았다. 그저 그럴만한 일을 당할 사람이라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델은 도무지 바로잡을 힘이 나지 않았다. 아델은 주머니 속에 있는 총을 만지작거렸다. 카일의 총은 모두 시체에 박혔지만 아델의 총은 온전했다. 적어도 한 명은 명중시킬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아델은 제 주머니 속에 잠든 총을 믿어야 했다. 주인이 있는 총알. 이 총알은 천천히 주인을 찾아갈 것이었다. 

“하지 마.”

리는 아델의 눈빛을 읽었다. 아델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재킷 속 깊숙이 총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리는 탁한 눈빛으로 시선을 피하는 아델을 흔들었다. 아델의 눈은 이미 카일의 눈빛 만큼이나 오염되어 있었다. 이럴 순 없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는가. 아델의 순수함만큼은 제 손으로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카일이 말하는 죽을 놈의 저주 타령.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까 두려웠다. 저주받은 자신 때문에 아델의 심신마저 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리는 아델의 총을 빼앗았다. 

“총 가진 거 있으면 다 나한테 맡겨요.”

저택에, 회사에, 방에, 차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아델은 리의 가슴을 찢어놓을 작정이었는지 맑은 눈빛으로 거짓을 고하기 시작했다. 리는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델의 총을 제 심장에 숨기고 싶었다. 사랑하는 아델은, 자신을 사랑하는 아델은 제 몸을 파헤칠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 짓도 안 해요.”

아무 짓도 안 한다던 아델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대기 시작했다. 리는 그 사이로 손을 넣었다. 아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피가 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잡힌다면 리는 그가 그대로 총을 심장에 박았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델은 리의 손에서 머리를 비볐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리의 손바닥에 감겨왔다.

“나는 당신이 불쌍해.”

아델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해맑은 얼굴로 저택을 누비던 작은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아델의 영혼은 카일에게 잡아먹힌 것 같았다. 리는 절망했다. 

충격을 받아 쩍쩍 갈라져 있을 줄 알았던 목소리가 진득하게 물기가 묻어 나왔다. 늘 아델을 보면 여름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름밤의 외로운 빗물이 떠오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아델은 리를 바라보았다. 축축한 아델의 눈물 속으로 익사하고 싶었다. 리의 심장이 쓰라렸다. 당장 약을 부어 넣고 싶을 정도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당신 인생이 너무 불쌍해. 다 내 탓인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리는 소리쳤다. 아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어릴 수도 있는 미성숙한 어른이었다. 그런 아이가 잔인한 마음을 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원래 이래! 이건 내 몫이야! 네가 어떻게 해줄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카일을 사랑해. 카일이 날 강간하든 죽이든 다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

리는 뱉어냈다. 아델을 단념하게 할 무기 같은 말들을 꺼내었다. 

“착한 사람은 늘 내 가슴을 찢어놔요.”

그리고 아델은 그것을 방어할 ‘사랑’이 충분했다. 아델은 슬픔을 참는 듯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입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가운 파도에 먹힐 것 같았다.

“카일을… 우리 아버지를 죽여버릴까요. 난 당신이 원하는 거 전부 해줄 수 있어요.”

리는 총을 세게 쥐었다.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델의 생각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를 유지해야 했다. 이미 아델의 정신은 잔혹한 상상에 팔려 있었다. 한낱 남창에게, 비루한 자신에게 정신이 팔려 아버지까지 죽이려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다 내가 잘못 했어…….”

아델은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사죄했다. 아델을 막는다던 리는 이미 아델과 함께 울고 있었다. 카일로 인해 마음 아플 사람은 저 한 사람이면 충분했는데. 같이 울어줄 사람이 있어서인지 리는 한없이 무너지고 싶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리는 아델의 입을 막았다. 아델은 리의 손바닥을 적실 만큼 울고 있었다. 순수한 아델. 리는 아델이 두려웠다. 아델의 사랑이 자책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착한 사람은 그래서 경계해야 했다. 결국 자신을 나약해지게 만들 테니까.

하늘이 흔들린다는 기분, 우주가 공격한다는 참혹함을 실감했다. 

리는 묵묵히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델보다 10년을 더 산 사람으로서, 짝사랑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아델보다 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짝사랑의 처절함을 느껴봐서 알았다. 리는 카일을 사랑하는 약자로서 모든 감정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하려는 거 전부 이해해 줄 수 있어요?”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아델은 아주 간곡하게 리에게 묻고 있었다. 

‘카일 죽이기’ 

리는 불안했다. 아델의 슬픈 눈빛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리는 ‘안 돼. 안 돼. 안 돼요.’를 외쳤다. 그 순간 아델은 리에게 뺏긴 총을 반납 받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약속해, 아델.”

리는 아델의 얼굴을 고정시켰다. 마지막 오염된 눈빛이 서로에게 얽혔다. 아델은 천천히 리의 눈동자를 핥아내었다. 리의 눈가가 아델의 타액으로 매끈하게 젖어갔다. 아델은 달큼한 리의 눈물을 음미했다. 그 눈물의 보상을 받는 날이 돌아오기를. 

“아무 짓도 하지 마.”

“제발 약속해…. 널 해치는 짓 하지 마…….”

아델은 끝내 대답이 없었다. 

* * *

그날과 같았다. 새벽에 들어온 카일은 한참 동안이나 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그림자를 잡아보기도 했다. 리는 눈을 감고 카일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이제 눈을 뜨지 않아도 카일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외로움을 외면하는 얼굴. 일그러지는 슬픈 표정. 그리고 제가 눈을 뜬다면 가면을 쓴 채 여유롭게 웃을 것이다. 이젠 그런 가식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자신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고 이제 카일의 나이가 되어버린 대단히 외로운 어른이었으니까. 리는 벌떡 일어나 짐 정리를 시작했다. 

“떠날 거예요”

리는 적당히 미소를 거두고 운을 띄웠다. 카일은 피식 웃었다. 리의 말투가, 얼굴이 새초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어리광일 테지. 카일은 코웃음 쳤다. 리는 자신을 떠날 리가 없었다. 

“우리가 소꿉놀이하는 걸로 오해했다면 오산이야. 난 제값을 주고 널 사 왔으니 우린 계약을 했을 뿐일 텐데 왜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군.”

리는 주머니 속 고이 접어둔 종이 한 장을 건네었다. 무사히 돈을 입금했다는 서류였다. 카일은 돈의 원천이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추궁하지 못했다. 마치 떠나는 걸 말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제 마음을 들킬까 봐 카일은 무던한 척해야 했다. 

카일의 망상과 달리 그것은 이안의 자식들에게 받은 돈이었다. 이안은 유서에 리의 이름을 기입해 놓았는지 마약으로 거두어 들인 수입의 절반은 리 차지가 되었다. 카일은 표정관리에 힘이 부쳤다. 

“아델이 줬나?”

역시 의심할 건 순박하기 짝이 없는 제 아들 새끼뿐이었다. 

“그럴 리가요. 돈을 벌었을 뿐이에요. 아델에겐 그 무엇도 뺏을 생각 없어요.”

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을 때는 늘 발치를 바라보곤 했다. 카일은 리의 습관을 알았기에 성큼 리에게 다가갔다. 리의 턱을 쥐고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벌어지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안에게… 받았어.”

리는 뭉개진 발음으로 힘겹게 말했다.

카일은 리의 턱을 놓고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리는 흔들거리는 눈동자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카일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리는 거짓말을 할 때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했으니까.

카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른 등이 굽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리의 종적을 살필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떠나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묻는다면 ‘사랑’부터 시작되어야 했을 테니까. 리의 사랑은 제게 너무도 수고스러울 뿐이었다.

흑발의 고운 목선. 마피아의 표식이 아니더라도 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가느다란 초식동물 같은 목덜미를 쥐어보았다. 허공에서 카일의 손이 헛돌았다. 아쉬웠다. 잡히는 건 늘 차가운 공기였을 뿐 한 번이라도 리가 제 마음속에 제대로 잡힌 적이 있었을까.

리의 행동이 낯설었다. 마지막인 것처럼 여운조차 남기지 않았다. 여지가 그리울 줄은. 마음을 장난치는 것이 간절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연습이길, 부디 연습이길. 이것이 꿈이기를. 현실이 아니기를. 카일은 오만가지 신을 찾으며 마음의 평정을 기도했다. 간절해졌다. 늘 목마르던 리가 갈증이 났다. 

“잘 있어요. 아프지 말고.”

리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랑의 종지부. 카일과의 결말.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땅히 꾸밀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카일은 제게 무엇이었을까. 왜 둘은 영원히 한곳을 보지 못하는 걸까. 사랑이 아닌 기다림이 지쳤다고 하면 카일은 믿어줄까. 마지막까지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자신은 구제불능인 것일까. 왜 카일은 저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증오의 대상을 심어주게 되는 걸까. 해답이 나오질 않는 기구한 사랑이었다.

아델이 더 이상 나쁜 마음을 품지 않길 바랐다. 카일과 아델 사이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희생이 필요했다. 겨우 제 알량한 사랑만 포기하면 모두가 안전했으니까. 카일에겐 아델이 필요했다. 아델에겐 카일이 필요했다. 

[우리 아버지는… 멋있는 분이야. 존경해.]

라며 아델은 술에 취해 눈물을 흘렸었다. 

[그래. 너희 아버지는 멋진 분이야.]

리는 달빛을 바라보며 슬픈 고백을 건네었다. 그런 아델에게 멋진 아빠를 뺏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뺏는 행위는 약탈이었으니까. 

불쌍한 두 사람. 너무도 닮은 부자. 서로에게 꼭 필요한 두 사람. 심장과 심장의 연결을 끊어놓는 짓은 할 수 없었다. 먼 훗날 올바른 아델로 자란 소년을 보며 따스하게 웃어준다면 적어도 제 삶이 부끄럽진 않을 것이다. 카일을 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후련할 것 같았다. 비록 심장이 뚫린 서늘함이겠지만.

“네가 있으면 될 일인데 일을 크게 만드는군.”

“아니 카일은 내가 없어야 해.”

냉기가 뚝뚝 흘러내릴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리는 달그락거리는 캐리어를 세워 들었다. 리는 쌓여진 옷을 풀고 여미고, 반복적으로 정리했다. 겨우 공기가 식어갔을 때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카일은 문을 닫고 나갔다. 오늘 밤도 혼자겠구나. 마지막 새벽은 예외 없이 혼자겠구나. 리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 못된 카일의 베개를 멀리 치워두었다. 13년 만에 처음으로 리는 카일의 침대에서 그의 베개 없이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와일러.”

새벽 동이 트기 전이었다. 기적 같은 부름이 들려왔다. 조금 다정했더라면 꿈이라고 착각했겠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카일의 거친 목소리, 향수 냄새, 숨결 전부 지독한 현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10대의 끝 무렵까지 카일은 화가 나면 늘 ‘와일러’라고 부르곤 했다. 리는 한때 그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공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그 소리가 두려웠다. 마치 저와 선을 긋는 것 같은 단호함이 어린 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리는 가슴팍에 카일을 감싸 안았다. 카일은 리의 허리 속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카일의 손이 닿자 리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발목부터 차가운 뱀이 휘어 감으며 지나가는 것처럼 두려워지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는 누구든 악마가 되고 겁쟁이가 될 수 있으니까. 어둠이란 비겁한 장치였다. 카일은 리의 잠옷 단추를 전부 풀어내었다. 그럼에도 리의 떨림은 멈추질 않았다.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만인의 앞에서 벗겨지던 그 충격은 사랑하는 카일이라도 참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카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떨고 있는 리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저와 몸을 겹칠 때 나타나지 않던 습관이었다. 리는 언제 어디서든 카일에게 두 팔을 벌리며 안겨오곤 했었다. 그러나 리는 필사적으로 몸을 굳히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카일의 ‘무슨 짓’은 수많은 짓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리가 제 몸을 거부하는 것, 아델이 집을 나가게 만든 것, 그리고 자신을 떠나려고 한 것. 카일은 아픈 리를 뒤로하고 그의 캐리어를 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리는 천천히 스탠드를 켜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침착한 얼굴로 잘못 싸여진 짐인 것처럼 취급했다. 리의 빈 캐리어를 옷장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방랑자 신세였던 리는 옷 몇 벌이 전부인 인생이었다. 세벌의 옷을 챙기기엔 캐리어는 너무도 널찍했다. 성당처럼, 이 저택처럼. 리가 몸을 누이기엔 카일의 배경은 너무도 거대했다.

“당신은 아델을 너무 사랑해요. 맞죠?”

리는 턱을 괴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삐딱하게 누워 카일의 넓은 등짝을 주시했다. 카일은 화장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시계와 넥타이를 차분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만약 리와의 이별이 온다면 이런 서두가 어울릴 것 같았다. 리가 아델의 이야기를 꺼내며 멀리 달아날 것 같았다. 이건 연륜이고 리의 마음을 알았던 잔혹한 예상이었다. 슬픈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왠지 리가 떠날 것 같았다.  

“아들이어서 피가 끓는다는 게 진짜인가 봐요. 그래서 아델이 당신처럼 되지 않길 바랐던 거고. 그런 소중한 아들이 날 좋아하니까 너무 슬펐던 거잖아요, 그렇죠?”

리는 쓰리게 웃었다. 그럼에도 평소의 리처럼 굴기 위해 노력했다. 리는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웠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몇 번씩 손이 엇나갔다. 리는 비틀거리며 카일에게 걸어갔다. 거울 속에 카일이 비치도록 고정시켰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카일을 보여주었다. 카일은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 서글픈 얼굴로 울고 있는 자신을 마주했을 때 카일은 리도 같은 표정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말았다. 평생 동안 리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제서야 알았다. 

“예쁘잖아 아델은 착하고… 속이 깊고요. 그런 아들이 나랑 있다는 거 자체가.”

리는 딸꾹질이 나왔다. 눈물을 눌러 담는 바람에 목구멍이 칼칼해졌다. 제 몸이 제대로 된 신체 작용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더럽고… 싫었던 거지?”

딸꾹질은 어느새 눈물로 바뀌었다. 거울 속 카일과 자신이 같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이제 보니 카일은 아델과 닮은 것이 아닌 자신과 닮아있었다. 

카일의 뺨 위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리는 카일의 목을 껴안았다. 아주 가까이 제 가슴속으로 파고들도록 껴안았다. 카일은 더 이상 우는 리의 얼굴이 보기 힘들었던지 제 얼굴을 숨기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리에게 파고들었다. 

“부러워. 창피할 만큼 아델이 부러워. 내가 당신 아들로 태어났다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리는 헐떡거렸다. 카일의 머리가 진동할 만큼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리의 가슴팍이 젖어갔다. 카일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겨우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평생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누구 하나 행복해질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그런 소리는 장난이라도 하지 마. 너랑 피가 섞였다면 피를 다 말려버렸을 거야.”

카일은 애써 냉정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두 눈가가 빨개지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리는 훌쩍거리던 얼굴을 닦아내고 티슈를 뽑아 들었다. 한참 동안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카일이 옷장에 던져버린 옷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카일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카일의 생존을 위해서 아델의 선택을 막기 위해 제가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행복했다. 고작 며칠이라도 카일을 볼 수 있어 의미 있었다. 적어도 죽기 전에 카일의 43살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함께 늙어갈 뻔했는데 사무치도록 아쉬울 뿐이다. 

“카일을 사랑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리는 주저앉았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카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카일에게 버려졌던 교도소에서가 차라리 견딜 만했다. 이렇게 마음을 죽이고 학대하고 카일을 미워해야 하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리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가까스로 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단 한 번만. 카일을.

“10대도 20대도 그리고 30대도… 당신을 사랑해서 난 행복했어.”

리는 캐리어를 들었다. 카일은 촉촉이 젖은 눈망울로 마지막 보라색 눈동자를 담았다. 힘없이 죽어가는 자신의 빛. 리의 영혼 속에서 버려진 자신. 생존을 갈구하는 몹쓸 빛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소멸되고 있었다. 카일은 그날 보랏빛을 어둠 속에 가두었다.

리가 떠나가도록 아주 작은 점이 되어가도록 카일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리를 쫓았다. 이가 굳어버렸다. 몸이 굳어 영혼을 움직일 수 없었다.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미친 듯이 리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침대에 묻어있는 리의 체향이 닳는 것이 아까워 품에 껴안았다. 싸구려 열대과일 향을 찾아서 몸을 뉘었다. 리의 시계, 리가 골라준 넥타이. 리의… 리가…. 나의 리가…. 카일은 거울을 부수기 시작했다. 리의 흔적을 방해하는 것들을 전부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리를 죽이고 싶으면서 살리고 싶었다. 제 곁에 리의 영혼을 방생하면서도 영생하길 바랐다. 카일은 그 모든 것이 타락하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 * *

아델은 리를 찾아 헤맸다. 저택과 카일의 회의실. 그리고 벽난로 속까지. 샅샅이 리를 찾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카일의 방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고 생각했다. 카일이 자신을 지하실에 가두고 어둠을 선물해준 그날처럼. 

결국 카일도 어둠이 집어삼키고 말았다. 카일의 방은 큰 지하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카일은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카일이 무언가에 고뇌하는 일. 그것은 아델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후회와 절망을 담고 있는 인간적인 면모였다. 아델은 그런 카일이 낯설었다. 부디 한 번쯤은 보고 싶던 카일의 나약한 모습은 생각보다 처절했다. 결국 그도 인간이었음을. 아델은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아델은 노트북을 열었다. 카일의 방문 앞에 주저앉아 작은 노트북을 연결했다. 타닥타닥 아델의 타이핑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해저든’을 들으며 자위를 했던 그날처럼. 얇은 벽 하나를 두고 기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카일의 방문도, 카일을 떠나지 않을 것 같던 리도. 온통 세상은 수상한 일 투성이었다. 그리고 리에게 메일을 보내는 몹시도 집착스러운 자신도. 아델은 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겨우 이메일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아델은 노트북을 닫았다.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한 연정에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껴야 했다. 카일을 죽이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좋은 아침.”

오후 네 시가 막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아델이 노트북을 허리에 얹고 일어서려는 순간 카일의 방문이 마침내 열렸다. 카일은 평소보다 더 짙은 정장을 입고 머리를 꼿꼿하게 올린 스타일이었다. 무언가 절제하고 싶은 듯, 유혹에 휘둘리지 않으려 스스로를 가두는 성인 같았다.

‘오늘이 마지막 아침이길.’

아델은 카일을 비웃었다. 입꼬리가 떨려올 정도의 비웃음이었다. 아델은 재킷 속의 총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아침 성당에서 뵙죠.”

카일은 구태여 이유 따위를 묻지 않았다. 정갈하게 정리된 시계를 부드럽게 만질 뿐이었다. 카일은 창백하고 건조하게 웃었다.

* * *

아델은 그날 리를 찾았다. 리는 겨우 4km가 떨어진 슬럼가에 살고 있었다. 리는 평생 도망도 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왠지 아델은 제가 리를 찾은 것에 대해 스토커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아마 리가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마주한다면 허무함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러나 카일이 찾기 전에 리를 찾아야 했다. 

리는 이곳에서 가장 집값이 떨어진 곳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 흔한 개도, 우편함도 없는 폐허 같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델은 문을 두들겼다. 한참 동안의 침묵. 공기 같은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창문의 커튼이 살짝 걷혔다. 방문자를 확인하는 리의 절차인 듯 몹시 조심스러워 보였다. 

“왜…….”

리는 어떠한 인사도 없이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이곳까지 도망쳤는데 찾아왔냐는 의미인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요.”

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델은 허락을 구하는 일이 아닌 카일을 죽이고 난 뒤 리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리는 한숨을 쉬었다. 리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리는 아델의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손을 제 두 손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어떠한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리의 손이 따뜻하게 감싸오고 있었다. 

“전 아델 씨에게 겨우 스쳐가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에요. 세상에 아버지는 한 사람뿐이고.”

리는 아델의 손을 놓았다. 툭.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가 천둥소리 같아서 아델은 두려움에 지레 겁을 먹고 말았다. 리가 제 손을 놓는 것이 이렇게나 참혹하게 느껴지는 건 거사를 앞둔 떨림이라 생각해야 했다. 

“겨우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서 그렇습니다.”

아델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야 했다. 카일을 죽이기 전날, 리를 만나러 오는 것도. 리가 말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 * *

새벽동이 터 오고 있었다. 거대한 나뭇잎이 바람에 맞춰 흔들거렸다. 진한 초록빛의 넝쿨이 성당을 덮쳐오고 있었다. 조각상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비온 뒤 축축한 냄새가 감돌았다. 터벅터벅. 반대편으로 아델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가 다시 한 번 흔들거렸다. 거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델의 목덜미 사이로 빗물이 떨어졌다. 아델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한 회색빛의 망망한 안개 길 사이로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음산한 날이었다. 

가슴팍에 고이 꽂아둔 장갑을 꺼내었다. 가죽 냄새가 아델의 손을 감싸 안았다. 찰랑. 구둣발이 작은 웅덩이를 헤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빗물이 닿았던 자리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새벽종이 치고 있었다. 3년 전에도 지금도 일정한 시간대에 울리고 있었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아델은 경건한 얼굴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신이 버린, 한낱 빗물에 씻겨 내려갈 수 없는 불결한 마음을 다잡았다. 아델은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스스한 고요함이 아델의 숨을 옥죄여 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창 사이로 아침을 알리는 볕이 들이쳤다. 회색빛의 의자 위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해저든.”

아델은 카일을 불렀다. 카일은 두 손을 맞대고 촛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님 곁으로.”

카일은 결코 아델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델은 천천히 카일을 향해 걸어갔다. 수많은 햇볕과 회색의 두꺼운 벽 몇 천 년의 신앙심이 갇힌 그것들이 흘러내렸다. 오르간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착각이 들었다. 카일의 눈동자는 의심한 점 담지 않고 있는 고고한 자태였다. 카일과의 거리가 닿았다. 마침내 시선이 엉켰다.

“당신을 죽일 겁니다.”

카일이 웃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두고 아델은 총을 꺼내었다. 카일을 생각하며 수천 번도 더 쥐고 있던 탓에 손잡이 부분이 바래있었다. 카일은 아델의 총구에 순순히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아델의 손끝이 더 이상 떨려오지 않고 있었다.

“리와 같은 소리를 하는군.”

카일은 오히려 초연했다. 마치 죽길 원하는 리처럼 굴고 있었다. 희망도 열정도 소진된 상태로 아델의 조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은 마지막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천천히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손톱 틈으로 손가락이 나가면 카일의 머리는 터질 것이다. 더 이상 카일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 제 장애를 만들고 제니를 죽이고 리를 교도소에 보낸 카일을. 더 이상 이 악마 같은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카일은 성자의 심판이 절실했다. 

아델은 희열이 느껴졌다. 동시에 카일을 잃게 되는 기대가 슬프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카일이 죽어야 할 이유가, 제가 카일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수천 가지인데 겨우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정이 퇴색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아델은 마지막으로 카일의 사과를 듣고 싶었다. 죽지 않을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리와 닮은 사람을 데려와 죽게 만들었을 때. 왜 자신에게 그랬느냐고 묻고 싶었다. 리가 좋아서 매일 밤을 설쳤던 소년의 꿈을 짓밟은 카일. 아델은 그날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거야. 그냥 쏴, 아델.”

“마이 썬.”

익숙한 카일의 음성이 들렸다. 카일은 천천히 재킷을 벗어두었다. 카일이 총을 넣는 공간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델이 선사하는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카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델은 카일의 눈동자를 기리며 눈을 감았다. 총구에 딱딱한 카일의 이마가 닿았다. 이대로 천천히 방아쇠에 손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비명과 괴성이 들려왔다. 성당 창문을 찢어낼 듯한 리의 비명소리. 익숙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눈을 뜰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총구에 느껴지는 감각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아델은 눈을 떴다. 총알이 박혀 흔들리는 남자. 새하얀 셔츠에는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리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카일. 아델은 무릎을 꿇었다. 리의 피가 축축하게 성당을 적셔내고 있었다. 아델은 카일과 같은 목소리로 절규했다. 왜 이곳에 리가. 왜, 리가. 리가 죽어야 했을까. 아델은 제 심장을 쳐내기 시작했다. 카일은 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창백한 카일의 얼굴이 리의 피로 적셔지고 있었다.

“괜.. 찮아……?”

리는 끊어질 듯한 발음으로 카일을 불렀다. 카일은 리의 몸에 얼굴을 묻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델은 텅 빈 눈동자로 리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지옥이기를. 아델이 선사한 천국이기를. 끔찍했다. 다시 한 번 눈을 뜬다면 전부 사라져 있는 꿈이기를.

리는 눈동자 한가득 카일을 담았다.

“사랑해…….”

리의 뺨이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이 아니었다. 붉은 영혼의 핏물이었다. 카일의 고독한 피, 카일의 불순한 피, 아델의 배신감이 섞여 리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 누구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빨리 나가… 아델. 곧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까.”

리는 피가 역류하고 있는 몸으로 아델의 등을 밀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델을 걱정했다. 아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델은 피로 젖은 제 무릎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곧 3분이면 구급차가 도착할 것 같았다. 경건한 성당에 불성한 자신이 모든 것을 저지르고 난 이후에는 현실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눈을 잃은 아델이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담은 것은 죽어가는 리였다. 

아델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핏물에서 일어나 설원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카일의 끝은 결국 리의 끝이었다. 카일을 죽인다는 것은 리의 죽음과 같은 일이었다. 

리는 눈을 힘겹게 뜨고 카일의 뺨을 바라보았다. 쿨럭거리는 심장에 맞춰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방아쇠를 피하기 위해 카일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리였을 것이다. 

카일은 리의 몸에 영혼이라도 겹쳐질 듯 리를 끌어안았다. 허무함이었다. 허탈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카일을 위해 몸을 던진 리를 눈앞으로 봤을 때 아델은 제 심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결국 리는 카일이 전부였고 둘은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제가 카일을 쏘아도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선명해질 뿐이었다. 21살 아델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 * *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카일은 리의 이마를 쓸어보았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손등에는 칼 같은 링거가 꽂혀있었다. 여린 리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작은 리를 감싸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씁쓸한 병원의 향기가 카일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아델은 이 주일이 흐르도록 연락이 되질 않았다. 어디서 살아가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 무엇 하나 카일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리 또한 이 주일째 혼수상태였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죽을 운명이었을까. 카일은 잠든 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카일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을 쓸어보았다. 리의 보드라운 뺨이 비벼내던 장난이 생각났다. 

그날 밤 리는 눈을 떴다. 분주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정신이 들었다. 이제야 현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카일은 서둘러 등을 돌렸다. 면도도 하지 못하고 머리도 정리하지 못한 얼굴로 리를 마주할 수 없었다. 흐트러진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카일은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 순간 카일의 팔목 위에 희미한 살결이 느껴졌다. 링거가 꽂힌 손이었다. 카일은 등을 돌렸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의 소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리의 가녀린 숨결 소리만 들려왔다.

“어디 가?”

리는 카일의 손을 붙잡았다. 카일은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정돈되지 않은 수염. 그리고 풀어 헤쳐진 셔츠까지. 리는 카일을 향해 싱긋 웃었다.

“부끄러워?”

“그럴 리가.”

카일은 얼굴을 가리던 것을 멈추고 리를 바라보았다. 이 주만에 3킬로가 훌쩍 빠질 정도로 고달픈 삶을 살았다. 그리고 깨어난 리는 2주 만에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다시 리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또… 갈 거야?”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리는 울먹거리는 숨을 참으려 목울대에 힘껏 힘을 주었다. 

“미안해. 이 말뿐이야.”

카일의 무릎이 떨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작아 보이는 순간이었다. 리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일의 어깨가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 카일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

카일은 그 말만을 반복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미 리의 귓가에 카일의 사죄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카일이 눈앞에서 사라질 만큼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카일은 무릎에 얼굴이 닿을 만큼 숙이고 있었다. 리에게 아무런 손길이 닿을 수 없다는 듯 카일의 바지가 눈물방울로 젖어가기 시작했다. 리는 따가운 눈을 애써 뜨려 노력했다. 제 눈앞에 카일이 사라지기 전에 제정신을 찾고 싶었다. 

카일은 어느새 숨 막히는 고백을 끝냈는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영영 끝인 걸까. 카일이 돌아오지 않는 걸까. 리는 혼란스러움에 숨이 가빠졌다. 다시 한 번 카일을 놓치게 된다면 그땐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카일을 향해 몸을 던진 건 본능이었다.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매일 성당에서 아델과 카일을 기다렸다. 아델이 카일을 죽인다는 그 말이 충동적인 결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델과 카일이 마주칠 만한 곳은 성당이 전부였다. 아델은 제가 10년 동안 갇힌 성당을 저주했으니까. 자신이 총에 맞아 피를 토해낸다면 아델의 저주가 잊힐까 했었다. 카일을 위해 몸을 던졌지만 결국 아델이 행복하길 바랐다. 모든 분노를 씻어내고 카일을 마주 보길 기도했다. 성당에서의 마지막 기도였다.

“떠나지 마… 제발. 그러면 되잖아…….”

리는 돌아서는 카일을 붙잡았다. 카일은 천천히 리를 바라보았다. 카일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제 상태보다 걱정되었던 것은 고질병이었다. 심장 아래에 총을 맞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카일이 걱정이 되었다. 죽음이 ‘그까짓’으로 생각될 만큼 카일이 늘 간절했다. 리는 카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늘 그랬듯이 카일은 등을 돌릴 테니까.

“앞으로 평생 네 옆에 있을 거야. 약속하지.”

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울컥 쏟아지는 서러움을 토해내고 싶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카일은 리의 침대로 다가왔다. 아주 조심스러운 프러포즈를 건네는 듯 보였다. 리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설레었다. 카일을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천막 속에서 구해주던 커다란 손이 보였다. 리의 심장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면 안 돼. 진짜 실망할 거야.”

리는 불안했다. 카일의 셔츠 자락을 잡고 재차 물어야 했다. 불안했다. 카일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리는 함부로 카일을 사랑할 수 없었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닌 카일이 위험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쓸 수도 없고 큰일이네.”

카일은 왠지 리가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처음 리를 데려올 때처럼. 리는 애절하게 옷자락을 잡으며 늘어졌다. 그 힘이 미약했다. 카일은 마음이 쓰렸다. 

“그럼 우리 같이 있는 거지?”

“응.”

“영원히 나랑 사는 거지?”

“그래.”

카일의 말이 떨어졌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입매가 휘어졌다. 리는 눈물을 쏟아냈다. 카일은 리의 뺨을 감싸 안았다. 리의 건조한 살결이 카일의 손에 감겨왔다. 

카일은 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보았다. 각진 어깨는 살점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전부 자신의 탓이겠지만. 리는 카일의 허리를 가까이 끌어안았다. 현실임을 믿을 수 없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꿈에서 깨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꿈 아니야.”

카일의 목소리에 결국 리는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카일과의 끝이 이럴 줄은 몰랐었다. 적당히 살다 잊힐 사람, 한때 주워 왔던 어린 소년 정도로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결코 카일의 인생에 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확신했었다. 겨우 스쳐가는 인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카일과의 끝맺음이 인생의 끝을 달려가는 동반자라고 느껴졌다. 카일의 분명한 말투와 확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과거를 달래주는 따뜻함까지. 리는 행복한 현실에 갇히고 싶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평생 깰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 리는 카일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 

번져가는 핏자국으로 끝이 날 줄 알았던 인생에서 카일이 다시 나타났다.

“사랑해.”

카일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리를 가슴 절절하게 바라보던 카일의 눈동자에서 맑은 줄기가 떨어졌다.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없어질 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리는 수줍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이지 마. 보고 싶었어. 넌 이 주일 동안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일은 리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끝에 부드럽게 감겨왔다. 카일은 눈을 감았다. 이 평화를, 행복을 오랜만에 누리고 싶었다. 제 마음을, 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리를 놓칠 수 없었다. 제 인생에서 리를 포기하는 것은 결국 죽음과 맞바꾸는 고통일 테니 말이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건 리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랑해.”

카일은 다시 한 번 리에게 속삭였다. 리의 귓바퀴가 노을빛에 젖어 번져가고 있었다. 창틈 사이로 봄이 들어오고 있었다. 주황빛의 노을과 선선한 바람. 더 이상의 겨울은 없었다. 창문 틈에 녹고 있는 새하얀 눈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살갗이 아릴 듯한 추위는 없었다. 

손이 잘릴 듯한 추위를 겪던 시절. 

결국 사랑이었다. 놓아도 잡아도 사랑이었다. 카일은 노을빛에 젖은 리와 눈을 맞췄다. 어느새 따사로운 봄이 오고 있었다. 짙은 꽃향기가 불어왔다. 청량한 잎사귀와 섞인 매혹적인 향이 흘렀다. 카일과 리 사이로 부드러운 시선이 얽혔다. 

[The End]

0